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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 신드롬

Paris

by 고달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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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만화 '진격의 거인'을 보았느냐고 묻는 주변인이 많아졌다. 짜증이 났다. 이상하게도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짜증이 난다. 왜인지 생각해 본다. 첫째로는 내가 진격의 거인을 보지 못해서 짜증이 났다. 두 번째로는 '진격의 거인'의 서사적 훌륭함을 익히 들어 '알 법 한' 영역의 있는데도 호들갑을 떠는 사람을 보기 싫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진격의 거인'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 중에는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 혹은 서사적으로 훌륭한 작품에 대한 교양과 상식이 없으며 경험도 부족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세상과 창조된 세계를 오가며, 역설과 모순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들(영화덕후, 만화덕후, 소설덕후, 다독자, 사업가) 중에 '진격의 거인'을 본 사람들은 유난을 떨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저 그 작품이 괜찮은 작품이라고 칭찬정도만 했고, 적당한 추천을 했다.


_DSC6487.JPG 파리 올림픽 기념 에펠탑


서사와 시의 이중성을 몸소 느껴보지 못한 초년생의 시각으로 '진격의 거인'이 너무 훌륭한 작품이라고 느꼈다는 것에 응원하는 바이다. 하지만 호들갑 좀 떨지 말았으면 한다. 디깅능력의 부재와 서사에 대한 무관심이 '진격의 거인'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지는 것에 큰 불만이 생긴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나쁜 것인지,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설명할 방도가 없는 사람들. 본인의 서툰 취향의 확증을 너무 섣불리 입으로 내뱉는다. '진격의 거인'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중 슬램덩크와 베가본드의 모순과 서사를 깊이 느끼는 사람, 에반게리온과 공각기동대와 아키라에서의 만화적 움직임이 충격으로 와닿음을 느껴본 사람, 장르적 인물들의 만듦새를 판단하는 사람, 하다못해 초기 웹툰의 '스크롤'이 바꿔버린 이야기(하일권의 작품들이 그러하다.)와 연출을 느껴본 사람은 없다. 위의 예시에 해당하는 사람이 '진격의 거인'을 보고 감동받음은 꽤나 조신한 태도를 갖는다. 따라서 '진격의 거인'을 보았느냐고 묻는 상황에 짜증이 나는 건, '진격의 거인'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 대한 묘한 혐오와 무시와 부정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섣부른 감흥과 유희에 대하여, 그 명쾌하고 존중 없는 태도에 대하여, 안일하게 만들어진 취향과 빠른 유행에 편승한 저급함과 비열함에 대하여, 스스로의 감흥이 전부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고집과 무관심에 대하여. 그러니깐 한마디로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짜증이 나는 것이고, 더 좁고 질척거리게 말하자면 필자인 나, 고달블루의 취향에 대해서 들여다볼 능력과 시야가 없는 사람에 대하여 아쉬움과 짜증과 외로움과 고립을 느낀다.


_DSC6585.JPG 오렌지 스마트팜이었던 미술관 안에 시멘트박스


여행지에 대한 예찬에서도 비슷한 감흥을 받는다. 사실 또 짜증 나는 질문은 '여행지 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으셨어요?'이다. 어디가 제일 좋기는 무슨. 내가 내 시간과 돈을 쓴 모든 여행은 다 소중하고 좋을 따름이다. 재방문의사가 괜찮은 여행지와의 연관성도 별로 없다.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재방문할 의사가 전혀 없지만, 그곳에서 경험했던 너저분한 경험마저도 나에게 소중하다. 어느 여행지가 제일 좋았냐는 편리한 질문 그 자체에 얼마나 많은 조촐한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다. 그냥 할 말이 별로 없거나, 여행에 대한 이야기의 포문을 열기도 하고, 여행자의 취향을 파악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는 좋은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경험에 대한 자랑을 교묘하게 숨겨놓거나 그 경험에 대한 경쟁적인 구라를 늘어놓게끔 만드는 의도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여행지 중에 어디가 제일 좋냐고 묻는다면, 거진 사람들이 잘 가지 못 할 먼 곳, 그중에서도 제일 풍광이 좋고 음식이 맛있었던 곳, 이 질문을 던진 사람보다 내가 경험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으니 더 이상의 이야기가 질문자에게 흘러갈 수 없는 곳, 내가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 곳이자 많은 이탈리아 영화의 촬영지가 된 곳, 시칠리아를 대뜸 얘기해버리고 만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질문으로 이어질 수 없으며 마침표로 끝내버릴 수 있는 대답이다. 시칠리아. 나도 참 고약하고 치사한 사람이다...


_DSC6526.JPG 에밀졸라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할 수 없는 '공부하지 않는 여행'에 대한 혐오가 있다. 여름방학에 유럽으로 떠나는 대학생들, 동남아에 가서 휴양하고 카지노에 가는 직장인들, 직장을 때려치우고 퇴직금으로 정처 없이 세계를 유랑하는 장기여행자들, '목적 없음'이 여행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무심한 영혼들, 다른 풍경에서의 즐거움이 sns의 기록물로 그치는 경험경쟁과 인정투쟁에 허덕이는 가련하고 우아한 영혼들. 그들은 꼭 얘기한다. 사람들 다 가는 랜드마크보다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구경이 더 재밌고, 인스타에 그렇게 사진 많이 올리는 스타일 아니라고. 관광지의 유명한 맛집들보다 현지 로컬한 맛집들을 가보고 싶다는 둥, 비행기 타고 나오면 어디든 또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받는다는 둥. 아주 그럴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가 주체적 경험에 대한 노출과 교양 있는 경험과 공부에 향해있지 않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여행자들은 여행을 떠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행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꼭 여행을 떠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여자친구처럼 온건하고 착한 사람은 그런 경험들이 모여서 또 여행법이 자립될 거라고 변호해 줄 듯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여행을 특별하게 경험하는 사람,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적 이끌림이라는 탐구정신과 호기심이 바탕이 되는 특권계층에게만 허락된다는 것을. 그러니 호기심 없는 민간인(?)이 본인도 여행했다는 자가뽕에 빠져 경험을 내세워 자랑질하면 연민과 짜증이 동시에 일어난다. 어떻게 이탈리아를 다녀와서 그냥 그랬다는 평을 남기는가. 어떻게 독일을 다녀와서 볼 게 없다고 하는가. 어떻게 휴양지만 선호하거나 도시여행만을 선호하는가. 어떻게 혼자는 아직도 여행을 떠나보지 않았는가.


_DSC6527.JPG 쿵쾅쿵쾅 사운드의 대가 베를리오즈의 무덤


'진격의 거인'과 대등한 상징으로 자리 잡은 여행지가 있다. 그곳이 바로 '파리'다. 나는 파리를 싫어한다고 얘기하고 다닌다. 내 앞에서 파리얘기는 일절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파리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이 '진격의 거인'을 보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과 비슷한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파리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 실제로 파리에 방문해 충격받고 자살해 버린다는 일본의 '파리 신드롬'이 있듯, 파리는 많은 여행자들에게 환상의 도시이다. 더해서 이 환상이 얼마나 비대해졌는지 알 수 있는 말들이 있는데, 유럽여행자들의 파리 혐오이다. '나는 파리 그냥 그랬어.', '나는 파리 냄새나고 더럽게 느껴졌어.'와 같은 말이 내포하는 것은 파리에 대한 기대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었다는 뜻이고, 그것을 넘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자 내뱉는 억지 혐오에 가깝다. 더해서 한 번 더 꼬아버리는 영리한 작자들도 있다. 오랑쥬리 미술관이 너무 좋았다는 둥, 오르셰에서 몇 시간을 있었다는 둥, 쇼핑하기에 좋았다는 둥. 파리가 여행지로서 세계적인 도시로서 가지고 있는 아성이 얼마나 거대한지 파리에 대한 간단한 대화자체로 알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보편적 아성에 대해 일절 거부한다. 서사에 무관심한 무취향 자칭 애니덕후가 '진격의 거인'을 좋아하듯, 다양한 여행지에서 자아의 무너짐과 취향의 실패 없이 파리에 대해 좋다 싫다 이야기하는 주제 자체가 나의 성정에 맞지 않다. 취향에 대한 완성욕구와 자립성 없는 여행자가 파리를 좋아하던 싫어하던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러니 파리를 싫어한다는 내 말은 사실 맞지가 않고, 파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무시가 있는 것이다. 진격의 거인이 당신네들의 파리를 밟아줬으면 한다. 한 번 더 질척하게 얘기하자면, 하여간 내가 느끼는 파리의 좋고 싫음을 얘기하기엔 ,,, 수준이 너무 안 맞아서 꾸준히 대답해 왔다. "난 파리 싫어!!!"


_DSC6531.JPG 무덤까지도 시네마적인 씨네필 트뤼포의 무덤.


이쯤 되면 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하고 있다. 변호를 좀 하자면, 나는 무한한 교양 앞에 겸손한 사람이다. 경험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쏟는다. 더해서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고, 그 선택에 대한 유보를 즐기며, 선택 이후에도 나의 가치가 번복되는 과정을 격정적으로 즐겁게 느낀다. 나는 그만큼이나 여행과 경험과 기억과 교양을 중요하게 여긴다. 나와 같은 태도가 여행자의 계급을 나누고 있다. 사실이다. 하지만 여행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여행자 스스로가 꼭 방문해야 할 곳을 가게 된 경험은 굉장히 존중한다. 여행에 대한 절대적 경험이 많이 없더라도 질적경험이 높은 사람과는 이야기할 것들이 많이 생긴다. 그러니 왜 스스로가 물리적으로 있던 곳을 떠나 어디로 여행을 했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왜 그곳으로 떠나야 했는지 생각해야 한다. 모든 여행자에게 여행 그 자체가 운명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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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좀 선정적인 아돌프 색스. 색소폰 만든사람임. 색스가 만들어서 색스폰임. 색스의 고향 벨기에 디낭에 가면 색스박물관 있음.


경험이라고 불리는 기억은 문서화되어 보관되는 정지상태의 것이 아니다. 기억은 그 자체로 유기적인 현상을 만든다. 기억은 불변의 저장장치가 아니다. 어쩌면 현재 시점에서의 기억이라는 건 현재의 자신이 소망하고 있는 형태의 것일 수 있다. 모든 기억은 문학적이고 시적인 형태로서 이미지보다 더 강력하게 자리 잡는다. 그 기억을 붙잡아 심연에 들어가면 온갖 자기 연민과 수치심을 어떤 방식으로 지워나갔는지 흠칫 놀랄 정도로 깨닫게 된다. 물성을 넘어 모든 추상적인 기억조차도 문학적인 상상력을 잃고 사실적시의 시대로 들어간다. 가본 적 없는 여행지에도 상상 속에선 충분히 가 볼 수 있으며, 상상여행이 물리적 여행과의 차이를 내고 마찰을 만든다. 빈부격차 내지 양극화가 점점 더 벌어지는 한국사회에서 사실과 상상의 거리감 또한 엄청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허무맹랑할 정도의 부와 명예와 삶을 부러워하고 허무맹랑할 정도의 낭만과 서사를 꿈꾸면서도 몰랐던 사실, 음모론적 진실을 쫓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어찌 보면 몰랐던 사실과 음모론적 진실은 허무맹랑한 상상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사실과 낭만으로 구분 지어 사고하는 습성이 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MBT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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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모네드가 할 때 그 드가의 무덤.


MBTI는 시뮬라크르적이고 도식화된 상상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MBTI와 같은 문제를 사실로서 받아들이길 원하고 상상한다. 규격화되고 고체화된 딱딱한 인식의 세계에 말랑말랑하고 유기적인 인간의 상상을 밀어 넣는다. 그 상상이 밀어 넣어질 때 인간의 유기적인 기억조차도 함께 변형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안목을 높일 때, 한국인은 영화 안에서 벌어진 비유와 상징에 대한 해석을 원한다. 은유와 같은 상상에 대해선 어려워하거나 겁내는 것을 알 수 있다. 더해서 은유와 비유의 차이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알고 싶고, 격조 높은 감상법을 알고 싶을 때는 베토벤의 삶과 역사를 알고 싶어 한다. 베토벤의 삶과 베토벤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거리감에 대해서는 향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림에 대해 알고 싶다면 화가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림에 대한 감상법 또한 2차원적이고 공식화된 세계에 머문다. 단적인 예로 현대미술에 대한 혐오가 자본의 논리로만 이해되는 일, 현대미술의 감상법이 유기적인 상상을 잃고 비판되는 일은 '개인적으로 감상하는 법'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여준다.


_DSC6558.JPG 나의 생각과 참 닮았다고 할 수 있는 스탕달의 무덤. 스탕달은 딱 한 번의 발기부전 경험으로 긴 글을 쓴 적이 있답니다.


테토남과 에겐녀는 또 어떠한가. 여성적인 특징을 갖는 남자와 남성적인 특징을 갖는 여자는 원래 하던 말이다. 하지만 테토남과 에겐녀는 신조어가 된다. 호르몬의 원료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난입하게 된 건,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에 대한 확언되지 못할 상상을 없앤 대신에 과학적이고 물증적인 호르몬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대략적인 확신의 영역으로 대상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토남과 에겐녀는 호르몬 수치를 제공한 언어가 아니다. 어차피 그 말을 내뱉는 인간이 대상을 바라볼 때 섣불리 일컫는 상상의 언어이다. 여성적이고 남성적이라는 불분명한 말 대신 테토와 에겐으로의 과학적 인척 하는 언어로 탈바꿈한다. 그러니깐, 상상체계의 현상과 기억은 단 한 개도 바뀐 것이 없으면서 언어로의 사실적시는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MBTI가 어떻게 과학일 수 있는가. 경향일 뿐임에도, 과학적이라는 착각, 사실적시의 세계에서 상상을 하겠다는 뜻이다. 얼마나 비루한 상상력인가. 상상의 세계에 사실인척 하는 틀을 이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또 이상한 일인가. 보편성과 유행은 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가.


_DSC6629.JPG 찍고 찍고 찍히는 이야기


위인과 전기적 인물에 대한 환상소거도 그러하다. 인간은 원래 추악하고 병신 같은걸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은 위인을 지우려 한다. 이성적인 똘똘함이 과학인문에 대한 지식으로 둔갑했다.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가 없으면서도 시간의 물리적 특성을 이야기한다. 과학 또한 정점에서는 종교적인 추측의 영역으로 변모하지만 그것은 그럴싸한 위로가 되어가고, 기독교 신자가 쌸라쌸라 방언을 하고 전도를 하는 건 불편한 개독교가 된다. 둘의 경우 모두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신앙적인 믿음에서도 차이가 나지 않지만, 과학적인 지식이 종교적 믿음보다 이성의 것이라는 냥 착각을 하게 되는 건 음모론적 의심과 비판에서 기인할 뿐이다. 마르크스가 사실은 남의 돈을 등 처먹던 빚쟁이 전체주의자였다는 사실과, 간디가 밤에 소녀들을 발가벗겨 품고자는 악취미를 가졌다든가,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랑 섹스를 했다는 정황과 부처님이 사실은 재벌 3세였다는 이야기는 재미있고 단순한 야사를 넘어서 전기적 인물에 흠집 내기로서 역할을 한다. 무결한 위인은 없다고 믿으면서도 무결한 위인이 있기를 바라는 쫌생이 같은 믿음과, 위인이건 뭐건 사람은 다 똑같다는 회의적인 믿음이 공존하다 보니 일어나는 가십거리다. OX 퀴즈를 풀듯 위인의 야사에 따라 환상을 소거하고 있으며, 진실을 알고 싶다는 핑계로 회의적이고 냉소적이고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자세를 갖는다. 어차피 두 경우 모두 위인의 전기적 특성과 자아의 대입을 단층적으로 이입하게 되는 일이다. 현재 서점에서 더 이상 전기작가를 보기 힘들고 자서전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자서전은 다큐멘터리 영화만큼이나 종교적인 상상의 자기 PR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이성적인 척 무턱대고 믿어버리거나, 무턱대고 믿지 않아 버리려는 성질에 따라 과학적 일리가 만무한 전기작가의 글을 읽지 않게 된다.


_DSC6671.JPG 어디서 봤다 했더니, 알도로씨와 같은 스승을 지냈던 여자 건축가 Gae Aulenti가 인테리어를 했답니다.


전기작가의 소멸과 함께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상상은 원동력을 잃고 기억 또한 환상이 아닌 사실과 진실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단적인 예가 SNS에 기록되는 경험의 이미지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서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 묶어지기를 갈망한다. 인정투쟁과 경험경쟁은 MBTI 혹은 호르몬의 세계와 같은 사실적시 이미지로서 SNS에 첨부된다. 첨부된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자기 위안과 환상을 확인시켜 준다. 누적된 피드와 스토리들은 스스로를 꾸며주는 패션과도 같아진다. 전기적 사고를 잃은 sns의 유저들은 거짓이 아닌 척하는 피드에 따라 스스로의 기억을 매몰시킨다. 그럼으로써 완성된 가상세계의 자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회의적인 키메라가 되어 다층적이고 유기적인 서사 속의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된다. 기억은 업로드되고 부착된 이미지에 기생하게 되고 가상세계 속 자아들끼리의 소통의 장이 된다. 그로부터 기인한 가상의 경험들이 개인의 기억으로 다시 환원되는 감옥 속의 자유인이 된다. 욕망의 단순한 촉발을 긍정하게 된다. 제발 카페 같은 데서 이곳저곳에서 셀카 좀 찍지 말아라 한대 콱 쥐어박고 싶다 정말. 경험보다는 기록이 우선시 된다. 기억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경솔해진다. 익숙함과 전기적인 가치를 잃어가면서 취향에 대한 폄하와 섣부른 판단이 즐거워진다. 따라서 무엇이 새로운 경험인지 모르는 혼탁한 세계에 살면서도 어디선가 유물론적으로 기억되는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행하는 콘텐츠에 감복하고, 오랑쥬리 미술관 모네의 그림 앞에서 취향을 위탁하는 프사를 찍고, MBTI와 호르몬과 도파민과 하루 권장 단백질 수치와 인슐린 분비에 신경을 쓰면서 산다.


_DSC6596.JPG 여길 내가 왜 찍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좋았나 봅니다.


이쯤 되면 인간의 기억이 AI에게 간섭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람들은 AI가 거짓말도 할 줄 안다면서 위인을 까내리듯 AI를 까내리기도 신격화하기도 한다. AI가 만든 그림과 음악이 더 좋다고 하는 무식한 소리도 한다. AI는 인간의 In Put이 없으면 어떠한 Out Put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이 AI에게 주입할 In Put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슬램덩크를 읽지 않고 진격의 거인을 찬양하는 것과, 유럽에서의 다층적인 경험 없이 파리를 숭배하거나 혐오하는 것과 음모론적인 시선과 sns의 전시가 계속된다면 인류의 집단기억은 뻔할뻔자의 재미없는 이야기들만 있을 것이다. '취향을 존중하자.' 따위의 서로 자위질 해주는 착한 언어만 자리 잡지 않길 바란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등을 하면서 고상한 생각과 취향이 있는 척 똥폼 잡지 말자. 누구처럼 불법적인 러시아 토렌트 사이트에서 만화를 다운로드하다가 벌금을 물 지언정 넷플릭스에서 떠다 먹여주는 영상매체에 시간 쓰지 말지어다. 음원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자연발생 재생목록에 기대어 음악을 디깅 하지 않는 자 노래하지 말지어다. 맛없는 음식도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먹자. 여행을 갈 때는 운명적인 이끌림에 집중해 보자. 본인이 후졌다고 생각하면 남의 후진점을 끝까지 파헤쳐 알아내자. 다른 사람이 나보고 후졌다고 말하거든 후졌다는 걸 인정 좀 하자. 다른 사람이 나보고 후졌다고 말하거든 그 사람을 물리적으로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자. 에너지가 없다면, 많이 먹고 많이 싸라. 많이 먹고 많이 쌀 에너지도 없다면 연애나 사랑이라도 하자. 에너지가 없다면서 제발 아이돌 덕질 같은 거 하는 정신병자가 되지는 말자. 고달블루의 말이 거진 다 맞다고 생각해 보자.


_DSC6637.JPG 오르셰 미술관 안에 카페에서.
_DSC6569.JPG 모딜리아니가 그린 얼굴 중에 제일 길지 않은 얼굴 같아서요.
_DSC6570.JPG 샤임 수틴의 그림인데,, 어딘가 뭘 좀 하고 쉬고 있는 거 같죠?
_DSC6572.JPG 마티스는 악기를 다루고 있는 사람을 많이 그리는 거 같아요. 바이올린 하는 여자 중에 극히 드물게도 성격 좋은 여자가 가~끔 있답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생겼어요!!!
_DSC6575.JPG 앙드레 드랭의 정물화인데요. 드랭이 쨍하고 칼라풀한 그림으로 유명한데, 이렇게 조신한 정물화를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_DSC6576.JPG 똑같이 드랭의 정물화 입니다만, 어딘가 색감이 스믈스믈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튀어 오릅니다. 악기가 있어서 그럴까요.
_DSC6577.JPG 드랭의 정물화 중 아마 가장 유명한 거 같아요. 어디서 많이 본적 있는. 실제로 보니 더 정적인 정물화랍니다.
_DSC6578.JPG 모리스 위트릴로의 그림인데요. 너무 날 선 나무들이 제 맘을 다 아프게 하는 기분이라 인상이 깊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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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위트릴로의 두 그림입니다. 시립니다 시려. 겨울철 유럽의 하늘색이 너무 잘 표현된거 같아요. 우울합니다!
_DSC6603.JPG 밀레의 '그레빌의 교회'입니다. 이 그림이 무척이나 감동이 깊었습니다. 경건한 기분도 들고 정념이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어딘가 초월적이고 힘 있는 기분도 들고요.
_DSC6607.JPG 그 유명한 꾸르베의 소중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어 지네요.
_DSC6613.JPG 제가 정말 사랑하는 마네의 그림입니다. 마네가 자신의 아내인 수잔을 그린 겁니다. 어딘가 피아노 치는 저희 어머니가 생각나서 좋았던 그림입니다.
_DSC6618.JPG 기찻길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마네가 그렸고요. 제목인 기찻길은 3중 프레임 넘어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소녀와 여자가 주인공이 됩니다. 귀여운 강아지도 있고요. 아,, 노스텔지아
_DSC6638.JPG 누구 그림이게~요! 추상화가로 알려진 몬드리안의 그림이랍니다. 몬드리안의 그림은 추상화 이전의 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이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에볼루션..(헤이그에 있었나?)
_DSC6656.JPG 파리 전철역 입구를 디자인한 헥토 기마르가 만든 의자. 녹색인데 좀 기괴하게 생겨서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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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르누보의 영역이 이렇게 넓은지 잘 몰랐어요... 하여간 거의 다 아르누보인가요?
_DSC6672.JPG 위의 정물화는 마네의 것이고, 아래의 정물화는 수련을 그린 모네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림이 더 좋나요. 저는... 마네의 정물화를 보면 왜인지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_DSC6685.JPG 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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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그림 특전이었는데요. 살랑거리는 그림보다가 갑자기 고흐가 튀어나왔는데, 임팩트 장난 아니었습니다. 저는 고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만,이렇게 모아서 보니 강렬하고 감동적입니다!
_DSC6696.JPG 이건 세잔의 정물화입니다. 이 또한 따뜻하고 정감 가는 화풍입니다. 떨어진 꽃잎에서 저는 박애정신을 느낍니다.. 엥?
_DSC6701.JPG 에밀 베르나르의 정물화. 약간 붕~ 떠있는 듯한 구도와 색이 특이했습니다.
_DSC6703.JPG 로데릭 오코너가 그린 소년의 모습입니다. 저 빛 표현이 참 참신해 보여서 찍었습니다. 뭔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_DSC6716.JPG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한 라호슈에 갔습니다.
_DSC6717.JPG 입구에서 보이는 모습입니다.
_DSC6719.JPG 입구에서 보이는 다른 각도입니다.
_DSC6723.JPG 안에서 보이는 작은 정원의 모습입니다.
_DSC6725.JPG 계단입니다. 저기 쓰인 조명이 너무 예쁩니다.
_DSC6726.JPG 2층에 올라가면 보이는 모습입니다. 격하게 이쁘지 않나요!!!
_DSC6729.JPG 1층과 2층이 곡선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전시실입니다.
_DSC6735.JPG 1층으로 자연강이 아주 잘 들어온답니다.
_DSC6737.JPG 뜬금없는 아일랜드 탁자.
_DSC6738.JPG 창문에 쓰인 모자이크 유리. 저 녹색 부분이 보이는 방식이 이쁩니다.
_DSC6765.JPG 2층 방.
_DSC6772.JPG 2.5층에서 보이는 실내 모습.
_DSC6779.JPG 창문 밖에는 예쁜 나무가 꼭 있어야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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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옥상사진과 현재의 모습.
_DSC6791.JPG 르코르뷔지에의 시그니쳐 의자.. 오래 쓰면 저따구로 되는 거군요. ㅋㅋ
_DSC6795.JPG 루브르에 들어가서 법전 한 번 보고 나왔어요. 문 닫는대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지만, 떠나는 중은 교회로 데려와 줘 패는 맛이 있다. 층간소음은 위층이 아래층에 내는 것이다. 부먹파는 찍먹파를 괴롭힐 수 있는 전능한 권력이 있다. 공교롭게 별별 근거로 이것저것 까내리고 기분 나쁘게 말하고 있지만 이 블로그에선 내가 매를 든 사람이고, 내가 절이고, 내가 위층이고, 내가 부먹파다. 나도 어디 가서 좀 스님한테 맞아야겠다. 내 윗집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시끄럽고, 탕수육 소스를 내 머리에 부어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경건한 자세를 가지다 보면, 나의 상상은 아름다운 기억이 되어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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