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워킹맘의 육아 가치관 이야기
학군지로 유명한 동네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시골 출신인가 싶을 정도로 자연과 밀접한 추억들이 많다. 천(川)에서 주워온 개구리 알에서 올챙이가 부화하고 그 올챙이의 뒷다리가 자라나는 걸 지켜보던 일, 옆 단지 숲에서 하늘소를 발견한 일, 손가락에 올려둔 방아깨비가 똥을 싸던 일, 매미 허물을 징그러워하면서도 텅 비어있는 모습에 살짝 경이로움을 느꼈던 일, 운 좋게 계곡에서 발견한 플라나리아를 과학 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갈라보고 두 마리가 되길 기대했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일, 친구와 각각 여왕개미, 일개미를 잡고 서로 인사시켜 주다가 여왕개미가 일개미를 죽여버린 일 등등. 이제는 재건축으로 인해 사라진 식물들도 그려본다. 옛날 집의 후문을 지키고 서있던, 밑동이 굵은 벚나무와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후문 담장 위에서 달큼한 냄새를 풍기던 라일락, 집에서 나와 문방구 방향으로 가던 길목을 노랗게 채워주던, 봄의 시작을 알리는 노란 산수유꽃까지... 정작 그 동네에서 어떤 교육을 들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주위 친구들보다는 꽃과 새의 명칭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사람들은 흔히 '봄'하면 '벚꽃'부터 떠올리지만 땅에서 자라는 제비꽃이야말로 벚꽃보다 먼저 봄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건넨다. 아래를 쳐다보며 걷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기에 제비꽃과 눈 한 번 마주치지 못 한 채 봄을 떠나보낼 수도 있다. 어릴 적 진달래 꿀을 빨아먹었던 기억 덕에 진달래와 철쭉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비둘기처럼 생겼지만 눈 밑에 멍이 든 새의 이름이 멧비둘기인 것과 봄 무렵 물가에서 자주 보이는 꼬리가 푸른 새의 명칭이 물까치인 것도 알고 있다. 부푼 배를 안고 길을 걷던 2023년의 가을날. 비에 젖은 낙엽 냄새에 행복감을 느끼다가 새삼 자연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소소한 지식들을 전해주리라 하고 다짐했다.
그 다짐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내 아이 또래들의 집에 가봤지만 우리 집만큼 식물이 많은 집은 없다. 우리 집의 식탁에는 내가 꽃꽂이 수업에서 받아온 화병이 자리 잡고 있다. 온 가족이 식사할 때 자연스럽게 꽃을 구경하게 된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꽃에 묻어온 나방 애벌레도 길러보고 있다. (지금은 번데기가 되어 땅에 숨은 건지 보이질 않는다. 내 아이가 애벌레가 있던 컵을 가리키며 '애기'라고 부르며 애타게 찾고 있다.) 생화가 시들어서 사라진 자리는 직접 말린 드라이플라워가 대신한다. 공기정화 식물인 스파트 필림과 스킨답서스도 기르고 있다. 스킨답서스는 줄기를 잘라서 다른 화분들에 이식했는데 꽤나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새로운 잎이 나와서 상당히 흐뭇하다.
그런 일상에 녹아든 덕분일까, 아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자연과 친해지고 있다. 지난봄 아이와 둘이서 놀이터에서 주워온 솔방울을 세척해서 장난감으로 줬는데(흐르는 물에 씻고 나서 베이킹소다를 넣은 물로 끓인 후 건조했다.) 21개월이 된 지금까지도 잘 갖고 논다. 완두콩을 심은 화분에서 싹이 나자 "우와!" 하며 감탄하고 나방 애벌레를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꽃을 보면 엄마가 물을 주던 모습을 떠올리는지 "엄마. 엄마!"라고 외친다. 통상 24개월은 되어야 본다던 자연관찰책을 멋모르고 돌 지나자마자 들여놨는데 내 아이는 17개월 무렵부터 지금까지 자연관찰책을 하루에 한 권 이상은 꼭 읽고 있다. 내가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자연은 소중해!"라고 세뇌하지 않아도 자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노출된 아이의 자연친화지능은 스스로 자란다.
그렇다면 자연친화지능은 왜 중요할까? 김붕년 서울대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의 저서 <아이의 뇌>에 그 답이 어느 정도 나와있다.
"행복은 흥분을 주관하는 도파민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세로토닌에 의해서 조절되는 것이다. (생략) 그런데 아이가 편하고 안정된 상태를 지루한 것으로만 해석하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지루함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이들이 행복을 경험하기 위한 필요조건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대체로 지루하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변화하며, 변화를 눈에 띄게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변화가 축적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연이다. 아이가 자연과 가까워지면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만약 아이가 작은 변화를 느끼는 민감한 뇌를 갖게 되었다면, 그 아이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굳이 뇌과학 지식을 머리에 넣을 필요도 없이 저 내용이 말하는 바는 간단명료하다. 자연친화지능이 있으면 아이는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여기서 '행복=성공'이 아니다. 위의 내용을 '자연친화지능이 우리가 스스로 또는 부모로서 원하는 속세의 성공을 보장해 준다'라고 받아들이면 오산이다. 나만 해도 그 학군지 동네에서 방아깨비를 갖고 놀 시간에 다른 친구들처럼 수학 한 문제를 더 풀었더라면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자연을 가까이하게 해주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살아와서 행복했기 때문이다. 주위 또래들이 어릴 때부터 유학을 가서 영어를 배우거나 선행 학습을 통해 중고등학교 수준의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와중에 새, 꽃, 공룡 명칭이나 외우던 아이는, 집 앞에서 딱따구리를 발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동네 살기 좋네'라고 쉽게 만족하는 30대로 성장했다. 당시 건강이 나빠져서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둔 탓에 미래가 불안했던 상황인데도 '이렇게 좋은 봄날에 딱따구리를 감상할 여유가 있어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도,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할 풍경 속에서 행복할 요소를 찾아내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요새 내가 설레는 마음으로 짜는 계획 중 하나는 아이를 숲 유치원에 보내는 일이다. 이미 동네에 숲 유치원이 어디 있는지, 집에서는 얼마나 걸리는지, 셔틀버스는 어디서 타는지 등을 대강 찾아봤고 그중 두 군데는 사전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아이의 유치원 입학 시기는 내후년이기에 1년 먼저 설레발치는 것이긴 하다. 게다가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꽤 괜찮은 민간 유치원이 있기에 그보다 훨씬 먼 거리의 숲 유치원을 보내는 게 다소 호들갑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숲에서 놀기만 하다가 그 나이 때 일반 유치원에서 배우는 수준을 못 맞추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도 든다. 아무리 각종 미디어에서 영어 유치원의 폐해에 대해 떠들어대도 영어 유치원들이 건재한 만큼 내 아이가 그곳 출신 아이들과 격차가 커질까 봐 무섭기도 하다. 숲 유치원은 그저 희망사항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내 아이가 숲, 더 나아가 자연과 친해지고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아이가 나중에 기후 전문가나 환경 운동가가 됐으면 한다는 거창한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을 내 아이도 같이 즐겨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