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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꽂이 수업을 떠나보내며.

by 쪼하

어제부로 백화점 문화센터의 꽃꽂이 여름학기 수업이 종료됐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을학기는 수강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수업은 즐거웠다. 꽃꽂이한 작품을 거실 탁자에 두면 나만의 정원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동안 실내에 화병을 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매번 다른 꽃꽂이 작품을 둘 때마다 집안 분위기가 변하는 모습을 보며 '누구나 자신만의 정원을 갖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결론을 내렸다. 거실에서 화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중세시대 귀족들의 저택에 딸린 정원을 거니는 것 같은 만족감이 차올랐다.


꽃에 관심이 없던 아이도 밥 먹을 때마다 꽃을 보면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아침 화병의 물을 갈아주고 꽃을 다듬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는 어느 순간 꽃을 보며 "엄마"라고 말했다. 그만큼 아이 눈에도 내가 꽃과 식물을 애지중지하는 게 보였나 보다.


쿠루쿠마, 프로테아(남아공 국화), 안시리움 등 수업을 듣기 전에는 몰랐던 꽃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으레 선물로 주고받는 꽃다발에는 거베라, 장미, 카네이션 등이 주로 들어가니까 일본 꽃이나 아프리카 꽃들은 아예 미지의 영역이었다. 장미 종류도 몇 가지 외우게 됐다. 자나 장미, 클라린스 장미, 마르샤 장미, 5번가 장미 등등... 부케와 부토니에(남자 양복에 꽂는 장식)를 직접 만들어 보는 시간도 있었다. 담쟁이덩굴 잎에 철사를 U자 형태로 끼워서 꽃받침을 만드는 작업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부케를 만들어온 날 밤에 남편은 부토니에를 달고 나는 부케를 들며 결혼식을 재연하는 장난도 쳐봤다. 결혼식날 기억과는 다르게 부케는 상당히 묵직했다. 부케가 인생을 180도 돌려놓을 정도의 무게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기에.


안시리움(왼쪽), 프로테아(가운데), 쿠루쿠마(오른쪽)

결혼식에 들었던 부케도, 수업 때 열심히 만든 부케와 부토니에도 결국 말라비틀어졌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내 정원들은 금세 빛이 바래버렸어. 꽃꽂이처럼 다소 고상한 취미나 즐기며 살려고 했는데.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인 꽃들을 보며 정신을 차려버렸지 뭐야. 퇴사가 주는 자유의 단맛에 제대로 취했던 모양이야. 신용카드의 얼굴을 한 현실이 정원에 숨어서 날 노려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외식비를 줄이기 위해 요리를 하면서, 장 보는 비용을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땡볕 더위에도 걸어서 20분 거리의 채소 가게에 오픈 런을 뛰면서, 전기 요금을 덜 내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에는 에어컨을 끄고 지내면서 점차 나는 호화로운 정원의 불청객으로 전락했다. 매달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면서 월급이 주는 안정감이 그리웠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있는 시간만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퇴사 후 세 달도 채 되지 않아 프리랜서 워킹맘으로 변모했다. 아이와 문화센터에 참석하는 월, 금을 제외한 화, 수, 목 오전부터 오후까지 기사를 쓰고 나면 진이 빠졌다. 일을 다시 시작하니 체력이 팍팍 깎이는 기분이었다. 집안일도, 운동도, 요리도 해야 하는데 수요일은 일을 마치면 꽃꽂이 수업에 가야 했다. 천천히 거닐어야 하는 정원에서 혼자 바삐 뛰어다니느라 향기를 음미할 시간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육퇴(육아 퇴근)'가 늦어 나만의 시간이 없다시피 하는 내게 꽃꽂이가 주는 자기 효능감이 점차 낮아졌다. 손이 빠릿빠릿하지 않아 손재주가 그다지 좋지 않은 나였기에 다른 수강생의 작품을 보고 주눅 들기 일쑤였다. 차라리 돈을 벌기 위해 기사를 쓸 때 성취감을 느꼈다. 어린이집 방학 때 가족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꽃꽂이를 그만두고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기르든, 운전면허 준비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남편 혼자 부산까지 운전하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운전도 못 하는 나는 부모로서의 준비가 덜 된 것만 같았다.


육아에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꽃꽂이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게 맞는 일이야? 혼자서 그렇게 취미나 즐기며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너는 이제 엄마고, 남편과 함께 이 가정을 책임져야 해. 너 혼자만을 위한 건 뒤로 미뤄놔. 아이와 가정을 위한 것부터 먼저 시작하자. 부족한 엄마로 남아있을 순 없잖아.


여러 정체성 중 가장 늦게 나타난 '엄마'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처럼 다른 정체성들을 가지치기하려고 한다. 매일매일이 '엄마'와 다른 정체성들 간의 전쟁이다. 어느 한쪽을 불청객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들이 강하다. 다 같이 좀 사이좋게 지내면 좋으련만, 성격들이 달라서 서로 충돌하기만 한다. 아직은 아이가 어리기에 '엄마'는 강하다.


여담으로 진짜 불청객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지난주 수업 때 받아온 꽃에 곤충 알이 묻어있던 모양이다. 꽃 사이에 나타난 애벌레를 파리지옥 먹이로 줬는데 잘도 도망 나온 모습에 감격해 방생해 줬다. 그 다음날 불청객들이 또 등장했다. 나비 애벌레가 아니라서 환영받지 못할 나방 애벌레였다.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나방 애벌레의 미래가 나방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 불쌍했다. 그래서 살려놓고 키우고 있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컵 속에 있는 것이 나비 애벌레든, 나방 애벌레든 상관없이 무엇인가가 꽃을 갉아먹고 기어 다니는 모습에 흥미를 느끼고 즐거워한다. 그래,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면 어때. 그렇게라도 쓸모가 있으면 됐지 뭐. 그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며 꽤나 그럴싸한 말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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