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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r 02. 2023

월포 가는 길

월포해수욕장은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리에 있는 자그마한 해수욕장이다. 야트막한 해구(海丘)를 굽이굽이 돌아 닿아있 인근의 칠포해수욕장과는 달리, 모래사장을 벗어나 바다 안 쪽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수심(水深)이 겨우 허리춤에 이를 만큼 얕아,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들이 안심하고 해수욕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월포해수욕장보다는 좀 더 널리 알려진 흥해읍 칠포리의 칠포해수욕장은 모래톱에서 발을 몇 걸음만 안쪽으로 내딛어도 이내 가슴팍까지 바닷물이 차오를 만큼 수심도 깊고 파도가 심한 곳인데, 넓고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젊은이들이 해수욕과 더불어 일광욕을 즐기면서 며칠씩 머물며 캠핑하기에 알맞다. 또한 늦여름 밤, 재즈마니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보컬리스트들이 참가하여, 3일간에 걸쳐 열띤 공연을 벌이는 재즈페스티벌 이름난 곳이기도 다. 월포해수욕장과 서로 인접한 곳에 있고 피서철이면 더 많은 피서객이 몰리는 곳이긴 해도, 여전히 낯설면서도 좀처럼 정감이 가지 않는 이유는 달리 지난 시절을 추억할 만한 소중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월포해수욕장이 있는 월포리는, 청하면과 더불어 우선 지역 이름부터가 너무나 곱고 예쁘다. 달이 뜬 포구(浦口),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라. 선뜻, 한 폭의 유려(流麗)한 동양화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는가. 월포리에 대한 나의 외사랑은 곱디고운 동네 이름과 함께 포항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바로 시작되었다.


1985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긴 했지만 주말만 쉬고 바로 이어진 보충수업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순, 소리 소문도 없이 대구에서 친척들이 버스를 대절(貸切)하여 단체로 월포리로 피서를 왔다. 부모님을 비롯해서 친척들이 일주일 간 머문 곳은 부산민박이란 곳으로, 안채와 사랑채에 방이 대여섯 개가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다. 대문을 열면 아궁이에 놓인 커다란 가마솥부터 우선 눈에 띄었는데, 여름철 동해 연안에 형성되는 멸치어장에서 그날그날 잡아 온 멸치를 삶아 덕장에 말리기 위한 것이었다.


보충수업은 보통 오전수업 만으로 마무리되었으므로, 오후 자율학습 당번을 서지 않는 날이면 사촌형이 자신의 차로 나를 데리러 학교로 찾아왔다. 월포에서 오후 한나절을 놀다가 민박집에서 밤을 새우고는 다음날 다시 학교로 출근하는 일이 되풀이되곤 했다. 그때 처음, 월포리 일출(日出)을 보면서 넋을 잃기도 했지만, 정작 월포에 고스란히 마음을 뺏긴 것은 한 밤중에 바다 위로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황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보름달이 수평선 너머로 잔잔한 노을빛 파장을 일으키며 넘실대고 있는 밤바다를 한번 상상해 보라. 밤늦도록 이어지던 여름바다의 열기가 깊은 밤 속으로 서서히 잦아들 즈음, 여린 풀벌레 소리조차 들릴 만큼 적막강산인 가운데 온 사방은 갑자기 먹물로 지운 듯 캄캄하다. 까만 하늘에서 보석을 박아놓은 듯 샛별이 잠시 가물거리나 싶더니, 어디선가 새벽닭 울음이 들리고 슬그머니 밝아오는 여명(黎明)과 함께 어촌마을은 짧은 여름밤의 단잠에서 단박에 깨어나곤 했다.


어느 날인가, 보충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를 바라보니 민박집 가까운 외진 곳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었다. 민박집 할배 말에 따르자면 새벽에 물질을 나간 배가 가두리를 쳐 둔 멸치잡이 그물을 이날 오후에 뭍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한 손이라도 거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바닷가에 이르니, 마치 맷돌처럼 생긴 지렛대의 손잡이를 잡고 돌아가며 양쪽으로 힘을 모아 그물을 당기는데, 팽팽하게 당겨진 그물 위로는 갈매기 떼가 몰려들고, 얼른 보기에도 은빛의 잔멸치들이 그물 속을 오글거리며 퍼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물 사이에 끼어 함께 뭍으로 노를 저어 온 배 안으로 마을 주민들이 멸치를 사발 채 퍼담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물은 찢어질 듯 풍어(豊漁)였다. 에 올라선 선주(船主)가 그물을 쌍끌이 하는데 보탠 피서객들에게 마음껏 퍼가라는 언질을 주자, 서둘러 가져 온 코펠에다 저마다 멸치를 가득 담고 함박웃음을 띤 채 자신의 민박집이나 텐트로 돌아갔다.


민박집 할매가 멸치 그물 속에 딸려 온 오징어를 가자미와 쥐치 등 잡어와 함께 눈치껏 따로 챙겨 주었기에, 그날은 멸치회를 비롯해 잡어를 물회감으로 만들어 여름바다의 진미(珍味)를 마음컷 즐길 수 있었다. 그해 이후, 민박집 할배가 돌아가시고 월포리의 민가를 재정비할 때까지 근 10여 년 간, 부산민박은 거의 우리 집안의 여름별장이 되다시피 했다. 물론, 굳이 여름철이 아니어도 나는 수시로 부산민박을 드나들었고 많은 추억이 쌓인 만큼 월포리에 대한 랑도 더욱 깊어졌다.


청하면과 월포리를 가르는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내륙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청하면 소재지 가까운 곳에 기청산 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기청산 식물원은 사설(私設) 식물원이긴 하지만 식수(植樹)되어 있는 수종(樹種)이 2,500여 종에 이를 만큼 다채롭고, 온갖 야생화나 자생식물, 관상수(觀賞樹)와 여러 희귀 식물이 자연스럽게 섭생(攝生)이 가능하도록 습지(濕地)를 비롯한 다양한 생육(生育)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 각종 식물은 물론이고 갖가지 조류나 숲 속 동물들도 간간이 조우(遭遇)할 수 있다. 더욱이 경사가 없는 평지에 식물원이 조성되어 있고, 전망대를 비롯한 관람시설과 전문 교육관이 들어서 있어 노약자나 어린이, 가족 단위로 관람하기가 용이하다. 게다가, 식물원 옆 솔밭에 자리 잡은 청하중학교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원(田園) 학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곳인데, 이곳을 단 한 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이름에 걸맞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학교라고 마땅히 생각을 하게 된다.


월포리와 인연을 맺고 나서 몇 해가 지난 후 처음으로 지인들과 함께 기청산 식물원을 방문했다. 마침 그해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시간적으로 여유가 던 때였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식물원 입구에 걸쇠가 걸려 있어 차에서 내려 확인을 해보니 상중(喪中)임을 알리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멀리서 온 친구들이 있어 선뜻 돌아서지 못하고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는데, 안쪽에서 기척이 들리면서 상복을 단아(端雅)하게 입은, 상주(喪主)의 자부(子婦)로 보이는 삼십 대의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잠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큰 망설임 없이 우리 일행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입구 쪽 사무실인 곳으로 기억되는데, 금방 내실에서 약간의 다과와 함께 한방차를 차려왔다. 반바지를 입고 있는 등 일행의 옷차림새로 보아 문상객이 아님이 분명했겠지만, 찾아온 손님을 바로 내치지 않고 입구 쪽 식물원까지 안내를 해서, 잠깐이긴 하지만 식물원 내부를 잠시 둘러보도록 하여 공연한 헛걸음이 되지 않도록 정중하게 상중의 예를 갖추었다. 사소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집안의 품위였고, 인간적 도리에 대해 절로 숙연함을 갖게 할 만큼 슬픔을 넘어선 교양의 극치(極致)를 보여 주었다. 당연히 내겐, 월포리를 두고 외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 봄을 앞둔 어느 주말, 혼자 월포리를 찾았다가 마음 가는 대로 적어 둔 글이 있어 아래에 옮긴다.


        《 월포 가는 길》

달은 저 멀리 있었다
은빛 물살 밀어내며
멸치 떼 술렁이는 바다로
까마득히 멀어지는 배
푸른 새벽별 맞닿을 즈음
끼룩, 긴 갈매기 울음 들렸다

위태로이 버티어 선
산자락 갈대숲으로
서걱이며 메마른 바람
모질게 훑고 간 자리로
달빛은 아무 일 없는 듯
몰래 스며들었다

저 멀리 포구의 불빛, 하나 둘
수면 위로 이지러지고
살아 있는 모든 기척들,
낯선 발자국 소리에 놀라
소스라치듯 사방으로 흩어진다

날이 풀리자 생기를 더하는
길섶으로
겨우내 여미었던 온기가
물아지랑이로 피어오르면
저 멀리 월포리 검붉은 바다엔
새 날 새 아침, 그새 숨이 가쁘다

나지막이 몸 웅크리고
멸치 떼 쫓아 점점이
비상飛上 하는 갈매기와
그 너머에서 물질하는
두 척의 어선

안간힘 쓰며 솟는 햇살에
산란散亂 하며 물안개 흩어지면
월포리 익숙한 아침 풍경
바로 눈앞에 있다

분주한 일상 속으로
어김없이 밝아오는 새 날,
월포로 가는 길은
행장行裝 짊어진 나그네마저
사진 속 풍경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젠, 월포리를 찾을 일이 좀처럼 없다. 민박집이 있던 곳은 이제 그 위치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구획(區劃) 정리가 되어 새로운 길이 나고 그 주변으로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다. 마치 머릿속 기억을 말끔히 밀어낸 것처럼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뒷맛이 개운하질 않다. 하지만 오늘처럼 별 이지러짐 없는 달이 바다 위를 잔잔한 노을빛으로 물들이면, 난 영락없는 서른 살 등 푸른 청년이 되어 월포리 먼바다 깊은 곳을 하염없이 유영(游泳)을 한다. 마치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은빛 멸치와 같이.


어쩌면 내일 아침 해는 월포리에서 맞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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