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외향형 벨기에 직장인이 혼자 밥 먹는 이유

비밀의 정원에서 나 혼자 먹는 도시락의 꿀맛

by 고추장와플

저는 벨기에에 살고 있는 외향인입니다.

손만 빨고 있다 죽을 수는 없으니 일을 해야죠.

그 말은 즉슨, 회사를 다닌다는 말입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날씨가 요즘 한창 따듯하고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날씨가 안 좋기로 세계 톱클래스급의 벨기에에도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저는 밖으로 혼자 도시락을 들고나갑니다.

도시락 메뉴는 뭐냐고요?

저는 한식파라서, 빵 같은 것을 가끔 먹지만

주로 김치볶음밥, 마파두부덮밥, 김치찌개와 같은 것들을

냄새 폴폴 풍기며 먹지요.


냄새가 날까 봐 밖에 나가냐고요? 아니지요.

냄새가 나거나 말거나, 저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제가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다.


비 오거나 우중충한 날이 일 년에 300일가량 되는 벨기에에 사니,

그런 날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 그냥 직원 식사공간에서 밥을 먹습니다.

회사지원 직원급식 따위는 없습니다.

직원들 대부분이 도시락을 싸 옵니다.


(사실 제가 일하는 곳은 대학이라 학생식당이 있고,

직원들도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만 가격이 착하지 않습니다.

한끼에 15000원입니다.

비싼 데 맛도 없습니다. )


제가 도시락을 싸와 직원공간에서 밥을 먹으면

다들 와서 구경합니다.

오, 이건 무슨 음식이야?

다들 무슨 맛일지 궁금해서 미치려고 합니다.


직원공간에서 밥을 먹으면

그들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해 줘야 하는데

저는 배가 매우 고픕니다.


입에 넣고 우적거리며 전투적으로 밥을 먹는데

자꾸 질문하면 짜증이 납니다.

가끔 정말 대답하기 싫을 때는

그냥 먹어볼래?라고 한 숟갈 내어 줍니다.

그런데, 한 숟갈 먹으면 더 궁금한 것이 많아집니다.

동료들에게 대답을 해 주다가, 30분이 다 지났는데 저는 밥을 다 못 먹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밥 먹을 때는 밥만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것이 가장 주요한 이유이지만 또 한 가지는,

제가 자주 가는 비밀의 정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비밀의 정원입니다.

길가에서 보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숨겨진 공간인데요,

높은 벽 때문에 밖에서는 어떤 공간인지 전혀 보이지 않지요.

밖에서 보면 이런 공간이 있는지 전혀 모를 걸요

오늘은 그 비밀의 정원을 여러분께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의 큰 문 안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평화로운 공간이 나옵니다.

사실 이곳이 너무나도 잘 숨겨진 공간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따듯한 햇빛을 즐기고 있네요.

안으로 들어서면 가운데에는 잔디와 꽃들이 심어진 녹지가 있고,

오른쪽엔 저러한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집들이 있습니다.



이 비밀의 정원은 굉장히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제가 도시락을 먹는 이 이름다운 곳은

1544년에 세워진 Begijnenhof라는 곳입니다.


Begijnenhof는 종교에 귀의하지 않았으나,

결혼을 하지 않기로 맹세한 수녀가 아닌 독신여성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네덜란드어로는 Begijn이라 하고 영어로는 Beguine이라 합니다.

: a member of one of various ascetic and philanthropic communities of women not under vows founded chiefly in the Netherlands in the 13th century

수 차례 말했듯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부, 플랜더스 지역은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같은 말을 쓰고,

역사도 같습니다.

그놈이 그 놈이지요.


Begijn들은 이곳에서 함께 학교 교육도 받고,

직물을 짜거나 바느질과 빨래 같은 것을 하여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알기 쉽게 예를 들자면,

속세를 떠나 비구니가 된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가르침을 최대한 따르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보살들이 모여 살던 곳이랄까요?


벨기에의 관광지로 유명한 역사도시인 Brugge /브루헤 에도 Begijnenhof가 있지요.

사실 중세시대부터 벨기에의 주요 도시였던 곳에서는 다 이러한 Begijnenhof가 있습니다.


현재는 시에서 소유하고 있고 일반인들에게 임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도 결혼을 하지 않은 소득 수준이 낮은 여성들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가르침과 관련이 깊은 곳이라

이곳에는 종교적인 예술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다운 작지만 아름다운 성당도 나오는데

오늘은 들어가 보지 않고 밥만 먹다가 왔네요.


종교활동은 하지 않으나, 저는 교회와 성당을 좋아합니다.

절도 좋아합니다.

조용하고 엄숙해지는 그 순간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성당에서 한참 멍 때리다가 나오기도 합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이 비밀의 정원으로 도시락을 먹으러 나오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렇게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곳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멍 때리다 보면

벌써 점심시간이 쏜살같이 지나 다시 일하러 갈 시간입니다.


가는 시간을 잡지 못해 아쉽기만 합니다.

집에 갈 때까지 여기서 몰래 땡땡이치다가 가면 좋을 텐데,

집에 토끼 같은 자식이 둘이나 있는 관계로

아쉽지만 다시 일을 하러 가야겠습니다.


이상, 벨기에에 사는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외향인, 고추장 와플이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