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rny
모네가 수련을 그리면서 신선놀음 했다는 지베르니에 갔다. 지베르니에 가면서 모네에 대한 몇 가지 재밌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모네는 백내장으로 눈이 멀어가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두 번째 젊은 시절 군대에 있던 모네를 이모가 큰돈을 주고 빼줬다고 한다. 세 번째 천재치고는 86살까지 장수했다. 네 번째 당시 여러 예술가들처럼 니뽄열풍에 취했다. 자포니즘의 취한 드뷔시의 음악을 틀어놓고 모네의 그림을 감상하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내가 모네에 대해 알게 된 사실 중 가장 흥미롭고 재밌던 사실 다섯 번째! 모네는 50세 때 복권에 당첨되었다. 1억 원 정도라는데,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엄청나게 큰돈 이렸다. 모네는 젊은 나이에 지베르니에 간 적 있는데, 지베르니의 풍경에 반해 "나중에 큰돈을 벌거든 지베르니에 집을지어 살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중년의 나이에 운명적으로 복권에 당첨된 모네는 지베르니에 실제로 집을 짓고 멋진 정원을 끼고 유유자적 살았다. 아, 운명의 장난이란. 마네도 그렇고 고흐도 그렇고 젊은 시절 둘 다 그림을 못 그린다고 놀림받고 악평받던 사람들이다. 신은 고흐에게 명예도 돈도 주지 않았다. 고통만 줬다. 하지만 신은 모네에게 복권 당첨의 행운을 선사하고, 노년에 명예까지 안겨준다. 이 얼마나 안티프레자일한 사건인가. 복권당첨이란! 불공평은 신의 언어이고 공평은 인간의 언어인가! '공평'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인가! 복권당첨은 누구에게 허락된 것인가!
내가 '모네의 복권당첨 사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순전히 발자크 때문이다. 발자크의 책을 3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가 쓴 글 중 가장 아리송달송 하면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복권과 관련된 글이었다. 발자크의 글을 읽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뜨거운 피'의 김언수 작가님께서 발자크를 많이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김언수 작가가 좋아하는 책이 뭔지 궁금했던 나는 발자크의 책을 몇 개 읽게 되었다. 더해서 이 여행글 또한 김언수 작가가 전도하는 '뜨거운 피'에 대한 글이 될 것이 뻔하다. 김언수의 '뜨거운 피'는 '모네의 복권'과도 같이 안티프레자일한 나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삶이 우아해지는 방법에 대해 긴 글을 적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댄디즘과 댄디즘의 허상을 구분 지어 두었다. 발자크가 꼬집는 댄디즘은 현대에 와서 귀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나는 모르겠다. 발자크의 언어의 어느 부분이 귀족주의적인지, 어디에 뭐가 잘 못 된 건지.
발자크 또한 뜨거운 삶을 살아낸 양반이다. 가진돈을 다 털어 도박을 하던 사내다. 심지어 사업병에 걸려 사업을 하다가 말아먹고 빚을 위한 빚까지 진다. 글을 쓴 이유가 거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 다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책을 썼다. 90권이 넘는 책을 빚을 갚기 위해 써냈다. 그 책중에 하나는 '우아하게 사는 법'이다. 빚독촉에 쫓겨 도망 다니는 주제에 우아하게 사는 법이라니. 책을 읽고 나면 알 수 있다. 빚이건 도덕이건 도박이건 중요하지 않다. 우아함은 삶은 뜨겁게 살아내는 것이라는 걸! 뜨거운 삶만이 취향과 휴식과 삶의 달콤함을 선물해 준다는 것을!
다음은 발자크가 제시하는 우아하게 사는 법 5 계명이다.
1. 문명적이든 원시적이든, 삶의 목적은 휴식이다.
2. 절대적 휴식은 권태를 낳는다.
3. 넓은 의미에서 우아한 삶은 휴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기술이다.
4. 일에 길들여진 인간은 우아한 삶을 이해할 수 없다.
5. 결론, 우아해지기 위해서는 일을 거치지 않는 휴식을 향유할 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백만장자의 아들이거나 왕족이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한직에 있거나, 부정하게 겸직하거나 해야 한다.
자! 이 대목에서 나는 '모네의 복권당첨 사건'이 궁금해진 것이다. 다섯 번째 계명에 써져 있는 저 문장이 아주 미스터리 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발자크는 이 책에서 전반적으로 '일하지 않는 삶'에 대해 주창하고 있다. 일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무수한 고민과 치열함에 대해서 설파한다. 발자크는 인간은 모두가 일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고, 우아하게 살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발자크 조차도 일하지 않고 살아낼 방법을 몰랐으며, 블랙코미디 같은 다섯 번째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우아한 삶은 일을 하지 않는 삶. 휴식을 향유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필요조건이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발자크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도박을 해 일확천금을 노렸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문학가들 중에 가장 안티프레자일에 접근해 있는 뜨거운 인물이다. 우아한 삶을 위해선 '백만장자'가 되거나 '한직에 있어 익명의 삶을 누리거나 '부정하게 겸직'하여 모두를 속일 수 있어야 한다. 모두 자유에 대한 이야기일뿐더러 환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복권이라니? 복권은 환경이 아니라 선택이다. 복권을 사지 않고는 복권에 당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백만장자'와 '왕족'도 '한직'도 '부정한 겸직'도 인간의 선택과 의도에서는 많이 벗어난 문제이다. (사기꾼이 되고 싶어서 사기꾼이 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저 복권은 뭐란 말인가. 복권에 당첨되기 위해선 복권을 사야 하는 것이고, 신은 그 입장권을 산 사람 중에 한 명을 골라준다. 고흐와 모네와 무수한 익명의 사람들이 모두 복권을 소지하고 있었지만, 신은 모네만을 선택했다. 왜? 복권당첨의 복잡계를 어찌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어!? 어떻게 우아한 삶을 위한 조건일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지? 발자크가 말하는 복권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힘과 의지를 느끼고 있었다.
복권을 사야 한다. 신이 당신을 선택 해주건 말건, 왕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한직도 아니고 부정한 겸직도 아니라면 복권을 사라! 복권을 사는 것 만이 우아한 삶을 사는 것이다. 복권은 결론을 알지 못하는 기대와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꼭! 당첨되어야 한다. 복권을 사지 않으면 복권에 당첨될 기회가 없다. 아, 두드려라 그러면 구할 것이다! 존나게 두드려라! 꼭 두드려서 구해라! 복권을 존나게 사라! 일하지 말자! 우아하게 살자! 모네는 해냈다! 고흐처럼 비루하게 살지 말자. 우리 모두 유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일을 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다 때려치우고 복권을 사자! 힘내라 친구야! 인생 별거 없다! 한잔해 한잔해! 마셔! 씨바꺼...
발자크와 김언수가 설파하는 '뜨거운 삶'과 '복권구매'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댄디즘이다. 영포티와 청담엄마 등의 온갖 패러디가 일어난다. 2025년인 지금에 영포티는 가장 복합적인 비하단어다. 세대론이 담긴 용어이며, 정치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성적인 코드와 패션과 외모에 관련한 비하발언이다. 우리 사회의 종양 같은 냉소적 시선이 모두 한대 섞여있다. 나도 영포티가 싫다. 발자크가 말하는 댄디즘의 철학과 아주 닮아있기 때문이다. 더해서 댄디즘과 영포티를 더 확장해 본다. 청담엄마도 댄디즘, 헬창들도 댄디즘, 케이팝데몬헌터스도 댄디즘, 트렌드도 유행도 다 댄디즘이다.
영포티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영포티는 안티에이징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에서 안티에이징에 관심 없는 Anti-Dandism적인 사람은 보기 드물다. 유행하는 영포티의 언어는 “나 몇 살처럼 보여?”이다. 그 질문을 영포티라고 한정한 그룹에게만 받지 않는다. 30대 여자에게 20대인 줄 알았다는 말이 과하게 칭찬으로 받아들여지듯, 피부가 깨끗한 70대에게 아직도 청춘이라고 말하는 게 의례적인 접대어가 되어가듯, 기본적으로 관리된 외모만이 사회적인 인간임으로 인정받는다. young 한 40대가 되기 위해선 좋은 에스테틱에 꾸준히 다닐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안티에이징은 그 자체로 부의 상징이 되어간다. 영하지도 않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지만 우아해져야 하는 삶이다.
실질적인 부가 없더라도 생각의 안티에이징 또한 중요해진다. 40에서 50되는 나이의 사내가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음악을 외우고 다니고, 유행하는 밈에 빠삭한 이유는 젊은 친구들과의 소통을 위해서란다. 다 낡은 사람이 젊게 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좀 건너뛰어 얘기하면 결국엔 섹스 문제다. 단지 성적인 이유다.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는 취향이 아닌 섹스를 위한 것이다. 트렌드는 언제나 섹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듯,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현재를 붙잡고 있지 못한 조급함이 만들어내는 것이 트렌드이자 ‘댄디’다. 트렌드는 지나가지 않으면 트렌드가 될 수 없는 역설이 있기 때문이다.
4050 남자들은 더 이상 자기 나이의 여자들을 여자로 보지 않으려 한다. 어린 여자와 섹스는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 비문명적이고 교양 없는 댄디남의 자존심이다. 어린 여자와의 섹스가 아니더라도 본인의 외모와 생각이 섹시하고 젊어야 하는 이유는 언제든지 여차하면 섹스할 수 있는 남자라고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유부남 유부녀들이 관리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여차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성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멋진 가능성을 열어둬야 하기 때문이다. 섹시해 보이는 가능성은 본인의 배우자로부터 위기감을 종용하고, 그 위기감은 성적 긴장감과 좋은 부부금슬을 만든다고 믿는다. 관리된 유부녀, 관리된 유부남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또한 결혼했지만 미혼처럼 살고 싶은 댄디즘과 결탁한다. 결혼했는데 뭐 하러 관리하냐는 말을 하면, 아주 요란하게들 난리를 친다.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라고 한다. 물론이다. 배우자와의 섹스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섹스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니깐. 복권을 사지 않으면서도 왕족인척 귀족인척 한직에 있는 척 부정하게 겸직에 있는 척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많이들 듣고 산다. "어머나, 애기엄마 같지 않으세요~.", “요즘에 프로미스나인 노래 좋더라.”
“그래도 남자가 40대는 되어야 자리 잡긴 하지.”
하다못해 와인 같은 남자도 생긴다. 사회의 구조상 남자가 돈을 벌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나이가 40대부터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김치녀에 대한 혐오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이중적이고 양심 없는 생각이다. 안정적인 위치의 40대 남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20대, 30대보다는 40대가 돈이 많다는 것을 영포티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빈티지넘버가 와인의 가격을 결정하지 않지만 오래 묵은 와인은 다 좋다고 믿는 허접한 소믈리에가 된다. 속물인 여자는 싫으면서도 속물인 여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영포티의 탄생이다. 그렇다고 영포티만 그러한가. 아무리 독립적인 능력이 있는 여자라도 백마 탄 왕자는 기다려진다. 백마 한 마리 사고서 왕자를 기다리면야 속물이라 욕을 먹어도 인생만큼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혼수가 오가는 결혼제도가 매춘과 다를 바 없으면서도 축하받는 위장축제가 되었으니, 남자의 능력을 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사랑으로 결혼을 해야 한다는 허튼소리가 생긴다. 한 가지만 해라. 한 가지만. 그러니 댄디즘은 사랑을 쫓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결혼했다.’와 같은 너저분한 말이다. 차라리 돈 때문에 결혼했다고 하면 댄디즘은 아니다. 정직하다. 영포티와 댄디즘의 나라는 헬스와 원나잇스탠드 공화국을 자처하고 비혼과 저출산은 문제도 아니라는 식으로 군다. 김치녀가 없으면 섹스도 못할 것들이 세속적인 여자는 욕하고, 매춘은 싫다면서 안티에이징된 빈티지 와인이 되어간다. 낭만과 현실사이 밸런스라나.
“나는 정치 그런 거 잘 모르고 중도야 중도. 그냥 상식적이었으면 좋겠어.”
영포티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인 의견이 편향되지 않다고 자랑한다. 젊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젊지 못하면서도.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새로운 게 좋다고 말하면서도. 본인들 시대의 유행을 잊지 못하면서도. 본인들이 꿈꾸는 젊음과 공감이 단지 회상일 뿐이면서도. 그것이 정치적이지 않은지 궁금해진다. 기득권으로서의 차례를 기다려왔다는 듯 굴지만, 그것이 젊음이길 바라는 양심 없는 위선이다. 이미 옛 저녁에 보수화된 자신의 내면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건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니 그들이 말하는 거처럼 중도일지 모르겠다. 내 눈엔 그들이 바라는 상식이 비상식적 이어 보이긴 하지만. 애초에 정치성은 중도를 표방할 수는 있지만 존재할 수 없다. 한국에서의 보수가 파렴치하며, 노인들의 들끓는 감정을 이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해서 자본과의 결탁을 통해 잔인하고 치사해지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하지만 중도의 가치가 도덕성과 낭만과 박애연민으로 휘감겼다고 믿는 건 내게는 더 이상해 보인다. 영포티는 자신들의 아젠다를 박살 내려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극우화 되었다고 말한다. 극우화 된 젊은이로 지칭되는 세력이야말로 그들의 차례를 기다리는 응큼한 진보다. 영포티가 비난의 대상일 수 있는 이유는, 영포티가 그 자체로 본인들의 보수적인 헤게모니를 밀고 나가는 주제에 진보의 탈을 썼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가 도치된 이념으로 이용되다 보니 한국에서의 민주당이 사실은 중도우파라고 일컬어지고 한국에서는 보수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영포티야 말로 뉴라이트 신성 극우세력일 뿐이면서 본인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수단으로 지원금살포에 지지해 버린다. 도덕적인 결벽증도 사실은 허상일 뿐임을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니 중도가 맞다. 복권한장 사지 않으면서 당첨되길 기다리는 꼴이다.
영포티라는 언어를 만들고 희화화하는 젊은이도 댄디즘의 산물일 뿐이다. 영포티보다 위대한 건 영 young 그 자체라고 울부짖는다.(혹은 영 앤 리치?) 영포티라는 언어는 영한 사람이 포티를 욕하기 위해 만들어낸 언어다. 영포티를 희화화함으로 스스로의 젊음을 과시하는 냉소다. 모든 젊은이들은 몇 년 후면 포티가 된다. 그때 가서 올드포티가 될 것도 아니면서 영포티는 뚜까팰수있는 존재로 여긴다. 영포티를 까내리는 심산에는 오히려 올드투앤티적 냉소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젊은 사람들은 피트니스에 몰두하며 필사적으로 젊음 앞에 담담해지려 한다. 넓어진 어깨를 흔들거리며 근손실을 걱정한다. 몇 살 같아 보이냐고 묻는 영포티의 질문을 욕하지만 그만큼 지독하게 자신의 섹스 횟수와 연애 횟수는 몇 번인지 자문하는 꼴이다. 본인들도 적당한 관용은 개뿔 알파메일을 꿈꾸는 피라미드게임에 참여한다. 자기만족이라기엔 적당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운동량을 갖추었고, 4층에 있는 헬스장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헬스가 학창 시절 일진놀이랑 다를게 뭐가 있는가. 막 나가던 일진이 인기가 많았다면, 학창 시절을 벗어난 몸 좋고 돈 많은 놈들이 섹스를 한다. 과거에 찌질이었다고 자숙하는 영혼들의 반성문인가.
해외에 다니다 보면 정말 놀라게 되는 것 중 하나가 국민평균 수영실력이다. 거의 모든 외국인들은 바다에서 튜브 없이 놀 정도의 간단한 수영을 할 줄 안다. 한국인만 온몸을 가리고 튜브를 끼고 논다. 수영을 잘 못한다. 당연히 한국에서 밀고 있는 생활체육 교육현실이 개차반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수영을 너무 못한다. 내 여자친구는 말한다. 수영과 운전은 필수라고. 어느 영화를 보던 추격씬에 필요한 두 가지 덕목이 수영실력과 운전실력이란다. 갈라파고스 키커락에서 구명조끼를 벗어던지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게 생존수영을 스스로 익혀낸 내 여자친구를 안 사랑할 수 없다. 자연생태계에서 생존수영을 익힌 여자친구는 수영에 맛을 알아버렸다. 여자친구는 한국에 돌아와 수영을 좀 배워보려고 수영장에 가서 레슨을 등록했다. 수영선생은 킥판을 주고 자유형 발차기부터 알려준다. 자유형발차기. 아 그놈의 자유형 발차기. 여자친구는 넘실거리는 거대한 파도의 한가운데서 자유형에 가까운 그 어떠한 동작도 해본 적이 없다. 물 위에 부유하고 잠수하는 움직임에서 자유형과 비슷한 움직임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생존수영에 가까운 것은 오히려 평영일 것이다. 그럼 왜 도대체 한국의 사교육인지 공교육인지 모를 이 수영레슨 커리큘럼은 하나같이 자유형부터 알려주는가. 이 또한 앞서 말한 댄디즘의 산물이다. 빠른 성장과정에서 개도국시절을 단 30년 만에 벗어던진 한국은 경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문화와 scene, 산업은 없어도 넘버원은 되어야 한다. 실업 수영 시합에 관심이 없는 한국에 세계일등 박태환이 있었고, 피겨스케이팅에 관심도 없고 돈도 쓰지 않던 한국에 김연아가 있었다. 케이리그와 제이리그 규모의 차이는 10배 정도 차이 난다지만 아시아 어디에도 없는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손흥민이 있다. 한국은 경쟁에 지쳐있다고 말하면서도 경쟁 없이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민족이다. 문화와 scene의 유기적인 고민에 대해서는 참아줄 근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냄비근성이다. 한국의 냄비근성은 자유방랑? 한 빠른 요식업 트렌드와 자영업 트렌드에도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유튜브의 빠른 소비트렌드덕에 떡상한 유튜버 ‘육식맨’은 과거 대만카스테라 유행에 대해 “누가 진심이었냐.”며 한국의 빠른 요식업 트렌드를 꼬집는다. 해외에는 오래된 맛집이 많다면서 한국의 냄비근성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는 그는 트렌드와 알고리즘의 산물인 유튜버이다. 육식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사람의 발언권을 볼품없이 바라보는 한국에서의 아이러니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시스템보다 승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유현준 교수가 유튜브에 나와 한국 콘텐츠가 넷플릭스 1등을 하고, bts가 빌보드와 오리콘 차트에서 1등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한국에 넷플릭스가 있어야 하고 한국에 세계적인 음원차트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또 아이러니가 있다. 한국의 빌보드, 한국의 오리콘, 한국의 넷플릭스가 있다면, bts와 오징어게임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풀랫폼 사업이 갖는 오류) 한국은 아니, 서울은 세계의 어떠한 환경보다 경쟁이 과열되어 있다. 인터넷시대가 열려있지만, 한국어를 사랑하는 한국인은 한국인의 커뮤니티 속에 깊게 들어가 경쟁을 과열시킨다. 커뮤니티 속 대중의 시야는 어설픈 것들에 대해 역겨워한다. 문화와 씬에 대해 촌스럽게 생각한다. 대중은 자신들의 시선이 비판적이고 시크해진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에는 시크가 없다. 모두 한 발짝 떨어져서 서로를 판단하고 점수매기는 차가운 댄디즘만이 존잰 한다.(한국인은 댄디와 시크를 구분할 줄 모른다.) 댄디즘은 인파이터가 아니다. 아웃파이터다. 시스템과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닌, 승리를 쟁취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승리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경험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럴까. 희생자를 만들었다. 희생자들은 복수심에 불타 누구 하나 뜨겁고 촌스럽게 행동하면 그것에 대해 패러디했다. 이제는 심지어 그 스스로들의 차가운 모습과 댄디함 마저 서로 패러디하는 시대가 열렸다. 아주 개판이다. 무수한 숏폼형식의 콩트를 하는 유튜버들이 그 예다. 처음에는 등산하는 아저씨와 아줌마들을 따라 하며 촌스러움에 대해 희화화했다. 그러다 점점 뜨겁고 촌스런 것을 비판하는 그 태도마저 희화화되어갔다. 타인의 시선에 빠진 동탄엄마의 극성맞음과 섹시한 몸매, 돈은 있지만 돈 있는 척 하긴 싫지만 또 돈은 있는척해야 하는 청담엄마의 몽클레어, 어려 보인다고 일부로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어려 보이길 바라면서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영포티, 자기 일에 진심인 것은 촌스러운 거라서 여러 일을 시크하게 해내는 척하는 정체불명의 카페알바 알파메일남 등등. 그러니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던 촌스러움과 뜨거움에 대해 패러디하다가 그 패러디를 하는 본인들 스스로의 냉소를 패러디하는 방식으로 풍자가 변모해 간다. 한국인은 더 이상 아무도 물속에 들어가 추한 몸짓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연애와 피트니스를 종교처럼 여기던 시대에서, 연애에 대한 회의(내가 굳이 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해?)와 피트니스에 대한 회의(적게 먹고 적게 일하는 것이 더 낫다.)등으로 바뀌어 갔다. 점점 더 경험에 대한 단순한 생각이 자리 잡고, ‘그냥’ 같은 말이 당연해진다. 차가운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면서 본인의 계층에 대한 인식만 비대해져 탓할 거리를 찾는다.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라 어쩌고 저쩌고, 나는 특별한 취향이 없으니깐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까지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나 뭐라나. 겸손을 빙자한 회의와 불안의 공동체적 댄디즘이다. 대중이 싫다고 말해도 대중 안에 있어야 확인되는 자아들의 교집합.
한국사람들은 수영을 멋지게 해야 한다. 1등 수영선수의 자세와 비슷해질수록 수영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생존(시스템)보다 순위(승리)가 더 중요하다. 리터럴리 꼴찌하는 건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댄디즘을 채택한 한국사회는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움직여지는 몸과 움직임을 뜨겁고 촌스럽다고 놀린다. 놀리는 사람들 본인은 생존수영을 못하는 댄디다. 이제는 과열된 경쟁에서 자유형을 배워보겠다고 설치는 영포티 청담엄마에 대해 ‘왜 다 똑같이 획일화되어가냐’며 키득거린다. 하지만 손가락질하는 그들은 자유형도 할 줄 모른다. 그럼 이제 자유형도 생존수영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놀리는 사람을 놀리는 시대가 열릴 것인가?
추하게 좀 살아라. 다들 왜 이렇게 멋지고 싶어 안달 났냐 정말. 케데헌은 재미없게 봤어도 케데헌의 국위선양적 의미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중적인 자세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저 대만카스테라와 같은 유행의 시류에 한국적인 정서가 한 번 만났을 뿐이다. 케이컬처에 과하게 기대하지 말지어다. 이미 벌써 바닥을 드러내는 물 없는 수영장에서의 자유형이다. 연예인 풍자도 싫지만, 패러디 풍자도 싫다. 패러디는 정지상태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풍자가 만들어내는 것은 또 다른 비난과 비소와 복수밖에 없다. 추해 보여도 생존수영을 하러 물놀이, 물놀이를 하러 갈 것. 물놀이를 못 하면, 자유형은 배우지 말 것. 자유형 하는 사람 물놀이 못 한다고 놀리지 말 것. 자유형이고 물놀이고 생존수영이고 뭐고 물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면 물에 들어가는 사람 뭐라 하지 말 것. 물안에 들어가는 뜨겁고 촌스런 사람이 될 것!
자유형의 중요성, 수영에서의 생존보다 스피드 수영, 있어 보이는 댄디즘의 시대가 더 고도화되고 복잡해졌다. 자유형의 스피드가 수평의 세계라면, 이제는 수중 수직의 세계, 스쿠버다이빙과 프리다이빙의 스펙타큘러스가 펼쳐진다. 수영을 못하는 주제에, 튜브 없이 바다 위에 떠있을 수 없는 가련한 주인공들이 슈트를 입고 잠수한다. 댄디한 인간들이 이 수중 콘텐츠를 다루는 방법을 보면 간악하다. 누가 더 숨을 오래 참는지, 누가 더 물속에서 예쁜 몸짓을 하는지, 누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지, 자유형과는 또 다른 경쟁구도를 만들어냈다. 거봐라. 계급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X축(자유형의 세계)에서 뒤처지는 인간은 Y축(잠수의 세계)을 만든다. 이 모두를 만들 수 없는 인간은 Z 축을 만들어 경비행기나 세일링요트라도 몰려고 할 것이다. 중요한 건 공식(돈)이 아니라 풀이과정(복권) 임에도 정답이 중요한 계측 가능한 댄디즘의 세계, 아니 서로 계산하면서도 계산하지 않는 척하는 응큼하고 고도화된 댄디즘의 세계. 우아하지 못한 세계. 자신이 끊임없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는 세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있길 바라는 세계. 그러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동정과 연민이 가능하다고 믿는 위선의 세계. 빠른 유행을 좇아 답습하는 것으로 경험의 지대를 넓히는 갈대 같은 세계. 자본주의가 만들어준 취향에 입 벌리는 시녀 같은 사람들. 라이프스타일을 내세우고 돈을 버는 사람들. 커뮤니티가 오히려 더 진실될 수 있다고 믿는 차가운 인간들. 무신사가 투자받는 나라. 런던베이글이 엑시트 하려는 나라. 케데헌의 미학을 불닭 볶으면에서 찾는 나라. 제조업이 작살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문화선진국이라고 말하는 노란 봉투법의 나라. 꾸밈을 좋아하는 너. 샘이 많은 너. 감성보다 체면의 우위를 중요시하는 너. 계급과 교양을 동일시하는 너. 잡내 나지 않는 고기를 탐하는 너. 육향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양심 없는 너. 그런 너와 그런 나라와 그런 세계에 내가 살고 있다. 쓰고 나니 내 관자놀이에 총알 한방 쏘고 싶어진다.
유행과 댄디즘이 공감을 이끌어낸다고 해서 진정성이 있다고 말하지 말아라. 우아한 삶을 살자. 우아한 세계에는 ‘그냥’도 없고 ‘도약’도 없다. 복권을 사자. 왕족과 귀족과 한직과 겸직이 아니라면 복권을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