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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Nov 19. 2022

너의 빈자리

해마다 시월이 막바지에 이르면 늘 생각나는 아이가 있다. 2013년 3월에 시작된 인연이니 꽤 오래전 일이다.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첫 한 달간은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학사(學事) 일정과 관련된 다양한 학생활동을 안내하는 시기인데, 1년간 자신이 활동할 특별활동 부서(部署)를 선택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하루는 교무실로 체구가 듬직한 아이가 찾아왔다. 영자신문반에서 활동하고 싶은데 혹시라도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아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당시 학교에서는, 한국 과학창의재단에서 시행한 창의경영학교 우수사례 발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受賞)한 실적을 바탕으로, 다양한 영어 관련 특색활동을 모색(摸索)하고 이를 하나하나 실행으로 옮기던 때였다. 관내(管內) 초중등학교의 원어민 선생님들을 활용하여 방과 후 영어캠프를 운영해서 1, 2학년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40시간의 영어 체험활동을 이수(履修)하도록 하고, 학교 축제 때 공연을 목표로는 영어연극반을, 연 2회 걸쳐 영자신문을 발간(發刊)하기 위해선 영자신문반을 특별활동 부서로 각각 편성하여, 한국 과학창의재단에서 내려온 지원금을 토대(土臺)  '포항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학교'를 모토로 삼아 전력투구(全力投球)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영자신문반을 구성해야 할 부원특설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미 선배정(先配定)이 되어있었다. 신입생 배치고사에서 영어 성적이 특출(特出)했던 학생들을 특설반 담임선생님 학생들과 상담을 해서 미리 추천을 받아두었던 것인데, 영자신문반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영어에 능숙한 학생들이 필요했고,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영자신문반 활동 실적이 학교생활기록부를 꾸미는데 큰 도움을 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이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교무실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당시 특색활동 부장으로, 학내의 모든 영어 관련 활동을 총괄(總括)하던 입장이었기에 영자신문반 담당 선생님이 아이를 내게로 보내 의견을 물어본 것인데,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서 선택이 이뤄지지 못한데 대해 내심 안한 마음적지 않았다. 아이의 생각이 기특하기도 해서, 아이의 입장에서 상담을 진행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이가 가진 영어능력이 대단했다. 중 3 때 치른 토익점수가 이미 900점대 이르렀고, 영어회화 능력이 특출함물론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인 글로 표현하는데도 부족함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대한 관심이 커서 부모님이 이를 제대로 뒷바라지해준데 힘입은 것인데, 중 3 겨울방학 갑자기 몸이 아파 내신(內申) 관리를 소홀히 탓으로 특설반에 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가 영자신문반으로 들어와서 1학년 반장으로 뽑힌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영자신문반의 활동 하나하나에 진심이었고, 우월(優越)한 영어실력은 부원들 가운데서도 낭중지추(囊中之錐)여서 학생들의 자발적 추천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장으 추대(推戴)되었다. 그게 벌써 한 해 전 일이었고, 2학년이 된 이듬해에 영자신문반에 주저 없이 지원하여 명실상부(名實相符)영자신문반 반장으로서 1, 2학년 학생들을 앞장서 이끌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과거 1년간에 걸친 투병(鬪病) 생활로 완치가 된 줄로만 알았던 병이 2학년에 올라오면서 재발된 것인데, 학교생활에 워낙 의욕적이어서 담임선생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아이의 병세(病勢)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는 모르고 있었다.


5월 초에 치러진 중간고사의 영어시험을 결시(缺試)했다. 평소 인사성이 발라, 복도를 오가면서 눈을 마주치면 거의 배꼽 인사를 하듯 머리 숙여 반가움을 표하던 아이였다. 근래에 몸이 부은 듯 얼굴살이 유달리 통통 보여 슬쩍 그 이유를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그렇긴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영어 시험 결시하다니. 하지만 그날 오후, 담임선생에게 물어서 들은 소식은 감히 생각도 못한 일이었기에 마음이 참담(慘澹)하기까지 했다. 조기(早期) 발견으로 완치되었다 생각했던 암이 갑자기 발한 것인데, 시한부(時限附)라는 것이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특별활동을 마치고 나면 영자신문 주간(主幹)이었던 내게 활동상황을 일일이 귀띔해주던 살갑고도 고마운 아이였다.


5월 중순이 되어 학교로 돌아온 아이는 별일 없다는 듯 씩씩하게 다시 학교생활에 열중했다. 특히,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발간해야 할 영자신문 원고(原稿)를 마감하기 위해서 부원들을 독려(督勵)하는 한편으로, 이미 작성이 완료된 특집기사와 1, 2학년 공동기사, 영어토론이 포함기획기사를 꼼꼼히 교정(矯正)하고서 그 결과를 일일이 내게 일러주곤 했다. 하지만 7월이 들어서자 다시 결석이 잦아지더니, 장기결석으로 이어지고는 끝내 기말고사까지 결시하고야 말았다.


여름방학이 지난 후 담임선생님을 통해 아이 아버지가 만나보고 싶다는 기별(奇別)이 왔다. 그날 저녁, 대충 알고는 었지만 아이의 몸상태를 듣고나서부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슨 말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야 할는지 아득했다. 암이 뇌로 전이(轉移)되어, 복시(複視)된 상태로도 악착같이 학교생활을 이어가던 아이가 이젠 완전한 실명(失明) 상태에 이르렀다고 다. 자식의 돌이킬 수 없는 몸상태를 설명하면서, 의사인 아버지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있는데, 차마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는데, 툭하고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식탁 위로 떨어지더니 이내 아이 아버지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정말 영어를 좋아했다고 다. 특히, 특별활동이 있는 화요일은 귀가하고 나서도 학교에서의 일을 엄마와 동생에게 조분조분 이야기해주며 즐거워했다데, 그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영자신문반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발자취를 마지막 흔적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아이가 생각 이상으로 잘 텨주긴 하지만 그 끝을  수가 없어서, 그동안 정 붙이고 다닌 학교 선생님들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려고 마련한 자리라고 했다. 그날 밤, 식사자리를 마치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마치 아이 아버지 심정이라도 된 듯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서럽던 기억이 난다.


결국, 아이는 시월이 다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세상과 이별했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정든 학교를 돌아볼 수 있도록 배려(配慮)를 했다. 2학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소운동장에 도열(堵列)해서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는데, 학생들 표정이 너무 숙연(肅然)해서 이를 지켜보는 마음이 내내 울컥했다. 못내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2학기 들어 발간 영자신문을 살아생전 그 아이 손에 쥐어주지 못한 것이다. 아이가 손수 썼던 기사와 마지막까지 고쳐 쓰고 교정했던 정제(精製)글이 오롯이 담겨있는 영자신문을 아이는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 것인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시월의 마지막 날, 옛날 써두었던 글을 찾아내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어보았다. 언제가 부터는, 어린 영혼의 영원한 안식(安息)을 위해서라도 우선 내 마음속 굴레로부터 먼저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글을 읽으려, 잠시 내려두었던 지난날의 안타까운 심정이 새삼 마음속으로 되살아 나고 있다.

<너의 빈자리>
  
버려진 아이처럼  
넌 그렇게 보일 듯 말 듯  
우리 곁을 머물렀었구나  
  
너의 뇌를 좀 먹던 종양腫瘍과
네 고통의 깊숙함을
우린 미처 알지 못했다  
  
생사의 기로岐路에서  
홀로 새벽을 열어가며
오르던 등굣길

푸른 별은
너의 심장 속을 흐르는  
푸른 피로 길을 내어  
애달픈 열일곱 삶의  
어둠 속으로
저물고 있는데  
  
복도 끝
네가 마련한 그 자리,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네 삶의 공간 속으로  
창백한 가을빛 처연凄然하다  
  
지금,
복도를 흐느적이는 그림자는
분명 너의 허상虛像일 거다  
바람에 일렁이는  
넉넉한 몸의 기운과 온기와
네 생명의 흔적들이  
기억의 그림자로만
남은 지금  
이제 푸른빛 햇살로 돋아  
넌, 이승의
마지막 빗장을 걸고 있구나  
  
네가 떠난 빈자리  
그토록 네가 머물고 싶던  
복도 끝, 너의 빈자리로  
웃고 떠들며
오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오히려 슬프다  

아득히 멀어져 간
네가 무척 그리운 거다

《참으로 심성(心性)이 고운 아이였습니다.
영자신문반을 함께 하며, 구김살 하나 없이 힘든 내색도 않고 모든 일에 묵묵히 앞장 서던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먼저 데려가심에는 분명 다른 의미가 있었겠지요. 그리 믿으려 애를 써보지만 아직은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맺은 인연이 있어 쉽게 내려지질 않습니다.
오늘, 복도 끝 그 아이가 책상을 밖으로 내어 혼자 공부하던 자리를 지나갑니다.
아이들이 무심코 웃고 떠들며 생각 없이 그 자리를 기웃댑니다. 가을빛이 여전히 고운데, 그래선지 내 마음은 더 서늘하게 아픕니다. (2014. 10. 30.)》

사실, 입원해 있던 시월 마지막 날 쓰려했었지만 그전부터 이어 쓰던 글이 있었고, 몸마저 덩달아 고단했던 터라 후일(後日) 미루어 두었던 글이었다. 마침 지난 목요일이 수능일이었고, 잊고 지냈던 아이가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아이가 세상을 달리했던 이태 후,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의 입학 동기들이 졸업하던 그해 2월에, 아이의 동생이 학교로 찾아와 눈시울이 붉힌 채로 동기들 졸업을 축하해 주던 모습을 우연히 목격(目擊)게 되었다. 몸이 약간 가냘프긴 했지만 형과 얼굴이 몹시 닮아, 몰래 지켜보고 있던 가슴이 몹시 아팠다. 졸업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을 비집고 아이가 교실 밖 복도로 책상을 내어놓고 혼자 공부하던 자리를 찾았는데, 볕이 잘 드는 그 자리는 따스한 햇빛이 스며들어 훈훈했지만, 마음속 아이의 빈자리는 여전히 허전하기만 했다. 


당시, 아이가 공부를 하면서 바라본 바깥세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모진 병마(病魔)와 싸우면서도, 밖으로 내색 한 번 않던 아이의 어른스러움에 오히려 가슴을 아파했던 기억이 다. 하지만, 칭찬을 받을 때마다 넉넉한 웃음으로 미소 짓던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면 덩달아 내 마음도 느긋해진다. 이젠 아이를 영영 놓아줄 때가 온 것이다.


늦은 가을, 아직은 가을바람 속에는 훈기(薰氣)여전하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잎새까지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겨울 댓바람에 날이 차가워지면 곧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 멀리 보이는 영일만으로 노을이 짙어지면서, 아이에 대한 기억도 까만 어둠 속으로 하나하나 멀어져 가, 마음속, 아이가 잠시 머물렀다  자리마저 어둠으로 채워지면서 또 하루가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아이가 정든 교정을 떠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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