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yon
요리프로그램의 성질은 변태 같다. 음식을 주제로 하는 영상매체이지만 방송을 통해 음식과 관련해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맛도 향도 촉감도 느낄 수 없다. 방송예능에서 음향효과를 담당한 적 있는 나는 안다. 요리방송에서 들리는 보글보글 지글지글하는 모든 소리들 또한 추가로 제작된 소리일 뿐 진짜 소리가 아니다. 그러니 소리조차도 방송을 통해 느낄 수 없다. 요리영상을 통해 실재하는 오감을 지각하는 건 그저 시각적인 것뿐이다. 여행프로그램은 경관을 대리해서 보여주고 예능은 웃긴 것을 보여준다. 뉴스는 사건을 편집해 보여주고 음악방송은 음악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보여준다. 영상매체의 목적이 무언가를 대리하여 보여주는 것에 있으면서도 감각할 수 없는 먹을 것을 자꾸자꾸 보여준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의미에서 포르노와 다르지 않은 먹방도 생겨났다. 사람들은 영상을 통해 먹을 것을 자꾸자꾸 보고 싶어 한다. 이는 먹지 못할 것을 보는 것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얘기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 포도를 보며 침을 흘리면서도(gag), 신포도를 숭배(worship)하는 행위는 이미 종속적인(submissive) 욕망을 자극한다. 감각할 수 없지만 갈망하고 있는 대상을 눈앞에 두고 실재하지 않는 감각을 상상하며 기분이 좋아진다.(bondage) 요리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영상 속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조키스트가 되어 마비(ruined)되고 제어된(Orgasm Control) 미각을 쥐고 맛보고 싶어 안달이나기 시작한다.
요리프로그램의 도미넌트적이고 사디스틱한 매력은 인간의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에도 있지만, 맛을 보는 행위에서 미각의 영역이 이미 현저하게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맛있다고 느낄 때 혀에서 느끼는 영역은 많아봐야 20%라고 한다. 냄새가 50-70%, 시각적인 영역이 10-20%, 소리가 5-10%라고 한다. 감자칩광고에서 바삭하는 소리를 더 자극적으로 들리게 하는 것, 옆사람이 맛있게 먹으면 더 맛있다고 느끼는 것, 빨간 딸기가 검은 접시에 있을 때보다 하얀 접시에 있을 때 더 맛있다고 느끼는 것, 향을 느끼지 못하면 맛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다. 맛있는 요리를 먹었을 때 '맛'이라고 느끼는 영역에서 미각이 느끼는 건 많아봐야 20%라는 것이다. 이미 '맛'의 80%는 미각이 아닌 다른 종합적인 영역에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파인다이닝에서 식당내부 인테리어와 접시와 식기와 소리 등에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이유다. 무엇보다 같이 먹는 사람이 불편하면 뭘 먹어도 맛없다는 건 아주 과학적이라는 얘기다. 가스트로피직스에서 설파하는 이 유물론적이고 회의적인 '맛'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편이면서도 형식주의자인 나는 이것을 뛰어넘는 모종의 도전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80% 이상이 미각이 아닌 다른 것에서 맛을 느낀다 한들, 나머지 80%조차도 소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도전은 없을까.
있었다. 20세기 초, 내가 사랑하는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 그 파시스트들은 시도했다. 미래주의는 고전적인 미학의 대표 격인 비너스조각상보다 새로운 기능을 가진 페라리 스포츠카가 더 아름답다는 파괴적이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지식인집단의 이념이다. 이는 맹목적인 기술발전에 대한 도착증세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새로운 과학적 기술은 전쟁을 통해 발전했기 때문에 미래주의자들은 전쟁광신도가 되었고, 후에 무솔리니가 주창한 파시즘의 근간이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것을 모두 내던져버리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너스조각상보다 스포츠카를 미학적으로 더 숭배해야 한다며 증기기차 배기관에 성기를 넣는 행위를 즐겨하기도 했다. 현재도 자동차를 좋아하는 남자들 중에는 메카노필리아나 카페티시를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나 또한 페라리의 제품 중에 '로마'라고 불리는 자동차의 엉덩이를 보고 성적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고백해 본다.
아무쪼록 미래주의자들은 '온고지신'은 개나 줘 버리고 '마호체승'(새로운 말을 타는 게 더 좋다.)을 익히기 위해 이탈리아인의 식탁까지 건들기 시작한다. 마오쩌둥이 궁중요리까지도 갖다 버린 문화 대혁명의 오리지날리티는 여기 있다. 특히 미래주의자들은 파스타를 혐오했다. 미래주의의 대장인 마리네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입에 맞을지는 몰라도 파스타는 구시대 음식입니다. 비만을 초래하고 짐승처럼 먹게 합니다. 영양이 많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회의적이며 굼뜨고 비관적이게 만듭니다." - 마리네티 -
비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을 몰아내고 신체에 필요한 열량을 빨리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식의 맛과 색, 형태, 촉감, 음식을 먹을 때의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고 외쳤다. 파시스트의 근간이 되는 미래주의자들이 파인다이닝의 본질을 꿰뚫었다는 것이 재밌지 않습니까. 그들은 현대 기술을 적극 활용해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요리들을 개발했다. 사람들에게 미래적인 감성을 일깨우기 위해 만들어진 요리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항공음식’, ‘탄성케이크’, ‘이혼한 계란’, ‘입체파 채소밥’, ‘당근+바지=교수’, ‘직관적인 전체’, ‘깜짝 바나나’,‘최강정력’ 등등. 또한 몇 가지 레시피도 남겼다. "강철의 맛을 느끼기 위해 강철 볼베어링을 닭고기 안에 넣고 오븐에 10분 구워 볼베어링의 맛이 닭고기에 배게 한다.",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향수에 재료를 재워둔다.", "다양한 향수를 풍선에 채우고, 풍선 입구 가까이에 불 붙인 담배를 가져다 대고 빠져나오는 향을 들이마신다." 등등.
미래주의자들은 파인다이닝의 발전을 불러온 역군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업의 목적이 독점(monopoly)에 향해있듯, 자본주의건 민주주의건 사회주의건 공산주의건 모든 이념의 목적은 파시즘에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유물론을 대표하는 가스트로피직스의 의견을 넘어서려는 미래주의자들의 파괴적이고 도발적이고 관념론적인 도전에 대해 그 결과가 무엇을 낳았던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 아름다운 도전을 요 근래 한국에서 해낸 인물이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름은 이찬양, 흑백요리사에 나온 요리사다. 이름에서 느낌이 온다. 찬양하란다. 기독교적인 의미로 지어졌겠지만 나는 그의 이름이 아주 BDSM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침 흘리고, 숭배하고, 마비되고, 제어되는 요리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서 안성재와 백종원을 묶어놓고 안대를 씌우고선 무자비한 요리를 입안에 딥스롯 해 육즙을 분사시켜 버렸다. 방송상의 닉네임은 '삐딱한 천재'였다. 그렇다. 앞서 말한 관념론적 요리도전, 미각을 뛰어넘고 마호체승을 실현시키려는 도전자. 서브미시브 시청자와 마조키스트 심사위원을 우롱하는 사디스트. 사디즘적 방송플랫폼과 사디즘적 세상에 돌을 던지는 마조키스트. 이중적 잣대와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 역설적인 인물. 나는 그의 요리도전을 보면서 아나키 충동을 느꼈다. 너무 멋지고 좋은 일이다. 이찬양 요리사에 대한 상념이 터져 나온 이유는 '흑백요리사 시즌2'의 결말 때문이었다.
흑백요리사는 제목과 형식자체가 정치성을 띠고 있다. 흑(흙) 수저인 언더독의 유명요리사가 기득권세력인 백(금) 수저를 끌어내려 올라가는 형태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흑수저 참가자의 수가 더 많고 백수저 참가수가 더 적다. 흑수저는 처음부터 경쟁을 시작하지만 백수저는 첫 번의 경쟁을 부전승으로 올라가 있는 채 시작한다. 흑수저는 strated from bottom이고 백수저는 born at the top이다. 구조와 형식이 흑수저는 민중이자 진보세력을 대변하고 백수저는 기득권이자 보수세력을 상징한다. 첫 번의 대결에서 백수저 쪽수만큼이나 생존하고 나면 백수저와 흑수저의 명수가 같아진다. 이때부턴 계급장 떼고 맞다이가 시작된다. 가스트로피직스에 의하면 미각이 맛을 느끼는 영역의 20%인데도 불구하고 심사위원은 눈을 가린 채 시식을 하고 판결을 내린다.
변증법은 테제와 안티테제로 성립한다. 백수저에게도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에는 흑수저셰프였다는 서사를 부여하면 백수저의 딜레마가 생성되기 때문에, 흑백요리사의 형식은 얼핏 백수저를 테제로, 흑수저를 안티테제로서 작동시키려 한다. 시청자는 두 집단의 갈등을 즐기기 위해 우선은 그 변증의 논리 안에 들어가려 애쓰게 된다. 하지만 이게 무슨 오만한 연출인지. 3번째 라운드에 가면 테제(백수저) 혹은 안티테제(흑수저) 한쪽의 자멸을 위한 미션이 등장한다. 백수저가 모두 한 편이 되고, 흑수저가 모두 한편이 되어 패배한 쪽 전원이 탈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프로그램의 구조성 아주 나쁜 형태의 미션이라고 느낀다. 테제와 안티테제 양 날개에서 한쪽의 날개가 없어지고 나면, 더 이상 정치적 갈등이 사라지기 때문에 흑수저 인지 백수저인지에 따른 어젠다생성이 불가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프로그램의 3번째 미션에 대해 잘 못 된 거라고 생각하던 와중 현재 한국정치의 꼬라지가 이딴 식이란 걸 깨닫게 된다. 아! 제작진은 멀리 보고 있었나.
흑수저와 백수저의 구분조차도 모호하다. 레스토랑을 통해 벌어드린 수익이 기준인지, 경력의 연차가 기준인지, 어떤 지표상의 유명세가 기준인지도 모른 채 챌린저가 있고 디펜더가 있다. 1화에 보면 꼭 이런 말이 나오는 거 같다. "아, 저분은 백수저급이신데,,," 하여간 정체 모를 이유로 부여된 흑과 백은 자신의 색을 대표하여 서로에게 칼과 도마를 겨누게 된다. 패자부활전에서 살아 돌아온 흑수저는 백수저에게 다시 들이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심사는 흑과 백 둘을 나눠놓지 않는다. 흑수저에게는 테제를 전복시킬 동력을 잃게 만들고, 백수저에게는 안티테제를 찍어 누를 명분을 잃게 만든다. 이 또한 정치적 대결구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승전에는 백수저 조림보이 최강록과 흑수저 요리괴물이 맞붙게 됨으로 정치적 장력이 다시 생성된다. 아주 다행이라고 볼 수 있으려나.
여기서 또 한 번 요리사의 근간을 흔드는 미션이 나온다. 남을 위한 요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요리를 만들라고 한다. 작품이란 건 이미 나를 위한 것과 남을 위한 것이라는 상반된 두 성질이 이미 결합되어 있다. 내가 듣기 좋은 음악이 곧 남이 듣기 좋은 음악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음악을 만들 수 없으며, 내가 보기 좋은 그림이 곧 남이 보기 좋은 그림이어야 한다는 설득력이 없으면 예술을 창조하는 의미는 사라진다. 우리는 엄마의 음식을 먹고 자랐으며, 엄마의 음식이 엄마 당신 입맛에 맞지 않는데도 자식들이 먹게 된다면, 그 얼마나 부조리인가. 내가 아닌 타인이 다수가 되던, 한 명이 되던 상관없지만 누군가인 n명의 타인과 자신을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 모든 창작물의 1원칙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 전제의 일면을 지워버리는 미션이 등장하는 것이다. 평생을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온 요리사에게 자신을 위한 요리를 내오라니, 그것은 요리의 성질을 갑자기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린 미션이다. 나만을 위한 요리라니, 그럼 요리사들은 남을 위한 요리를 해온 것인가.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나를 위한다'는 말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위한 선물 같은 개소리다. 그냥 갖고 싶으면 사는 것이다. 먹고 싶으면 만드는 것이다. 먹이고 싶은 걸 먹이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도 내가 못 먹을걸 팔지는 않는다.(요리사라면) 나를 위한다고 얘기하는 순간 '나'는 대상화가 된다. '나'가 나 임에도 불구하고 남 같은 '나'가 되어버린다. 왜 가만히 있는 요리사들을 자폐아로 만들죠?
불편한 점을 두 가지나 더 얘기하자면, 첫째는 흑백요리사는 흑백조리사로 제목을 바꾸던지 해야 한다. 요리라는 것은 재료의 산지와 유통부터 시작하며 먹는 사람의 소화로 끝나는 행위를 요리라고 말한다. 흑백요리사는 요리사들의 재료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보여주지 않는다. 과도하게끔 불과 물을 쓰기 시작하는 조리과정에 집착한다. 요리의 반절이상이 재료로부터 시작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엔터테인 한 방송은 진정성 있는 요리사들조차도 조리사로 만들어버렸다. 수많은 멋진 요리사들을 등장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의 끝과정인 조리만을 볼 수 있으며 어느 한 장면 재료에 대한 셰프들의 윤리관을 들어볼 수 없었다.
두 번째로는 요리와 음식은 예술이 아님에도 그것을 예술적인 가치로 보고 있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비슷한 시스템을 가진 건축은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영화는 영화자체가 인간을 해 할 수 없지만, 건축은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면 몇 명이고 죽여버릴 수 있는 전제조건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음악과 그림은 그 자체로 사람을 죽일 수 없지만 음식은 사람을 아프게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의 시작점이 재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흑백요리사는 셰프를 하나의 예술인으로 취급하며 요리사 개인의 서사가 담긴 어떠한 작품을 감상하게끔 연출을 이끌어낸다. 레시피가 악보와 닮았지만, 셰프가 지휘자와 닮았지만, 조리과정이 연주행위와 닮고 변인요인이 많은 음악과 음식이 꼭 닮았고, 음식이 기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콘텐츠로서 예술의 성질을 담고 있지만 음식은 우선 영양분일 뿐이라는 종속적인 조건 안에 있다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셰프의 서사가 틈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잊게 만든다. 셰프의 음식이 셰프를 표현했다고 믿을 뿐이다. 모두의 눈을 가리고 누가 만들었는지 맞춰보라면 맞춰볼 수 있을 정도의 장르적 성질을 요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해서 음식의 성질은 맛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맛과 명분, 그 음식이 인간에게 해로운지 이로운지에 대한 절대평가가 가능한 영역이 음식에는 존재하기 때문에 예술이 될 수 없으며, 평가 조건에도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어야 한다. 보고 있자면 재료의 경제성도 따지지 않으면서 말이야.... (난 대체 방송에서 본걸 어디서 먹어볼 수 있는 건데?)
사실 이 모든 쩨쩨한 불만이 나를 많이 기분 나쁘게 한 것은 아녔음에도 이렇게 주절이 떠들어대는 이유가 있다. 그건 앞서 말한 테제와 안티테제의 설정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흑수저와 백수저의 대립이 우리 사회를 비추고 있다고 착각하게끔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백수저와 흑수저의 대립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나는 삐딱한 천재와 '흑백요리사'라는 방송이 싸우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서 진정한 안티테제적인 의미를 부여한 유일한 캐릭터를 이찬양 씨(삐딱한 천재)로 보고 있다.
정갈하고 잘 준비된 방송플랫폼은 이미 테제의 의미를 갖는다. 그 테제는 무성생식을 하듯 스스로가 자웅동체가 되어 흑과 백으로 나뉘었다. 곧 백수저가 될 흑수저들이 나온다. 흑수저 들은 본인들이 진정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했다고 자칭하게끔 역할이 부여되어 있지만 맛있고 위험하지 않은 요리를 만드는 것에 안분하고 있으며 대항해야 할 백수저와 같은 어젠다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요리사로서 요리라는 성질에 대해 백수저와 흑수저가 갈등하고 있지 않고 같은 이념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둘이 싸우는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흑백요리사가 제시하는 계급갈등은 인간의 계급적인 갈등 그 자체만 있을 뿐, 계급이 가진 이념을 대표하거나 음식에 대한 계급적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돈이 없으면 진보주의자고, 돈이 많으면 보수주의자고, 할아버지면 보수고 젊은 청년이면 진보라고 으레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요리에서의 안티테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앞에서 등장했듯, 미래주의가 설파한 자기 파괴적이고 위험한 요리야 말로 안티테제일 것이다. 홍어가 맛있기 힘들듯, 요구르트가 유익균만 살려놓고 있듯, 피트위스키가 미개한 역사의 잔여물이듯 입에 들어가는 것의 위험성을 자각하게 하고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줄 요리야 말로 요리에서의 안티테제로서 존재할 수 있다.
좋은 건축물은 부서지지 않기 위해 튼튼하게 지어지지만, 더 좋은 건축물은 가장 늦게 무너지는 건축물일 뿐 무너지지 않는 건축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것이 없으며, 영원하다면 의미를 가지지 못하듯, 건축물의 쓰임이 완성되는 변증은, 건축물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어졌다는 테제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안티테제를 공유하게 된다. 종속적인 전제를 가진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좋은 음식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해선 나쁜 음식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쉽다. 먹고 죽으면 나쁜 음식이고 먹고 건강해지면 좋은 음식이다. 그렇다면 먹고 나서 탈이 나 거나 죽는 음식은 안티테제다. 인간의 후각과 미각은 탈이나 거나 위험한 음식을 경계하게끔 진화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위험한 음식을 즐기기 위해 요리를 발전시켰다. 쓴맛과 신맛은 인간에게 위험한 신호를 보내게 되지만 미식에서 빠지지 않는 미감이 된다. 인류가 먹어보지 않은 재료를 당신이 최초로 먹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진짜 말 그대로 목숨 다 걸고 먹는 거다. 앞사람이 그거 먹고 죽는다고 해서 인간이 그걸 안 먹을쏘냐. 뒷사람은 그거 먹고 안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그러다가 또 죽고 또 죽다가 복어 독을 빼는 방법도 알게 되고, 몸에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게 만드는 발효법도 만들어낸다. 독성물질인 유황을 사용해 요리를 하질 않나 헤롱헤롱 취하게 만드는 술까지도 만드는데, 인간은 먹거리와 목숨을 가지고 신과 내기를 하며 요리를 발전시켜 왔다. 인간은 위태로운 맛들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먹고 목숨 가지고 장난정도는 쳐야 요리의 참맛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리의 테제는 건강한 음식이며, 안티테제는 위태로운 음식이다.
재료의 자유는 선조들의 많은 희생을 통해 이뤄졌다. 파인다이닝은 안전함을 추구했지만 선배 격인 미래주의는 스스로를 자학하며 베어링을 핥고 위태로움을 추구했다. 파인다이닝은 욕망 앞에서 위선을 떨며 평화를 추구하고 돈을 벌지만, 미래주의는 평화와 이상을 위해 전쟁광이 되었다. 파인다이닝의 속성과 미래주의적 사고의 대립이야말로 진정한 흑백요리사의 계급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백수저는 몸에 좋은 안전한 음식을 만드는 계급으로의 테제를, 흑수저는 위태롭고 위험한 철학을 가진 요리사들로서 안티테제를 구축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요리에서의 계급투쟁을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찬양 씨의 메추리 요리를 보아라. 안티테제로서의 의미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재료를 망각하고 조리에 집착하는 제작진의 카메라 앞에 재료를 보여줬다. 메추리의 뼈와 메추리의 살과 메추리의 근육과 내장과 발. 심사위원의 가려진 눈을 이용하여 먹고 싶지 않은 플레이팅을 했다. 유물론적인 가스트로피직스를 유린하는 관념론적 가스트로노미가 나타난 것이다. 부패한 음식을 먹고 싶지 않은 인간은 동물의 뼈를 쌓아둔 상태를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핥아보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더한다...? 더해서 촉감이 맛을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에 반항하듯, 쇠숟가락에 얹어져 처음 혀에 닿을 촉감이 차가울 수 있었으나, 메추리의 발을 이용해 입술로 처음 뜯어먹게 되는 촉감조차도 메추리라는 재료의 촉감으로 의도되었다. 이때부터는 너무 궁금하다. 이찬양씨가 보여주는 부패한 음식, 기괴한 음식, 위태로움이. 이찬양씨의 요구르트는 무슨 맛인지, 이찬양씨가 말아주는 소맥은 먹고 죽을 수도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이찬양씨가 시도하는 모든 일을 지지하고 싶어진다. 어차피 백수저가 될 검은 수염의 요리괴물이나 조림핑이라는 벌명을 벗어보려는 최강록이나 안전하고 유익하고 맛있을 뿐 위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착한 요리일 뿐이다. 최강록이 우승 후 홀로 앉아있는 모습이 내게는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안티테제를 잊고, 리스크를 헷징 하고, 별명을 벗어던지려는 현시대의 예쁜 성형미인을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언수 작가님의 말을 또 인용해야 한다.
"이 밤에 혼자 소주병을 따며 나는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넬 방법을 떠올려본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든다. 그런 삶은 없다. 모든 좋은 것은 나쁜 것과 버무려져 있다. 문을 닫으면 악취가 들어오지 않지만 꽃향기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찬양씨가 언젠가는 미래주의 요리를 한국에서 재현해 주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피학과 가학이 뒤섞인 체제반동적인 음식을 먹고 싶다. 죽고 싶진 않지만, 뭐 적당히 아플 정도의 요리라면 이찬양씨의 썩은 요리도 맛보고 토하고 싶어진다. 그래야 나는 살아있다고 느낄 거 같다. 그래야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안티테제만이 테제를 분명하게 만들어준다.
리옹 올드타운에 있는 갈로 로마노 원형극장에 갔다. 그리스로마 시대 때 지어진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서 어떤 공연이 있는지, 무대에 현대식 무대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피아노가 한대 올라가 있다. 저율사인지 연주자인지 모르겠는 아주 평범한 아저씨가 피아노를 장난스럽게 뚱땅거리고 있다. 그런데, 터치가 예사 터치가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구경하고 갈려고 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화성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 어디서 들었지. 내가 분명히 아는 화음인데, 저 아저씨는 그렇다면 분명히 연주자이고 내가 아는 분일 수도 있겠는걸? 아 누구였더라...
계속해서 장난스럽게 뚱땅거린다. 누구였지. 누구였지. 유명한 사람인 거 같은데,,,
아저씨는 계속 리허설을 하듯 무심하게 피아노를 친다, 그러다가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리옹 대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대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계속되자 아저씨는 종소리의 화음에 맞추어 즉흥연주를 시작한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서 침을 흘리고 눈물을 흘린다. 대단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화성진행 몇 곳에서 아저씨의 이름이 생각났고, 내가 알고 있는 얼굴과 무대 위의 얼굴을 비교해서 봤다. 맞다 그 아저씨다. Brad Mehldau..... 전설의 그 이름 브래드 멜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