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jing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 도착했다. huhu가 마중을 나왔다. 구글맵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는 고덕지도 앱을 켜야 하는데, 나는 한자도 잘 모르고 베이징도 처음이기 때문에 huhu는 걱정 어린 마음으로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 후후는 베이징 시내에 가기 전에 '미윈'이라는 근교에 가야 한다며 택시에 나를 태웠다. 뭐 대충 서울-일산처럼 베이징에 붙은 도시인 줄 알았는데, 택시는 80km를 내달렸다. 중국인이 다 된 후후의 근교에 대한 거리감에 감탄했다. 서울에서 80km면 천안이고, 지방이라고 부른다. 베이징에서 80km는 미윈이고 근교라 부른다. 베이징은 특이하게도 물이 흐르지 않는 도시이다. 물이 흐르지 않는 도시인 주제에 수도가 되었다. 북방의 침략을 막기에 좋았기 때문이라나. 미식의 나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물이 없다니, 그럼 생선은 어떻게 조달해서 먹지? 호숫가 물고기만 먹는 걸까? 정답은 우리가 향하는 미윈에 있었다. 미윈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다. 만리장성 바로 밑에 위치한 이 저수지에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후후는 미윈 저수지의 물고리를 먹이기 위해 택시를 탄 것이었다. 만리장성도 미윈에 가까우니, 대충 서울에서 삼계탕 먹으로 남한산성 가는 느낌...? 매운탕 먹으로 고기리에 가는 느낌? 그런데 그것이 이제 80km를 가야 하는.
"야! 나는 베이징에 여행 온 거야! 미윈에 여행 온 게 아니야!"
"형. 날 믿고 좀 가봐요."
"왜 미윈까지 가는 건데!"
"형 생선요리 좋아하지 않아요?"
생선집에 도착하니 사장이 가게 안에 있는 무슨 수영장 같은 곳에 우리를 데리고 갔다. 수영장 안에는 엄청 큰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당연스럽게도 사장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후후의 중국어는 의사소통에 더 큰 혼란만 야기하기 때문에 손짓 발짓과 얼굴로 소통을 했다. 주인은 손짓으로 물고기를 고르라고 한다. 후후와 나는 이게 무슨 물고기인지도 모르면서 대충 외모가 제일 맛있게 생긴 놈 하나를 골랐다. 사장은 우리가 고른 물고기를 그물대로 올렸다. 물고기는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시진핑의 억압에 눌려 제조원가를 낮춰야 하는 허베이의 공장장이 이런 마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는 담담하게 저울에 몸을 올렸다. 그리고 우리의 후끈한 식탁에 올랐다.
큰 좌석 가운데에는 화구와 함께 큰 냄비가 있었고, 방금 전까지 싱싱하게 살아있던 허베이의 공장장 물고기는 토막이 나 냄비 안에 몸을 던졌다. 물고기가 냄비 안에 오기까지 사장은 세 번이나 우리가 앉아있는 방에 들어왔다. 숨통을 끊은 상태의 물고기를 보여주러 왔었고 우리에게 물었다. 탕? 찜? 볶음? 후후는 알아들었는지 뭐라 뭐라 대꾸를 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그런 다음 토막을 낸 물고기를 들고 다시 방에 들어왔다. 양념여부를 묻는 거 같았다. 후후는 또 뭐라 뭐라 대답했다. 그런 다음 세 번째로 사장이 물고기를 들고 왔을 때는 물고기는 양념과 갖가지 채소들과 함께 접시에 담겨왔다. 풍덩~.
물고기가 세 번의 단계로 손질되는 동안에도, 그 물고기를 배불리 다 먹을 때 까지도 우리는 그 물고기가 무슨 물고기인지 몰랐다. 우리가 앉아있던 방 벽에는 멋진 선전용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애피타이저 개념으로 아주 맛나게 튀겨진 '무엇'이 나왔다. 튀김이 너무 맛있고 좋은데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아주 얇은 스트링 치즈를 갈라 튀긴 모양이었다. 모양 때문에 나는 이것이 치즈 튀김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뜨거운 튀김의 온도를 생각해, 치즈였다면 늘어났어야 하는데 그러진 않았다. 후후는 팽이버섯을 결대로 다 갈라 튀긴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게 이렇게 맛있다고?! 말도 안 돼! 그럼 우리나라는 여태껏 팽이버섯으로 뭘 해 먹고살았던 거야. 나는 애국자로서 이것이 팽이버섯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하니, 사장이 번역기를 켜 우리에게 말한다. "이 먼 곳까지 왕림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이런 멋진 인사를 받은 적이 없다. '왕림'이라니.
허베이의 공장장 물고기는 아주 맛있게 익어 내 접시에 올려졌다. 우리는 이 물고기의 이름을 모른다. 맛있다는 것 말고는. 테무에서 주문한 물건들은 싸고 좋다. 어디서 만들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팔리고 있다. 굉장히 맛있다. 중국은 최고다. 우리는 밥을 너무 배불리 먹고 만리장성에 산책하러 갔다.
헌재는 윤석열을 파면했다. 나는 윤석열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대선당시 그를 뽑았다. 그것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선거 당시부터 이미 느낀 것이 많았다. 정치성은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을 차선으로 두지 않는다. 우리나라 정치가 경이로울 정도로 이진법에 가깝다는 것을 몰랐던 과거의 나는 순진했다.
역겹다. 민주주의가 역겹다. 다른 이념이나 사상에 대한 뾰족한 동의나 거부의사는 없다.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본 경험도 없고 알고 있는 내용도 책이나 위키피디아로 익힌 것이 전부다.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 살았다. 그러니 냄새나고 역겨운 이념의 하수구를 느낄 것은 민주주의의 것 밖에 없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사랑과 성교의 분리적 개념을 주창한다. 사랑한다고 해서 성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성교를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랑과 성교의 분리는 한 사회가 발전할수록 나타나는 공통적인 일이다.(고소득 중년남자는 언제나 값싼 첩을 갖고 있다. 고소득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이유나 남자의 필요성을 성교 말고는 찾을 수 없다.) 남편이 있거나 아내가 있는 사람들이 성적 쾌락을 위해 다른 대상을 찾는다고 해서 스스로의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준 '소유'라는 환상은 사랑과 같은 모호한 가치를 위해 제도화되어 결혼을 독점적 권리로 보장해 준다. 이는 사랑하는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성교했다는 사실에서 독점적 권한을 박탈당했다는 소유의식- 그래서 사랑은 끝났다는 비약적인 발상- 그러므로 사랑과 성교는 같아야 한다는 원리를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사랑과 성교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토대로 한 이념과 정치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사랑과 성교가 같다고 생각하는 건 민주적인 과잉에서 생긴 결과다. 그럼에도 그 과잉을 겪은 선진국에선 결혼의 의미만큼은 퇴색시키기 위해 개개인이 부단히 노력한다.
민주주의의 한계는 국가다. 민주적 선거 과정에서 사회체는 상징적으로 해체되어 순수한 수치상의 다중으로 환원된다. 선거인단은 하나의 신체, 구조화된 전체가 아니라, 형체 없는 추상적 다중, '국가'없는 다중이다. 따라서 핵심은 민주주의가 국가에 고유한 것으로서 그 기구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이 의존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바디우가 국가는 그것이 대표하는 다중과 관련하여 늘 과잉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민주주의가 구조적으로 간과하는 것이 바로 이 과잉이라는 뜻이다. 민주주의적 과정이 '국가'의 이런 과잉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착각이다. -슬라보예 지젝-
우리나라는 참돔 줄돔 감성돔 물고기의 이름을 따져 묻고 가격을 다르게 매겨 먹어도 대북송금의혹이 있는 이재명을 지지하는 나라가 되었다. 허베이의 공장장 물고기의 희생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억지로 주장해 보련다.
티비에서 보던 만리장성과 실제로 가본 만리장성은 높낮이에서 차이가 있다. 분명히 배부른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려 했다. 그런데 순 숨이찬 등산길이었다. 엄청 힘들었다! 하긴, 산 능선을 따라 만든 성이니 등산이 당연하지. 눈이 오던 중이었다. 제설도 잘 되어있지 않아 길이 아주 미끄럽고 무서웠다. 내가 만리장성에 오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릴 적부터 강요당하듯 알게 되는 세계의 랜드마크들이 있다. 에펠탑, 빅벤, 콜로세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호주의 오페라하우스 등등. 아시아에서는 타지마할과 만리장성! 그렇게 보고 듣던 만리장성에 와보다니 신기했다. 에펠탑이건 콜로세움이건 어릴 적에 하도 미디어로 봐온 게 있어 직접 갔을 때 신기한 기분이 덜했다. 거의 모든 랜드마크를 어릴 적에 너무 당연스럽게 방문할 수 있어서 그랬을까. 하지만 만리장성은 감회가 이상하리 만큼 달랐다. 만리장성이 다른 랜드마크와 다른 점이 있다. 만리장성은 엄밀히 말해 랜드마크가 아니라 랜드라인이다. 위치와 장소성을 품고 있던 다른 랜드마크들과 달리 만리장성은 위치와 장소를 초월한 길이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쪽 끝 만리장성을 가도, 동쪽 끝 만리장성을 가도, 미윈에 붙어있는 만리장성에 가도, 다 똑같이 생겨먹었다. 장소와 위치의 의미를 품고 있는 다른 랜드마크와는 달리 장소와 위치의 의미를 휘발시켰다. 거대한 길이의 만리장성은 그 자체로 묘한 익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변두리에 볼품없게 찌그려져 위치하지만 나름대로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대학들은 등록금 편취와 취업률에 억눌려 진리의 전당은 개뿔 포기하고 있었고, 상아탑 같은 단어도 별 볼 일 없게 느껴졌다. 대학은 돈과 취업을 위해 비싼 돈을 내야 하는 얼리버드 티켓창구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은 대학이라고 나는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독재타도를 외치던 인상 쓴 흑백사진 속 '옛날 대학생'들도 멋져 보였다. '나도 나도 대학생'이라는 자부심 정도는 있었기 때문에 레종 드뇌르 훈장이라도 받아보겠다는 냥 정치에 관심도 가졌다. 반값 등록금 문제와 부실대학 문제가 터졌을 때도 4년제 대학생이 응당 가져야 했던 이성주의적 자세로 좌파논리와 우파논리를 모두 공부(?)했다. '디씨인사이드'와 '일간베스트'에서. (당시에는 디씨가 좌파들의 놀이터 같았는데, 지금은 어떤 분위기 일지...) 내가 다닌 대학이 얼마나 허접해졌는지 상상할 수 있다. 강당에서 정치적 언사는 터부시 되었다. 교수나 학생이나 귀찮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자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대학생들은 냉소적 자세를 가졌다. '오그라든다.' 같은 표현이 처음 쓰이기 시작했었고, 뜨거우면 촌스럽고 유치해 보였다. 세련된 애들은 헌팅포차에서 여자 따먹는 얘기를 하거나 오빠들하고 건대에 가서 술 먹는 얘기를 했다. 얼리버드 티켓을 쥔 대학생의 낭만은 노포에서 소주나 까먹고 취준을 준비한답시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교해 잠을 자는 거었다.
그런 냉소적 환경이었지만, 조금 다른 학우들은 존재했다. 교보문고 인문서 top10에는 김난도와 유시민 같은 모사꾼도 있었지만 밀란쿤데라도 있었고 오스카와일드도 있었다. 대학생으로서의 허영이 있었다. 대학 관계자와 교수들이 양심 없어 보인다. 정치가 터부였던 교수들의 비겁한 주둥아리를 30번 정도는 줘 패고 싶다. '인생은 실전이야 존만아'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페라리 탄 부잣집 아들이 혐오의 대상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자본주의가 완성되어 가면서 돈이 없거나 빽이 없는 사람들의 피해의식은 부잣집 도련님을 혐오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옮겨왔다. 누구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꽃피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된 자아는 피해자들끼리 뭉친다. 모두가 인생이 실전인 존만이들이 되어 위악을 떨기 시작했다. 혐오에서 숭배로, 숭배에서 혐오로, 여자는 남자를 미러링 하느라 화장을 안 했고, 남자는 더 이상 블루케챱에서 여자를 못 따먹게 되어 울분을 토했다. 숭배와 혐오는 그 성질이 같고 원리도 같아서 사디스틱하고 최면적이다. 모두가 피해자들이 되어 2002년의 붉은 악마처럼 뭉치고 환호했다. 응원에 힘입어 위선이 꽃피워졌다. 다수에 해당하는 건 곧 약자라는 논리가 통하기 시작했다. 다수결의 원칙임으로, 힘없는 다수가 힘 있는 소수의 페라리를 뿌시자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다수의 중산층은 힘이 없는 척, 다 벗어버리고 투쟁하는 척, 다수에 붙어먹어 비겁자가 되어갔고, 위선이 악보다 선하고 위악이 선보다 선하다며, 이재명 같은 위선자이자 위악자가 등판했다. 성남시민에게 쿠폰을 뿌리던 사람이 스스로를 중도보수라 칭하는 역겨운 상황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는지, 스스로 힘없는 약자이자 다수가 되신 지지자들에게 묻고 싶다. 박준과 같은 언어를 가학 하는 시인마저도 스스로를 연민하며 시를 쓰고 있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윤석열과 이재명을 선택하게끔 만들고 허용하고 있다.
만리장성 탐방을 끝내고 후후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에는 후통이라 불리는 골목길 동네가 있다. 자금성을 둘러싼 올드타운 골목을 말하는 듯하다. 경복궁 근처 북촌, 서촌과 같이 오래된 골목길 같은 분위기다. 후후는 후통에 숙소를 잡아뒀다. 이런 허름한 동네에 어떤 숙소를 잡았을까 기대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아주 골 때리는 숙소를 잘 잡아뒀다.
중국 특유의 야릇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아주 멋진 숙소다. 중국의 상전이 되어 누워 쉴 수 있는 인테리어다.
정확하게 규정된 정치투쟁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도덕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인도주의적 참사에 개입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투쟁의 현실은 선과 악 사이의 도덕적 투쟁으로 바뀐다. 간단히 말해서 정치의 도덕화는 모르는 새에 도덕의 정치화로 바뀔 위험이 있으며, 여기에서 정치적인 적은 도덕적 악의 화신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런 표준적인 좌차적 답변으로 충분할까? 결국 이것은 그릇된 이데올로기적 보편성에 대한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비난을 재탕한 것이다. "보편적 인권이란 사실 고도로 발전한 제1세계 국가들의 개인이 누리는 특권이다." 이런 재탕의 문제는 인권 자체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고 대신 헤게모니 투쟁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유일무이한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 인권은 백인 남성 자산 소유자의 권리였으며, 암묵적으로 하층계급들, 여자, 다른 인종 등은 배제했다. 그러나 그 보편적인 형식 자체가 멈출 수 없는 확장 과정을 촉발했다. 먼저 여자들이 "왜 우리는 안돼?" 하고 말했고, 다음에는 흑인들이 같은 말을 했으며, 그다음에는 노동자들이........
이재명 지지자들은 얘기한다. 카리스마 있는 영웅적 리더보다 일을 열심히 하는 행정가를 뽑고 싶다고.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선민의식과 엘리트의식이 없이는 대통령자리에 갈 수 없거니와 가서도 안된다. 일반 국민이 볼 수 없는 시야로 나라를 이끌고 봉합해야 하는 자리다. 누구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심신 수양도 중요하다. 보수당과 보수인사들이 혐오스러워 뱉은 아무 말의 일종이라면야 쉽게 넘어갈 말이지만 이재명이 일을 열심히 하는 행정가 라기에는 거짓말도 의무 삼아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이재명이 분노와 권욕에 허덕이는 콤플렉스 덩어리라고 욕하면, 이재명의 지지자들은 그 점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 그것이 솔직하게 보이는 것이 인간적이고 가까운 사람으로 느껴진다나, 대통령이 네 친구 되는 자리도 아닌데 가깝게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면, 우리 아버지부터 구청장 만들어야겠다. 이재명의 즉흥적이고 급발하는 정책과 약속들이 허무맹랑하고 생각이 없다고 지적하면, 그 점이 이제껏 봐왔던 정치가들과 다른 모습이라서 좋다고 말한다. 얼마 전 유시민이 어디에 나와 이런 얘기를 하더라. 어린이집에 과일이 없다고 하면, 정책적인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과일 사와!"라고 바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나. 대통령의 권위로 시스템과 정치를 무시할 정도의 서민을 생각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는 건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라면야 쉬이 넘어갈 수 있지만, 어린이집에 즉흥적으로 과일 사주는 것과 배곯는 불쌍한 남의 집 자식 취직시키는 부정청탁이 뭐가 다른지 난 잘 모르겠다.
한국 동대문의 DDP를 설계했던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주상복합 건물에 방문했다. 이 날 이 건물에 갈 때까지 나는 자하 하디드가 죽은 지 몰랐다. 건축학도인 후후의 뇌피셜에 의하면 자하 하디드는 스트레스로 죽었다고 한다. 도쿄올림픽 때 자하 하디드가 도쿄 경기장 건축 입찰을 따 냈다고 한다. 건축비가 자꾸 늘어난다는 명분으로 아베는 자하 하디드의 모든 프로젝트를 백지화했다. 후에 일본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후후에게 이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행 당시 나는 지방에서 띄우는 스마트팜 공사 입찰을 따먹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심지어 한 지방도시의 스마트팜 건축의 설계입찰을 내가 따냈음에도 불구하고 공사입찰이 다른 쪽으로 흘러가게 생긴 상황이었다. 해당 지방도시의 호족으로 있는 공사업체가 내가 준비했던 설계사항들을 뺏기 위해 노력했다. 자하 하디드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어 내 마음이 아팠다.
베이징에 있는,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주상복합 건물을 산책하며, 자하 하디드를 추모했다. 중정에서 한 모자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걸 구경하게 되었다. 문득 배드민턴을 치는 엄마와 아들이, 자하 하디드가 의도했던 모습으로 보였다. 이 건물을 설계할 때, 자하 하디드는 주민들이 밥을 먹고 쇼핑센터 밑으로 내려와 날씨와 상관없이 커뮤니티성 활동을 하기 바랐을 것이다. 옆집 아줌마와 수다를 떨고 배드민턴을 하고 공놀이를 하고. 자하 하디드의 공간이 의도대로 쓰이는 장면을 포착하게 되면서 애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행이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 (일부 좌파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때문에 위험해지기는 했지만, 이미 자율성을 얻었으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을 실제로 문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이 유혹은 그 대립물로 보이는 것과 엄격한 상관관계가 있다.
베이징에 와서 꼭 먹고 싶었던 음식이 있다. 당연히 북경오리! 베이징덕! 카오야! 여행을 하기 전부터 후후에게 베이징덕 맛집을 여러 곳 찾아놔 달라고 부탁했다. 후후는 베를린 공대생의 신분으로 칭화대에 교환학생으로 가있었다. 혼합경제라고 일컫는 제조업 강국의 대학생 신분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엘리트 대학으로 교환학생으로 갔다는 건 신분자체가 아이러니다. 추성훈이 한국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듯, 데이비드 리 셰프가 미국사람인지 한국사람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듯, 후후는 한국사람인 주제에 베이징예찬을 끊임없이 하며, 독일학생인지 중국학생인지 혼란을 겪는 것 같았다. 후후가 베이징을 본인의 노스탤지어의 근원으로 '선택'함은 정체성의 혼란을 스스로에게 주입하는 비겁한 발상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념과 사상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잃지 않는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후후가 찾은 세 곳의 북경오리 맛집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북경오리계의 보수 진보 중도. 젤라토를 제외하고 진보적인 음식의 맛을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북경오리계의 진보식당을 제외했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가 플러스가 되듯,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진보는 보수적 가치를 의미할 것 같으니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첫 번째로 보수적 북경오리집에 방문했다.
대문에서부터 "for the Duck, of the Duck, By the Duck"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유서 깊은 불고기집 같았다.
마침 식당 안에서 어떤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어떤 행사인지는 절대 못 맞추겠더라...
호방한 중국인들의 행사를 훔쳐보았다. 북경오리와 고급 차와 고량주를 마시며 경극을 관람할 수 있다니, 옛적에 남의 집 환갑잔치에 가면 여러 볼거리도 있고 재밌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점점 친지들이 대거로 모이는 행사들이 없어지는 게 안타깝다.
깜빡하고 오리사진을 못 찍었다... 다 먹어 버렸다. 맥주도 마시고, 오렌지주스도 마시고, 비싼 우롱차도 마셨다. 오리를 다 먹고 나면, 남은 뼈로 오리탕을 끓여준다. 정말 미칠 듯이 맛있었다.
근대 건물에 입주한 wework. 당최 맥락을 알 수 없는 곳에 맥락을 알 수 없게 생겨먹은 건물에 맥락을 잃은 위워크가 들어가 있다. 저곳을 사무실로 쓰는 회사들은 대체 어떤 회사들일까.
천안문 근처 후통에 보이던 이발소.
이 동네는 주민 전체가 공용화장실을 쓴다고 한다.
한옥은 건물 위에 지으면 이상하다. 중국 전통 건축물은 건물 위에 얹어놔도 중국스럽다는 게 신기하다. 중국스럽다는 기묘한 말이다. 미학적으로 의미를 퇴색시킨, 그래서 새로운 맥락에서 아름다움을 보도록 강요받는다. 중국에서는 중국스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중국스러운 스카이라인.
밀집한 후통의 집들.
건물 옥상에 위치한 중국 스러우면서도 일본 스러운? 일본 스러운걸 중국 스럽게 만들어버린 이상한 정원.
진보적인 장어요리. 장어의 식감을 살리면서도 국수처럼 후루룩 해버릴 수 있는 음식.
청나라 시대 디저트 가게. 청나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노란색이 상징한다. 한족은 무서울 정도로 지독한 면이 있다. 동북공정이 당연스럽다. 오랑캐가 새운 청나라역사도 본인들의 역사 안에 가둬 관리한다. 중국의 역사는 몽골도 베트남도 집어삼킬 기세다. 와중에 한국이라고 중국의 역사가 아닌 건 아닐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야 한국은 한국이고 중국은 중국이지만.
이재명과 개딸의 등장 이전의 시대. 노무현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서 전해철, 양정철, 이호철 철트리오가 설치고 다녔다. 김문수는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으스대다가 개쪽을 당했고, 안상수는 보온병을 들고 설치다가 개쪽을 당하고, 김정일이 죽고, 문재인이 하도 아닌척하느라 김한길이 스트레스받고 있었고,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유승민 김무성이 술자리에서 뽀뽀를 하고, 옥새 들고 나르고, 배신을 하고, 우병우가 기자를 째려보고, 김기춘이 휠체어를 타고, 박근혜가 탄핵을 당하고, 이재용이 감방에서 러닝을 하고, 잘생긴 조국이 커피 들고 청와대에서 개폼 잡고 있는 시간에도 이재명과 위선과 위악과 다수와 피해의식은 세력을 키워갔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의아했어도 나는 정파적이고 당파적인 비상식적 네거티브에 휘둘린 적이 없다.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천박한 언어와 품위 없는 언어로 서로를 겨냥한 시절이 없다. (양문석 같은 버러지 같은 친명인사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영상을 보자면, 내 심장이 철렁 주저앉으면서 에스토니아 이민을 준비하게 만든다.)
투표권을 얻은 지 14년이 넘는 동안 4번의 총선, 3번의 지선, 3번의 대선을 치렀고 내 손으로 당선시킨 유일한 사람이 윤석열이었다. 이재명의 등장 이전에 나는 차선을 선택하는 투표를 해왔다. 그래서 단 한 명도 내가 원하는 사람이 당선된 적이 없지만 별 불만은 없었다. 지금처럼 차악을 선택하는 투표에서 윤석열을 당선시키고도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은 스스로 깡통차고 탄핵되었다. 사람들은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그 즐거움들을 보며 깊은 역겨움을 느낀다. 매불쇼의 오윤혜, 최욱, 곽수산은 오열을 하며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냐며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같은 인간임에도 생각과 감정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구나를 실감한다. 스포츠는 승패 그 자체에 환희가 있을 뿐인데, 정치의 승패는 스포츠보다 더 간악하다. 자신의 인생을 쓸어 담고 보듯 자아도취적인 승패에 감동한다. 그것이 유희 그 이상 이하가 아님에도 세상을 살려낸 영웅이 된 마냥 희생적인 내러티브를 스스로에게 가져다 놓는다. 간절히 바라고 응원해 왔던 사람의 승리, 간절하게 저주하던 사람의 패배가 안겨주는 기쁨은 그 당위만이 애국일 뿐 집단적인 광기이며, 선전에 휘둘린 감성적인 주체들의 흥분이다.
자금성에 방문한다. 이태리영화이지만 베이징이 배경인 '마지막 황제'의 첫 장면이 생각난다. 미로처럼 어지럽고 단순한 자금성에서 놀던 어린 '푸이'왕자. 얼마나 외로웠을까.
양심 있고 경건하며 겸손하고 자기 삶에 깊이 고취되어 있는 한 인간이 고난과 고통을 외재화할 수 있는가. 없다! 가해와 피해를 선명하게 구분 짓고 정의의 판결을 기다릴 수 있는 인간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없다! 개인의 소신을 투표로 행사할 수 없는 건 당연하거니와 차악을 선택해도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는 시스템덕에 피해의식은 선한 의미를 거세하고 고통만을 즐기게끔 만든다. 정치는 본디 성질이 이렇게 껍데기 같고 거시적인 거였을까. 내가 아직도 정말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즐거워하는가. 감정일 뿐이면서. 사람들은 즐겁다. 악을 처단했다고 느낀다. 정치만큼 미니멀리즘 한 장르도 없을 것이다. 폭력적인 민주주의에서 위선에 투신한 맹종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인 양 술을 먹으러 간다. 어차피 다 지하 룸빵에 가 매춘하고 오쟁이 몰래 이빨에 단백질 낀 남자랑 키스하고 남 등쳐먹느라 월급 받는 자본주의자 걸레들이면서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있는 인간인 양 사람 좋은 소리 털털해대는, 그래서 뭉쳐서 외롭지 않은, 다수, 약자, 민주주의자, 헌법수호자, 피해자 씹새끼들. 윤석열은 싫은데 이재명은 좋은, 위선이 떳떳한 피해자들. 이재명도 좋은 건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않냐며 분노하지 않는 위선자들.
민주당이 옳네 국힘당이 옳네 하는 문제도 아니고, 좌파이념과 우파이념 중 내가 어떤 사고를 가졌는지 보이려는 글도 아니다. 옳은 건 보수이고 틀린 것은 진보적 생각이라는 글이며, 당연히 나는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글이다. 한국정치가 이 분리의 숫자 싸움으로 굳어지면서 개개인의 소신이 쓸모없는 코휴지가 된 상황에, 윤석열 파면이 권선징악의 결과처럼 보이는 것이, 피해자로서 뭉친 대중의 도취가 미치도록 괴로워서 쓰는 글이기도 하다. 자꾸 좌파와 민주당의 승리가 전적으로 '선함'의 승리 혹은 '차악'의 승리인 양 떠들어댄다. 도덕적 우월감 혹은 낭만적인 발상에 취해 얘기한다. 연대해야 한다고, 떳떳하게 살 거라고, 자신의 이익을 버려가면서도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희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낭만적 발상과 온정을 가지라고. 웃기고 귀여운 이야기다. 유시민은 이재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당위가 이재명을 위선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시민의 어용을 자청한 프레임들은 하나같이 사기꾼의 언어다. 이재명은 위선의 감정을 북돋는 매개이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이재명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는 안티 이재명은 없다. 이재명은 히틀러만큼이나 악한 인물일 뿐 위선이 개입될 틈조차 없다. 이재명은 본인이 히틀러와 닮았다는 악명조차도 기꺼이 즐거워할 인물이다. 이재명은 악하면서도 지지자들의 위선을 독려하고 촉발한다. 정당한 악의 위치에 국민의 힘을 타자화 한다. 그러니 유시민이 이야기한 프레임은 이재명의 언어와 같은 것이다. 유시민도 비양심적인 사람이다. 이재명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재명이 위선적이거나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재명의 간악함, 지지자들의 위선을 싫어한다.
위선이란, 전쟁 없는 평화, 아름다운 이별, 이익 없는 도덕과 양심 따위를 믿는 것과 같은 얘기다. 누설 없는 비밀 없고, 우연의 결과가 운명일 뿐이다. 억압 없는 낭만이 없기 때문에 낭만과 세속은 반대급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낭만이 세속의 예외적 상황일 뿐이다. 낭만적인 상황이나 낭만적 사항을 의도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재해 앞의 무능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다.(또 반론으로 정치적 효능감 같은 소리 하면 주리를 틀어버리겠다.) 의도할 수 없기에 낭만이 낭만이다. 신화적 사상들을 싹 다 걷어내자. 낭만과 사랑과 온정은 순진무구하고 얄팍한 사고에서 나오지 않는다. 절대적이고 참을 수 없는 재해와 같은 압력에서만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된다. 대부분의 참을만한 환경과 축복에 침을 뱉고 싶어지는 이유다. 이익을 침해받고 있거나 친지의 자유로운 삶이 직접적으로 침해받지 않는 안전한 상태에서 주장할 수 있는 모든 의견은 거짓부렁일 뿐이다. 회사에서 월급 타고 살면서 기업의 윤리경영을 논하는 건 이율배반이다. 배신이다. 비인간적이라고 얘기해도 좋다. 하지만 정녕 윤리경영이 인간적인 거라면 스스로의 시간과 능력을 기업의 월급과 바꾸지 않았다. 본인의 시간은 월급에 팔아먹으면서도 본인의 이율에 배반하는 윤리경영을 논하는 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고쳐야 한다. 윤리경영은 회사 소속원을 묶어놓기 위한 타협의 언어일 뿐이다. 이익 앞에 윤리가 있었다면 당신의 월급도 없었다.
드디어 북경오리계의 중도에 왔다. 자본의 냄새가 폴폴 난다. 베이징에서 판매하는 베이징덕 식당에서의 자본의 향기는 과연 마르크스 적인 것일까? 마오가 문화 대혁명을 일으킬 당시 중국 전통음식의 모든 요리레시피도 불태워 버리려고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던 이인자 주은래는 프랑스 유학시절 미식을 경험했던 터라 마오의 명령에 불복종했다. 남몰래 중국의 전통 요리법은 불태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중도적인 식당에서는 주은래의 냄새가 난다. 주은래는 단 한 번도 본인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을 주장한 적이 없다. 마오의 거친 언행 뒤에 착 붙어 언제까지나 마오의 똥을 성실하게 닦았다. 주은래가 귀족적 품성을 지녔다고 키신저가 그렇게 극찬했단다. 귀족은 자고로 남의 똥을 닦던 뭐 하던 맛있는걸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미슐랭 빕구르망에도 나왔다는 베이징 전통의 원조 짜장면집에 왔다. 약간 기시감에 젖어있는 맛이었지만 굉장히 맛있었다. 우리나라 짜장면보다는 훨씬 담백하고 짭조름했다. 딱! 내 스타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이화원에 산책하러 갔다. 그 유명한 서태후의 뒷마당. 정말 아름답더라.
좋은 말은 누구나 한다. 누군가 이타적인 마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며 희생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이타성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이기적 마음,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무엇'을 지키는 이기심에 대한 감탄과 존의 뿐이다. 강성한 멘션을 열심히 달고 살던 장제원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누구든지 본인이 걸 수 있는 만큼 베팅하고 잃을 수 있을 만큼 잃겠다고 얘기하지만, 재해 앞에서의 이기심은 정직해진다. 응당 잃어야 할 것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배려해야 할 사람들이 나의 명예와 수치심을 자극할 수 있다. 장애를 동정하는 것이 차별이듯, 장애를 배척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것이 장애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의 이익이 명예건 돈이건 떳떳함이건 그것을 위해서는 차별과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나의 악함이 의도치 않게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낭만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의도될 수 없다. 나는 나의 이기심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울 뿐이다. 나는 나의 이기심으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가끔 도울 때가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이타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타심을 인정하는 건 좌파 진보의 어용언어다. 인류는 진보를 자청하는 기생충들 때문에 정체될 수밖에 없다. 딜레마다. 진보는 거부할 수 없는 재해일 뿐 인류의 의도가 아니다. 생각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 등 부르고 배 따시게 자면서 양심과 도덕 따위를 운운하지 말라. 당신의 등과 배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비도덕적 환경은 모르면서. 당신과 당신 가족의 배부름과 따뜻함을 빼앗는 재해 앞에서 당신의 행동은 굉장히 논리적이게 변할 뿐이다. Liberty와 Freedom을 헷갈리지 말자! 리버티는 따뜻한 집에서 부르짖는 호사일 뿐이다. Freedom이 침해받는 상황을 상상하자. 이재명은 이 나라와 국민의 Liberty는 보장하겠다고 하면서 Freedom은 없애겠다고 얘기한다. 국영기업화 된 엔비디아, 국가차원의 AI사업, 경기도에서의 공공배달 서비스 등이 그 예다. 글을 쓰다 보니 좀 화가 나는데, 이런 거에 현혹되는 사람은 왜 그런 건지 이해가 너무 안 된다. 이재명을 파기환송한 사법부는 쿠데타인데 헌재는 승리했다는 정청래의 논리가 Freedom 없는 Liberty, 자유 없는 독립을 향한 자기모순적 비명이다.
잔인한 정치적 회로에 짓눌려 희생당하는 개인개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피해자로서의 자아를 외재화하지 않는 사람에게 커피 한 잔 사주고 싶다. 고통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동지애를 보여주고 싶다. 스스로가 원체 걸레짝 쓰레기인 인간임을 인정하는 나와 같은 이는 이재명과 그 지지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포스트 이재명이 한국사회에 등장할 수 없도록! 윤석열 파면은 막았어야 했지만 명분은 없었다. 유튜브에 여러 영상이 뜨기 시작한다. 문형배가 주문을 읽을 때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세월호 영화도 아주 재미지게 보고 쳐 울면서 감동하고 분노할 사람들이다. 노란 뱃지달고 호들갑 떨 시간에 자기 부모에게 문안인사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것이 세월호 참사를 막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조희대를 족치겠다고 또 난리를 친다. 이재명은 빨갱이도 못 되는 인물이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이 차라리 성공했으면 한다. 우리나라에 별 미래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