피멍 들고 퉁퉁 부은 얼굴

라시드 이야기 4

by 고추장와플

"라시드, 찬장 문을 고쳐 준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창문도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서 문이 안 닫히는데요?"

"내가 내일 와서 고쳐 줄게요. 공구를 가지고 와야 해서요."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매트리스를 옮겨주고 책상을 빌린 것 때문에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창문은 두꺼운 책으로 열리지 않게 고정을 해 두었지만 완전히 닫히지 않아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날씨는 이상고온으로 여전히 가을날씨 같았다. 한파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날이 밝았다.

숟가락, 젓가락 네 벌, 포크와 나이프도 네 벌, 대접과 접시도 딱 네 개씩 가져와 찬장에 넣었다. 냄비도 한 개, 프라이팬도 한 개지만 마음은 편하다. 음식을 해 먹을 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을 때 물소리를 신경 쓰지 않고 샤워를 할 수가 있다. 살면서 한 번도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렇게 감사하고 소중한 것인지 미치 알지 못했다. 나는 삶을 살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 자주(自主)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애초부터 내가 지시를 따라야 하는 사람들과는 살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집 근처에 있는 슈퍼에 가서 재료를 사 와 아이들에게는 볶음밥을 해 주고, 나를 위해서는 마파두부 덮밥을 만들었다. 남의 집 주방에서 허락받지 않고 주방을 썼다고 싫은 소리를 들었었는데, 한이 맺힌 사람처럼 사천고추향이 가득한 마파두부에 내친김에 라면까지 끓인다. 김치도 꺼내놓는다. 냄새나는 음식들로 한 상 가득 차리고 우리만의 잔치가 시작된다. 남편도, 아이들도 그간 그리웠던 쌀밥을 허겁지겁 먹는다. 얹혀살던 사람들에게 밥을 많이 먹으면 화장실에 못 가니, 감자를 먹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내놓은 감자만 먹었는데 이제는 그런 헛소리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오후가 되자 남편은 밖으로 나갔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나 라시드예요. 찬장 문이랑 창문 고치러 왔어요."


문을 열고 라시드를 맞는데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자꾸 얼굴을 돌린다.


라시드의 얼굴은 말벌에 쏘인 듯 퉁퉁 부어있었고,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있었다. 아직도 입에서는 술냄새가 풍겼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하필 남편도 나가고 없다. 아이들과 나만 있는데 얼굴이 퉁퉁 붓고 피멍이 든 모로코인을 집안에 들여도 되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가운데 라시드가 말한다. 가지고 온 쇼핑백을 보여주며


"뭘 좀 가져왔어요."(처음 만난 날부터 계속 친구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참으로 적응하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쇼핑백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혹시 무기가 아닐까? 이러다 나도 라시드의 얼굴처럼 피멍이 잔뜩 들고 말벌에게 쏘인 것 같은 얼굴이 되지 않을까? 남편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 해 놓고 통화 버튼을 언제 든 누를 수 있게 준비를 한 뒤 쇼핑백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