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드 이야기 3
라시드가 말했다.
"토마스의 부모님이 와 있어요. 두 달만 살 거라도 들어와 사는 사람 얼굴은 한 번 봐야 할 것 같대요. 그리고 열쇠도 넘겨줘야 하고요."
일단 건물주를 먼저 만나고 짐을 옮기기로 했다. 살기로 한 2층 아파트로 올라가니 점잖게 차려입은 어느 노부부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이들도 함께 살 거라고 했는데 같이 안 왔나요?"
"아, 짐부터 먼저 옮기고 아이들은 저희와 함께 자전거로 올 거예요. 자전거로 통학을 해야 해서요."
"토마스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두 달 정도 살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구두로만 하기엔 좀 그러니 간단하게라도 계약서를 작성합시다. 두 달이 지나면 달 단위로 연장 가능한 걸로 하죠. 가스와 전기는 따로 청구가 될 거예요. 다만, 지금 우리가 제공하는 가격은 토마스의 지인이고, 급한 상황이라서 싸게 준 거니까 공식적으로 주소이전은 할 수 없어요."
"화재보험이나 인터넷 설치도 불가능하겠네요?"
"이 주소로 당신들의 이름이 올라가는 건 안 해 주었으면 하네요. 그러면 저희도 이것저것 복잡해져서요."
화재보험이야 조심하면 될 일이고, 인터넷은 모바일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라서 크게 상관은 없겠다 생각했다.
남편과 토마스의 아버지는 계약서와 가스 미터기를 체크하기 위해 나갔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열쇠 한 보따리를 꺼내더니, 침침한 눈으로 열쇠를 찾기 시작한다. 토마스가 부모님이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셔서 세입자 관리가 힘든 상태라 했는데, 아주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열쇠를 확인하는 것을 보니 곧 토마스가 건물주왕국의 왕자에서 왕으로 등극할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찾더니 말했다.
"집 열쇠는 세 갠데 현관 열쇠는 하나밖에 없네요. 열쇠 몇 개 필요하댔죠?"
우리에겐 적어도 열쇠가 세 개가 필요했다. 막내를 제외하면 셋이 각자 다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고, 다른 일정이 있어 집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저희는 세 개가 꼭 필요합니다... 셋 다 각자의 일정이 다 달라서요."
"아, 어쩌죠? 지난번에 살 던 세입자가 열쇠를 안 돌려주고 그냥 도망간 것 같아요. 세상에나, 청소도 안 해 놓고, 물 새는 것도 말 안 하고 마지막 달은 돈도 안 내고 그냥 도망가 버렸지 뭐예요?"
그녀의 말을 들으니 건물주왕국의 왕과 왕비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 쓸 일도, 일일이 확인해야 할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피곤한 일일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토마스의 이웃인 우리를 믿어서였을까. 그렇게 몰상식한 세입자들을 수 없이 봐 왔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마스터키는 하나 더 있네요. 그런데 이 마스터키는 하나밖에 없음은 물론이고, 이 열쇠로 다른 집까지 다 들어갈 수 있는 열쇠니 절대 다른 집에 들어가서는 안 돼요."
우리가 다른 집에 들어갈 일은 없겠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세입자에게 마스터키를 넘기다니.
남편과 토마스의 아버지가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열쇠문제를 이야기했다. 토마스의 어머니가 마스터키를 주었다고 말하니 토마스의 아버지는 기가 막혀했다. 하지만 생활을 이어가려면 우리는 열쇠가 필요했고, 결국 며칠 간 마스터키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조만간 새로운 열쇠로 바꾸겠다고 했다. 현명한 결정이다. 열쇠 두 개로는 서로 일정을 맞춰보면 생활이 당분간 가능 하기는 할 것 같았다.
물론 우리가 남의 집에 들어가 보는 일은 없겠지만, 상식적인 것이 보통은 가장 좋은 결정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가고 새로운 세입자가 독신이 아니라면 어차피 열쇠가 두 개는 필요할 테니.
토마스의 어머니는 계좌번호를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하고 그녀의 남편과 함께 아파트를 나섰다. 토마스가 건물주왕국의 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 같았다.
옮기려던 짐을 마저 옮기려 밑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작업을 하던 라시드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짐 옮기는 거 어려우면 도와줄게요, 친구!"
첫날부터 우리 모두 형제, 자매, 친구라더니 이젠 남편에게도 친구라고 한다. 라시드에게는 여전히 술냄새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몸을 쓰며 살아온 살아온 사람답게 침대 매트리스 세 개를 번쩍 들어 순식간에 옮겨 주었다. 원룸에서 네 식구가 먹고 자기 위한 최소한의 살림살이지만, 좌식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과 남편에게 매트리스는 필수였다. 가구라고는 식탁 하나와 의자 네 개, 매트리스 세 개가 전부였다.
라시드의 도움으로 무거운 짐들을 빨리 옮길 수 있었다. 라시드는 혹시 책상 하나 필요하지 않냐 물었다. 아래층에 있으니 원하면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책상이 있으면 좀 더 편하게 숙제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필요하지 않으면 두 달만 빌리겠다 말했다.
짐을 내려놓고 찬찬히 살펴봤더니 고쳐달라던 부엌 찬장문 하나는 아직도 덜렁거리고 있었고 창문 손잡이 하나가 헐거워져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