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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안락사와 인생송별파티

삶과 죽음을 온전히 내 자율적인 의사에 따라 결정한다

by 고추장와플

2008년 지구반대편의 나라 벨기에로 이사를 와서, 때로는 우리와 비슷한 점에 놀라기도 했고 때로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사고방식과 법체계에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지구반대편의 나라이니,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다른 사고의 차이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요. 오늘은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가 낯설게 느끼는 벨기에의 안락사에 대해 써 보고자 합니다.


안락사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락사(安樂死, 그리스어: ευθανασία →good death, 좋은 죽음, 영어: euthanasia)는 불치의 중병에 걸린 등의 이유로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 또는 사람에 대하여 직·간접적 방법으로 생물을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안락사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가 의사에게 안락사를 신청하여 약물투여로 삶을 종료하는 것이고, 조력안락사는 의사가 약물을 처방을 하여 환자에게 주지만 스스로 투약을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극적 안락사는 연명치료 거부로 삶을 존엄하게 끝 마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캐나다, 콜롬비아, 스페인, 호주, 뉴질랜드가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합니다. 우리가 흔히 안락사라 하면 떠올리는 나라인 스위스조차 적극적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고, 조력안락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윤세리역의 손예진이 스위스에 안락사를 하러 가는 설정이 있는데, 전 세계 모든 국가를 통틀어 조력일지라도 안락사를 외국인에게도 허용하는 나라는 스위스 밖에 없습니다.




2014년 우연히 TV로 벨기에의 운동선수인 Emiel Pauwels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관광도시인 브뤼헤 출신인 그는 14세부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노인이 되어서도 그는 운동을 계속하여, 노인부 유러피안 챔피언십에도 출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요. 2013년, 95세가 된 그는 청천벽력 같은 대장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같은 해 3월과 6월까지도 벨기에 챔피언십 대회에 출전하였는데 말이죠. 선고를 받은 지 몇 달 만에 그는 치료를 선택하지 않고, 안락사를 신청합니다. 여기까지는 나이도 적지 않은 만큼 그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


https://youtu.be/tp_N2NL73E8?si=UzI_L7tJyqdCwc73

프랑스어로 방송 된 Emiel Pauwels의 안락사선택 뉴스

제가 정말 낯설게 느꼈던 부분은 안락사를 선택한 그다음의 이야기들입니다. Emiel Pauwels는 안락사 바로 전날에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 파티처럼, 인생송별파티를 엽니다.


안락사 신청 후 얼마 후,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말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친구들을 위해 파티를 열 것입니다. 모두에게 샴페인을 대접할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떠난다고 해서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길 바라거든요."

(Nog één hoogtepunt wil hij beleven, voor hij sterft: "Ik geef een groot feest voor mijn vrienden, volgende maandag. Met champagne voor iedereen! Want ik wil niet dat mensen verdriet hebben ­omdat ik ga.")


다음 사진과 같이 온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 행복하게 샴페인도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벨기에 공영방송국은 그의 인생송별파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내보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인생송별파티를 하고 그 다음날 그는 안락사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다큐멘터리는 그가 안락사로 세상을 떠나는 날에 방송됩니다. 그리고 제가 그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죠.


아들과의 인터뷰도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었는데요, 아버지의 선택이니 존중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즐겁게 파티를 하려고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아래의 사진 노인 옆에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아들이고 먼발치에는 딸들이 있습니다.

https://www.hln.be/meer-sport/atleet-emiel-pauwels-95-kiest-voor-euthanasie~a6796997/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배를 들고 함께 가족사진을 찍습니다.


그는 내가 앞으로 더 이상 뛸 수 없다면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며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의 선택을 존중해 파티를 열어줍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화기애애한 파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충격을 받았지요.



벨기에에서는 1980년대부터 활발하게 안락사에 대해 논쟁이 오고 갔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벨기에의 안락사 법안이 여러 차례 통과되지 못하고 표류하였으나 2002년에 드디어 법안이 통과가 되어 적극적 안락사가 합법화됩니다. 안락사의 허용범위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신체가 건강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생을 살아가는 데에 고통이 크다면 이 또한 안락사의 범주에 해당합니다.


2016년에는 법이 개정되어 미성년자도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사실 여기서 좀 충격이었습니다. 미성년자도 원하면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다니... 하지만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고통은 인정되지 않고, 신체적인 고통만 인정되며, 자유의지를 피력할 수 있는 시점부터만 인정됩니다.


벨기에에서 현재까지 안락사가 진행된 미성년자 중 가장 어린 환자의 나이는 9세로, 치료 불가능한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2016년 자유의지를 피력가능한 나이라 판단되어 안락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실제로 법령에는 어디에도 안락사를 신청가능한 최소 나이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자유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나이면 성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습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의 안락사를 위해서는 항상 부모의 동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이와 동반하여 담당의사와 정신과 상담의가 자유의지피력가능 유무를 결정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가장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나라 중의 한 곳이 이곳 벨기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지에 대한 진보적 성향이 그냥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벨기에의 안락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적 사상은 임마누엘 칸트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네룩스 3국은 안락사가 합법이고, 이 두 철학자의 나라인 독일은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자율적으로 도덕법을 설정하고 따를 의무가 있으며 도덕적 행위는 보편적 법칙으로서 항상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은 스스로 강해지려는 욕망을 가지며 (Wille zur Macht) 외부의 영향 없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강한 인간(초인, Übermensch)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개인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실현하는 한 형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국은 아직은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1%가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https://www.seoul.co.kr/news/plan/euthanasia-story/2023/07/12/20230712001005


저는 안락사 자체를 옳다 그르다로 판단하기 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이성적이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안락사를 공론화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자유의지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와플이야기, 맥주이야기 말고 좀 심각한 이야기지만 제가 겪은 가장 큰 문화충격이었기도 하고, 인간 존엄과 자유의지에 대한 어렵고 무겁지만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보고자 안락사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음 시간에 또 다른 벨기에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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