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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Dec 29. 2022

쌤요, 까시 있니더

폭설과 함께 지난 몇 해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강추위가 서해안 일대와 중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일주일 가까이 엄습(掩襲)더니만 불과 이삼일 사이에 날이 완전히 풀려 예년의 기온을 되찾았다. 포항은 여전히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지만 바람 속 칼날 같은 냉기(冷氣)가 많이 무뎌져서인지, 베란다 너머 멀리 보이는 스페이스워크에는 많은 사람들이 촘촘히 늘어서서 가파른 계단 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오후 내내 고민을 되풀이하다가, 지난 며칠사이 다시 힘겹게 시작한 산책을 그만두는 게 아쉬워 일단 집을 나서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바닷가 산책로에는 방학을 맞은 학생들 모습이 간간 눈에 뜨인다. 옷차림새로 보아선 운동이나 산책을 하러 나온 학생들이 아니고, 멀리 외지로부터 소문으로만 듣던 스페이스워크를 직접 체험해 보려고 여행 온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부모님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거나,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틈으론 서로 맞잡은 손으로 깍지 낀 커플 심심찮게 보였다. 


이들의 티 없이 해맑은 표정을 보자 갑자기 생각이 깊어졌다. 요즘은 바닷가 상가(商街)의 골목 모퉁이에 서서 보란 듯이 담배 피우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생소한 풍경이 아니다. 바로 그저께만 하더라도 대구에서는,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아이들을 나무라다 40대 아주머니가 발길질을 당하고, 이들의 여자 친구가 생각 없이 이를 동영상으로 찍어 SNS에 올림으로써 전국적인 공분(公憤)을 산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즘 주위에서 흔히 보고 있는 모습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이들의 진정한 실체인가? 결국, 이 같은 논란의 중심에는 늘 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가정과 학교가 상호 보완을 해서 서로 철저히 책임을 지는 교육, 그것이 모든 청소년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


교사 초년병 시절의 이야기이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은 신입생 배치고사로 우열(優劣)을 가려 성적이 뛰어난 아이들부터 선별해 모아놓은, 속칭 특설반이었다. 반 학생들 가운데는, 배치고사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 초부터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아 온 K가 있었다. 게다가, K의 아버지는 나와는 동향(同鄕)으로, 당시 포항 유수(有數)의 명문 사립고에서 교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우수한 학생들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데 있어 도움 되는 말을 종종 청해 이를 귀담아듣고 있던 차였다.


하루는 K 선생님으로부터 퇴근 후에 잠시 만나보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입학 후 여러 차례 치른 시험에서 K가 배치고사와는 동떨어진 성적을 보이길래 속으로 고민이 깊어가던 시점이기도 했다. 여러 비교할 만한 성적 지표를 내세워 성적이 떨어진 학생들을 골라 강한 질책(叱責)과 함께 체벌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K의 한번 떨어진 성적은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때려준 격이니 상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K가 미술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은데 있었다. 어릴 적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이 남달라 프라모델 꾸미기와 그림 그리기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고픈 마음을 공공연히 주위 사람들에게 내비친다는 것이다. 물론, 평소 소망해 왔던 공군사관학교에 대한 꿈을 영영 접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적으로 본 눈앞의 현실은 엄혹(嚴酷)했고, 한번 마음에서 멀어진 공부는 그럴수록 한 발짝씩 더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박 선생님, 중이 제 머리 깎지 못한단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다리 하나 부러져도 좋으니, 패서라도 공부하도록 마음을 좀 돌려주이소."


사실 내심으론 바라던 바였다. 성격이 강직한 K는, 다행스럽게도 담임인 나와는 관계가 원만한 편이었고 K도 내 말엔 아주 고분고분했다. 나도 예의 바르고 남자다운 K가 썩 마음에 들었으므로, 정말 K가 공군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난 5월에는, K를 포함해서 공군사관학교 입교를 희망하는 학생들과 함께 대구 K2의 전투비행단 초청을 받아 곳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미술을 1학년부터 바로 시작하기에는 당시 교과성적이 너무 뛰어났고, 아직도 K의 여전한 꿈은 창공(蒼空)을 힘차게 나르는 '빨간 마후라'였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모의고사가 끝나고, 며칠 뒤 기다리던 성적표가 나왔을 때 K를 상담실로 불렀다. 명목(名目)매를 때려서 떨어진 성적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으나, 가혹(苛酷) 매질에 대해 용서를 구할 즈음엔 당장 매를 거두고 성심을 다해 K를 설득해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놓을 참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 생각은 빗나갔다. 풀 스윙으로 허벅지에 매를 때렸는데도 앙다문 K입에서는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두 대, 세 대... 스무 대. 교복 바지에서 피가 금방 스며 나올 것처럼 얼핏 보아도 양쪽 허벅지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머릿속으로 경고등이 반짝 켜졌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K와 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이젠 결코 돌이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착 가라앉은 내 이성(理性)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K는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자연계열을 택해 내 품을 벗어났다. 하지만 3학년까지 내리 나와 학년을 같이 했는데, 2학년이 끝나갈 즈음 본인의 희망대로 결국 미술을 전공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꾸고는, 1년간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서울 소재의 K대 미술교육과로 진학을 했다. K는 현재 나이가 50대 중반인데, 회화 쪽보다는 설치미술 분야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어, 화가이면서도 촉망받는 설치미술가로 국내 미술계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


K는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나에게 매를 맞고 간 날 저녁,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 K의 바지를 벗기면서,  K 선생님은 이런 말씀과 함께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곤 한다.


"아를 조져달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우짜노?"


사실, 당시 교직 2년 차에 불과했던 햇병아리에 교사에 불과했지만  K 선생님은 이후로도 변함없이 나를 든든하게 후원해 주셨다. 나의 교육 활동에 대해 무한(無限) 신뢰를 보내어 큰 용기를 주었고, 이후 신설된 사립고등학교로 옮겨 교장으로 퇴임하실 때까지 어디에서 임직(任職)을 하든 늘 마음속 멘토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해 주셨다.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때는 바야흐로 꽃이 지천(至賤)으로 만발한 5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중간고사를 눈앞에 두고 있어 교실마다 자습을 하든가, 진도가 늦은 반에선 선생님들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수업에 몰두하던 3교시, 시작종이 울리고 나서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마침 영어수업 진도도 끝이 난 데다, 학생들의 열화(熱火) 같은 요청에 못 이겨 좀체 하지 않던 자습을 막 허락하고 교실 창밖을 내다보려던 참이었다. 교실 옆 상담실에서 한차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귀에 익은 사회 담당 K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고 우당탕 하며 책걸상이 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상담실과 연결된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상담실 문이 덜컥 열리더니 덩치가 산 만한 녀석 하나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 아래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바로 그 뒤를 이어 K 선생님이 상담실을 뛰쳐나오는데, 한 손에는 매를 든 채였다. 뭐라 물어볼 겨를도 없이 휑하니 학생의 뒤를 쫓아가는데, 평상시와는 달리 걸음이 아주 날래보였다. 복도로 이어진 교실마다 복도 쪽 창문이 열리고, 마치 밤송이처럼 상고머리 학생들이 네댓 명씩 머리를 모아 창밖으로 내밀고 대체 뭔 일이냐고 묻는 듯 의뭉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K 선생님은 해군 학사장교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K 선생님을 K 제독이라고 별명 삼아 부르곤 했다. 얼굴부터 성품처럼 강직해 보이는 데다가, 비록 키는 땅딸막하지만 정말 해군 제독 모양 풍채가 좋은 분이었다. K 선생님이 계단을 내려가자, 나와 학생들은 거의 동시에 반대편 운동장 쪽으로 난 창문 가달려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핏 봐서는 달아난 학생이 2학년 조정부 학생처럼 보였는데, K 선생님은 바로 그 학생의 담임 선생님이기도 했다. 본관 아래쪽으로 내달렸으니, 곧 운동장 쪽으로 두 사람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이니나 다를까, 조정부 학생이 본관 밖으로 나오더니  곧장 운동장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중학교 건물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얼마 안 있어 K 선생님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보폭이 크지 않은 데다 슬리퍼를 신고 있어서인지 한 손에 매를 두르열심히 내달리고 있지만 발걸음이 영 팔놀림에 미치질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르려던 참이었던지 학생이 성큼성큼 내달리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를 맞춰, K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운동장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인마, 거기 서! 안 서!"


그 소리를 듣고는 뭔 일인가 싶어, 1층과 3층 창문 밖으로 밤송이 같은 머리를 하나, 둘 내밀기  시작했다. 행정실 직원들도 현관 밖으로 나와 걱정스러운 눈길로 이를 지켜보며 있었는데, 시험을 바로 앞에 두고 있던 때인지라, 운동장엔 매 시간 있던 체육 수업조차 없어서 오로지 두 사람만 그 큰 운동장을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부 학생은 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는 다시 앞을 보고 냅다 달렸다. K 선생님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던지, 양발로 공을 차듯 번갈아 내질러서 허공으로 슬리퍼를 벗어던지더니, 조금 전보다는 더 속도로 내어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달릴 때마다 걸음걸이가 뒤뚱거리는 것이 오히려 더 불안해 보였다.


앞서 달리던 학생이 달리기를 멈추고 빠른 걸음으로 전환해서 잠시 숨을 고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K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다시 뒤를 따랐다.


 "헉! 헉! 서라, 인마. 헉! 헉! 안 설래?"


중학교 건물 옆으로는 중고등학교가 함께 쓰는 체육관 건물이 있었고, 건물 뒤편을 돌아가면 바로 학교 뒷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바로 그 너머가 학생들이 선생님들 눈을 피해 담배를 피우는 야트막한 평지였다. 지금, 조정부 학생이  선생님들이 드나들고 있을 지도 모를 교문을 피해 달아나고 있는 곳이 바로 그쪽이었다. 학생이 체육관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K 선생님도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제야 걱정이 되던지 상황을 파악한 몇몇 선생님이 두 사람이 사라진 쪽으로 서둘러 뒤를  따랐다.


K 선생님이 다시 운동장 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채 5분도 되지않아서였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실내화를 찾아 신고 계단 복도를 올라오는 선생님은, 생각과는 달리 약간의 웃음기를 살짝 입에 머금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복도에 선 채 자초지종을 물었다.


"글쎄, 박 선생도 알다시피 절마가 조정부 아인가베. 교육부 지침에 따라 과목 평균이 40점은 넘어야 진급이 되는데, 운동부가 평소에 어데 공부를 하기는 하나.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 야간 자율학습을 안 시켰나. 형산강에서 조정 훈련을 마치고, 저녁 때 들어와서 공부하랬더니 이틀간은 알아서 잘하데. 아가 순둥이라 말도 잘 듣고. 그런데, 그저께하고 어제는 자율학습하다가 중간에 선배들 하고 어울리가 도망을 안 가뿌맀나. 그래서 오늘 아침에, '니 잘 못했제? 몇 대 맞을래?' 그러니까 '열 대 맞겠심더.' 그러더라고. 그래서 힘껏 때렸는데, 다섯 대 맞고나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양쪽  목을  움켜쥐면서, '더 이상 못 맞겠심더!' 안 카나. 하기사 군대 있을 때 병사들 조지듯이 때렸으니 지도 아프긴 많이 아팠을 끼라. 그랬더니 지가 앉았던 책상을 엎어버리고 토끼 뿌리데. 허! 허!"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져서 하던 말을 계속해 달라고 재촉을 했다.


"인마가 운동장을 달리다가 중간에 잠시 멈췄다 서곤 하는 것이 '나 잡아 봐라!'고 약 올리는 것 같아 미치겠더라고. 그래서 실내화고 뭐고 다 내던지고 정신없이 뒤를 쫓다 보니 체육관 뒤 공터가 나오는 기라. 거기서 글마가 갑자기 멈춰 서서 딱 뒤돌아보는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더라고. 보는 사람 하나 없는 인적 드문 곳이니 이제 니캉 내캉 견장 떼고 한 판 붙자 이런 뜻 아니겠냐고. 그래서 살짝 쫄아 있는데, 글마가 글쎄 뭐라 캤는지 아나?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가  있는 맨발 아래쪽을 가리키더니, '쌤요, 발 밑에 까시 있니더. 조심하이소!'라 안 카나. 글마 말을 따라 발아래를 보니 밤까시에다 깨진 유리 조각이 듬성듬성 보이데. 그 순간, 갑자기 글마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눈물이 막 날라카데. 그래서 내가, '그래, 일마야. 도망은 와 가노? 언제 올래?' 이래 물었지. 그 카이, '주말까지 쉬다가 시험 치는 날 올게요.' 그러데. 그래서 그러라고 캤지. 다만 사고만 치지 말고."


생각지도 못했던 결말에, 함께 듣고 있던 주변 선생님들까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럼, 그렇지! 평소 예절 교육을 강조하는 학교 운동부의 철저한 예절 교육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게다가 2년 가까이 곁에서 보아 온 그 순둥이 조정부 학생이 선을 넘는 행동을 것이라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한바탕 소란이 있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휩쓸고 간  이내 안온해진 세상 풍경처럼, 다시 평화로움을 되찾은 교정 위로는  따스한 5월 햇살이 사뿐사뿐 소리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옛날 아이들과 요즘 아이들은 어떤 점이 다른가? 그리고 요즘 부모들과 선생님은 또 어떻게 달라져 있는가? 결국 교육이란, 학생과 가정 그리고 학교가 중심이 돼서 서로 머리를 맞댄 채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힘과 지혜를 모아 함께 풀어야 할 숙제와 다름 아닌 것이다. 멀리 하늘 위로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것이 있어 아래쪽을 쫓다 보니, 길게 이어지는 연실이 보이고 사람들을 피해 가며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 하는 젊은 아버지가 보인다. 그 옆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결국, 이 아이도 연실로 이어진 연처럼 언젠가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를 것이다. 그러자면, 몰아치는 세찬 바람 속에서 누군가는 이 아이를 지탱해주는 연실이 되고, 또 누군가는 이 아이가 하늘 높이 능숙히 날아오를 수 있도록 연줄을 조종하는 역할에 기꺼이 나서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쉽사리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한 시간을 예상하고 나선 산책길이 벌써 두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다. 거의 반년 만에 올라, 스페이스워크에서 바라본 서쪽하늘의 노을이 오늘은 정말 곱기도 하다.


오후 5시, 스페이스워크 폐장 무렵의 영일만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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