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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함을 즐기기

심심함은 걱정을 이긴다.

by 고코더

심심해서 그랬어

"심심해서 그랬어. 공부를 하다가 일을 하다가 이렇게 마루에 혼자 앉아 있으면 너무 심심한 거야 봐라, 시골이 참심심하지. 나무도 강물도 하늘도 구름도 풀잎들도 다 심심해 보이지. 너무 심심하니까 심심함을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다 보니, 마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자세히 보인 거야, 새, 벌레들, 물소리, 물 흐르는 모양, 벌레 우는 소리, 앞산 나무와 곡식들,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또 노는 모습, 아무튼 너무 심심하니까 세상이 다 자세히 보인 거야. 자세히 보니까 생각이 일어났어. 그 생각들이 내 마음의 곡식 같아서 버리기가 아까운 거야. 그래서 그냥 글로 옮겨 써봤어. 그랬더니 시가 되었어. 어느 날 내가 시를 쓰고 있어서 나도 놀랬다니까. 정말 심심해서 그랬어."

- 김용택,『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 시』, 예담(2014) -


'김용택' 시인은 매우 심심했던 거 같습니다. 얼마나 심심했으면 조용한 시골에 강물도 바람도 나무도 자연의 모든 것이 들리기 시작했을까요? 심심하니깐 세상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보다 보니 생각이 일어났고 글로 옮겨봤더니 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심심함이 '그 여자네 집', '들국',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방창', '우리 동네 버스'등 같은 위대한 시들을 탄생시켰다니 놀라울 따름일 뿐입니다. 시인은 심심해야 위대한 시가 탄생 하나 봅니다.


그런데 저도 심심합니다. 그래서 매일 스마트폰을 봅니다. 출근길 지하철 저는 오늘도 여김 없이 스마트폰에 한눈을 팔며 열심히 유튜브를 보고 있습니다. 닭장 안에 갇힌 닭이 모이를 쪼듯 말이죠. 문뜩 지하철 안 풍경을 보니 너나 할 거 없이 심심함을 견디지 못했는지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시선을 내리꽂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린 조금의 심심함도 참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거 같습니다.



심심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저는 언제부턴가 따분하게 있는 것을 못 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심심하면 잠깐의 고독을 못 참고 태블릿 PC를 깨워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시청합니다. 그것도 귀찮으면 음악이라도 틀어놔야 무료함이 달래지는 병에 걸린거 같습니다. 누구보다 심심함을 견디는 능력이 약해진걸 느낍니다. 그리고 무료함을 받아들이는 건 마치 실패자이며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어 죄책감까지 듭니다. 그런데 '겸손의 공감'의 저자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는 심심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심심함은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정서다. 심지어 게으름도 인간의 정상적인 부분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유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40시간 일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80시간에서 100시간은 일해야 한다."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가 그가 SNS에 남긴 말처럼 마치 바쁘게 사는 것만이 성공의 진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정답을 찾기위해 결심을 해봅니다. 김용택 시인처럼 심심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실험을요.


날씨 좋은 한가한 주말 결심을 실행 하러 문밖을 박차고 나갑니다. 스마트폰에 중독된 눈은 자연을 바라보기로 하고, 스마트폰 플라스틱 케이스 커버를 움켜쥐었던 손 끝 감각은 길거리에서 만난 자연으로 향하기로 결심합니다. 디지털 불빛만 깜빡거리던 네모난 기계 덩어리를 놓아버리고 외출한 어느 날, 심심한 걸음걸이를 하고 있던 오후, 익숙한 길가에 길게 뻗은 가로수 사이를 누비니 도시에 외롭게 남겨진 나무들이 사열하듯 서서 손 흔들어 주는 기분이 느껴집니다. 햇빛에 오랫동안 노출된 나무의 두꺼운 껍질의 질감과 어두침침한 색들 그리고 제멋대로 조각난 나뭇결의 패턴들이 마치 예술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도시가 뿜은 매연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꿋꿋이 살아가는 가로수 한그루와 내밀한 대화를 하고 있자니 마음에 흐뭇하게 들어맞는 기분이 듭니다. 심심한이 만든 사고의 여유분의 가로수가 들어찬 날이었습니다. 심심함으로 가득한 한가로운 날은 오랜만에 느껴본 꽤 좋은 하루였습니다.



심심함은 불안함을 이긴다.

"모든 인류의 문제는 인간이 혼자 방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파스칼-


한가한 시간은 불안을 일으킵니다. 특히 아주 바쁘고 턱 밑까지 짜인 촘촘한 일정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한가한 시간은 유독 불안함을 더욱 가중됩니다. '왜 사는가?'라는 회의가 뇌리를 스치면서 공포로 다가옵니다. 산업시대 이전 농사로 직접 식량을 재배해서 먹고살던 시절에는 '내가 왜 사는가?'라는 생각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 5일제와 주 52시간 근무제처럼 인간의 삶을 여유를 만들어주는 일명 심심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복지는 오히려 걱정과 불안을 느끼는 시간으로 교환되기도 합니다.


독일의 명상가이자 경영컨설턴트 '니콜레 슈테른'의 저서 "혼자 쉬고 싶다"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제부턴가 사회가 휴식을 게으름이라고 칭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휴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으로 나와의 대화가 시작되고 나와의 대화 시간이 많아져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좀 더 체계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성실하게 열심히 일만 하며 살던 어머니를 돌연 암으로 떠나보내고, 그때부터 그녀는 휴식의 본질에 대해 깨우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진정한 휴식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던 휴식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첫 번째 "휴식은 게으름이 아니다." 휴식과 게으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게으름은 목적이나 동기 없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행위라면, 휴식은 다음일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체우는 단계라고 합니다.


두 번째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능력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항상 쉬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강박을 느끼도록 강요를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혼자 방에서 한번 아무것도 안 하기를 시도해해 보라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새롭게 알게 되거나 정리된 생각이 있으면 노트에 적어 보고, 자신과 가장 진지하고 솔직한 시간을 보내기를 추천합니다.


세 번째 "휴식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활발하게 생산적인 일을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은 무뎌집니다. 바쁜 일상으로 우리는 내면을 들여볼 여유가 없어 결국 스스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휴식은 스스로를 잘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깊은 심심함은 걱정을 이긴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빨리만 달리나...

무궁화 다섯 개짜리 오성급 새벽 열차를 탔다.
옆에서 미친 듯이 달리는 KTX와 달리
무궁화는 세상 여유를 다 부린다.
느리게 느리게
조금 가다 지쳤는지 쉬고 또 쉬고.
(중략)...
지금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거라.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뭐.

- 오평선,『그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포레스트북(2022)-


독일의 문예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이며, ‘창조적 정신의 근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합니다. 정신적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뭔가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이 이내 고요해진다고 말합니다. 마치 진흙탕 물을 가만히 두면 진흙은 가라앉고 물이 맑아지는 것처럼 조용히 사색하고 명상하는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대안이라고 말합니다. '깊은 심심함'은 평소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뇌의 활동이 활성화되는데 이것을 전문용어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고 합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뇌는 무수히 많은 정보를 처리하면서 디폴트 상태와 멀어지게 됩니다.


최근 신경 과학자인 미국 워싱턴 대학의 마커스 라이클 교수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는데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이하도록 하고, 그때 뇌의 활동을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 풀이에 집중했을 때 오히려 뇌의 특정 영역에서 활동이 늘어나기보다 줄어들었고, 테스트가 끝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상태, 소위 '멍 때리기' 상황에서 뇌 활동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뇌의 기저 상태인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상태에서 불필요한 정보가 제거되고 기억이 축적되어 집중력과 창의력이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멍 때리고 있을 때 우리의 걱정들이 해결되는 이유가 있던 것입니다.



심심함을 기뻐하자

"심심함은 '오롯이 나의 영혼이 기뻐할 일을 하라'라고 마음이 보내는 메시지다."
- 김병수,『겸손한 공감』, 더퀘스트(2022) -


심심함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심심한은 생각을 낳는 풍요로운 아마존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저도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심심함이었습니다. IT 기술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글을 쓰다가 밀려오는 한가로운 덕분에 인문학적인 글을 쓰게 되었고 그렇게 벌써 많은 책을 출판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바쁘기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나요? 적당한 심심함을 통해 진정한 의미 가득한 삶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출처

- 오평선,『그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포레스트북(2022)-

- 김용택,『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 시』, 예담(2014)

- 김병수,『겸손한 공감』, 더퀘스트(2022)

- 한병철,『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2012)

-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58531

- https://blog.naver.com/nomore_bet/221074757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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