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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Nov 22. 2022

3학년 9반 아이들

어릴 적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이전의 소학교에서, 일제강점기인 1941년부터는 국민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에 이르러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교육법을 개정하여, 이듬해인 1996년 3월 1일부로 초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종종 지난 일을 떠올릴 때 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가 먼저 기억 속으로 소환되는 것은, 교가를 비롯해서 졸업앨범과 같이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지난날의 유물 속에는 여전히 국민학교란 명칭이 낙인처럼 찍혀있기 때문이다.


내가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을 줄곧 다닌 학교는 대구 서구의 외곽에 자리 잡은 인지국민학교였다. 1960년대 후반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는데, 주로 의성이나 안동, 멀리 문경이나 봉화 등 경북의 동북부 지역에서 유입되던 농촌 사람들이 주로 주로 정착한 곳이 원대동이나 비산동 같은 서구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당시에는, 대구 도심에 자리 잡은 학교들에 빗대어 변두리 지역의 학교를 따라지 학교라 부르며 자조하기도 했지만, 학년마다 학급수가 열다섯 학급에 이를 만큼 학교 규모가 커서 전국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학급당 정원 또한 칠십 명을 넘어섰으니, 같은 해 졸업한 동기 수만 하더라도 천명을 훌쩍 넘어설 만큼 엄청났다.


학창 시절, 과거로 기억이 미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물론, 아직도 난 국민학교 시절 처음 입학한 반이 1학년 7반이며, 담임선생님의 함자와 반장 이름, 학교로 가는 길에 있었던 구멍가게의 예쁜 딸아이 이름까지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는 그저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단순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뿐, 아련한 추억으로 마음속에서 되살아나지는 않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과 추억은 엄밀히 말해 다르다. 기억이 단순히 지난 일을 되살려 생각해 낸 것이라면, 추억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되 이와 결부된 스토리까지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국민학교 시절 나의 추억은 3학년에 올라오면서부터 시작이 된다.


담임선생님은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무척 엄하시면서 용모 또한 단정한 분이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처음으로 내게 공부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신 분이었다. 날마다 숙제를 꼼꼼히 점검하시고선, 공책에다 '참 잘했어요' 스탬프를 찍어주거나 빨간 색연필로 짤막한 평가의 글을 남겨 주셨다. 게다가 문장 단위의 받아쓰기를 자주 했는데, 주변에 백점을 맞는 아이들이 극히 드물어 종종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칭찬을 해주실 때면 괜히 마음이 우쭐해지기도 했었다.


우리 반 반장은 이승호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긴 데다 공부도 잘해 처음부터 은연중에 호감을 가졌었나 보다. 동네가 달라 등하굣길까지 같이 할 순 없었지만, 몇몇 친한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을 때가 많았고 방과 후에도 학교 운동장에 남아 함께 노는 일이 잦았다. 특히, 어느 순간부터는 무엇이든 늘 1등을 도맡아 하던 승호를 공부로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이때부터 책꽂이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동아전과나 수련장을 펼쳐 문제를 날마다 꼼꼼히 풀어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함께 어울려 놀던 아이들 가운데는, 부반장이던 김홍식과 이종희, 한창규란 친구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다. 홍식이는 집이 잘 살았는지 몰라도 변두리 아이들이 평상시 입는 옷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옷을 입고 다녔다. 당시로는 드물게, 여름철이면 반바지에다 스타킹을 신고 다니거나, 겨울에는 모직의 코트를 입고 등교할 때도 있어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기도 했다. 종희는 키가 큰 편인 우리들 가운데서도 한 뼘 정도 키가 더 클 만큼 웃자란 아이였다. 운동 신경이 뛰어나 축구를 할 때는 골키퍼로, 농구를 할 때는 골잡이 역할을 하는 센터로 남다른 운동 능력을 보였다.


물론 이 두 친구들에 관한 기억이 이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비록 이후론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지만 학년을 달리해서도 계속 친분을 쌓아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일, 홍식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는데 그 이후로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종희는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개교한 경북 체육중학교에 진학을 해서 큰 키를 바탕으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이후 경북 체육고등학교로 동계 진학을 해서는, 학교가 육상과 같은 기초 운동에만 주력을 하자 농구로 이름 높은 계성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엘리트 농구선수로 활동하던 중에 그만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깊은 내막까지는 알 순 없지만 어려서부터 맺어온 인연이었기에, 한 번씩 종희가 생각날 때면 가슴이 여전히 시리도록 아프다.


한창규는 같은 동네에 살아서 더욱 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겨울방학이 되자 아버지 직장을 따라 울산으로 전학을 가버렸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이듬해 봄방학이 시작되는 종업식날 교무실로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학기초, 가정방문 때 선생님을 모시고 간 다음 집이 창규네였던 것을 기억하신 듯 창규의 통지표와 우등상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둘이 친했으니,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창규를 만나게 되면 그때 꼭  전해주라는 말씀과 함께. 이후 이 통지표와 우등상장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아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해마다 조금씩 두께쌓아가는 내 상장들과 함께 장롱 깊은 곳에 고이 간직되었다.


5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서는 이를 소재로 쓴 학교 글짓기 대회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럴수록, 창규에게 통지표와 우등상장을 전해주려는 마음은 더욱 견고해졌고, 창규의 근황도 덩달아 궁금했다. 대학교에 다닐 적엔 울산서 유학 온 친구들에게 창규의 이름을 들며 행방을 수소문해 보기도 했으나 모래사장에 바늘 찾기에 다름없었다. 이후, 아이 러브스쿨이나 사람 찾기 앱을 통해서도 창규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으나, 추억의 끈을 이으려는 것이 일방적이진 않지 회의감이 들 때가 았다. 결국, 결혼하면서 개인 소지품을 정리하던 중에 창규의 통지표와 우등상장이 그만 유실되고 말았다. 소중한 추억마저도 함께 사라지고 만 듯 두고두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승호와는 몇 년 전부터 극적으로 소식이 닿았다. 대학 동기이기도 했던 승호는 부산대학교에서 MBA를 전공하고,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던 모양이다. 현지에서 취업하여 Manager로 회사의 인정을 받고 경험을 쌓은 후, 타고난 능력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미용 자재 유통과 관련된 창업을 해서 여러 개의 대형 Mall을 경영할 만큼 성공한 사업가로 자수성가를 했다. 마침, 오늘(11월 22일) 승호 부부가 귀국을 하는 날인데, 오는 토요일에는 대학 동기들과 모임을 대구에서 가질 예정이다. 원래는 포항에서 모임을 가지려 했으나, 뜻하지 않게 건강을 해치게 되어 부득불 장소를 대구로 변경하게 된 것이다. 모처럼의 모임이 불발되어 승호와 대학 동기들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3학년 때 담임이셨던 한정옥 선생님은 내가 막 교직에 발을 내디딜 즈음, 팔공산 갓바위를 오르다가 우연히 뵙게 되었다. 나이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체구에다 여전히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죄송스러우면서도 고마울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교 교사가 된 제자가 대견했던지, 연신 주위를 돌아보며 함께 온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시는데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침, 선생님은 일행과 함께 하산하던 길이어서 제대로 된 인사조차 올리지 못하고 돌아선 것이 두고두고 마음 쓰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게 있어선 기억과 추억을 가르는 임계점이 국민학교 3학년 시절인 듯하다. 이 시절의 추억을 바탕으로 기억의 공간이 넓어지고 더욱 구체화되면서 추억의 부피도 몰라보게 확장이 되었다. 친구사이라고 주위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학교가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갖게 되었다.


승호의 귀국을 계기로 지난 일을 되돌아보다가 그야말로 소싯적, 3학년 9반 아이들이 아직까지 머릿속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처음엔 이름조차 제대로 떠올린 것인지 긴가민가하는 마음이 들다가, 이들의 어릴 적 얼굴이 마치 반투명 유리창 건너편에 비친 실루엣처럼 머릿속으로 떠오르자, 마치 윤곽선을 따라 그림 그리기 놀이하듯 어릴 적 얼굴이 하나하나 되살아나고 있다. 


숨바꼭질하다가 가려진 어둠 속으로부터 불쑥불쑥  나타나곤 하던 어린 시절 내 동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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