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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r 16. 2023

할미꽃이 다시 피던 날

성호, 성진 형제 이야기 2

해마다 봄이 오면 고향 마을 뒷산에는 할미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메마른 풀잎 사이로 슬그머니 몸을 내밀고 있는 할미꽃이 좋았다. 머리에 이고 있는 꽃이 무거워 꽃대를 땅아래로 수그린 할미꽃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슬퍼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뒷동산 비탈의 평평한 바위 위에다 몸을 뉘고 푸른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을 보곤 했다. 어떤 날은 눈 속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귓불을 간질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무덤가에서 주워온 사금파리 조각으로 바위 위에다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곤 했다. 부질없기는,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네모나 세모, 이리저리 마구 그어놓은 빗금의 흔적들이, 이지러진 마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성호 형이나 성진이 형이 작스럽게 감나무집을 떠나고 나서, 홀로 남은 외톨이 신세되고 난 후로는 흔히 있던 일이었다.


어느 날인가, 마을 어귀로부터 집으로 이어진 메마른 길로 희멀건 먼지가 일면서,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먼지 속을 뚫고 힘겹게 언덕 위로 올라섰다. 아침부터 대추나무 가지에 내려앉은 까치가 성가실 만큼 울어대더니, 아버지로부터 기다리던 소식이 온 것이 틀림없었다.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방금 학교에서 돌아온 고모가 편지를 빼앗듯 받아 들고는 쪼르르 할머니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전역일이 멀지 않았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부턴 어머니가 부엌이나 뒤란에 숨어서 나를 품속에 안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어 기뻤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조금은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편지 온 사실을 알리려고 서둘러 안방을 나서니, 6월의 뙤약볕 아래, 사랑채 주변에다 심어놓은 사루비아 꽃이 여기저기 빨간색으로 만발해 있었다. 편지를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새 잊어버리고, 고모와 함께 사루비아 꽃을 따서 잎에다 물고 달다란 꿀물을 빨아먹느라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세월은 이처럼 하루하루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늦봄에 성호 형과 성진이 형이 감나무집으로 돌아온 후로는, 뭔가 모를 울타리가 우리들 사이에 가로놓인 느낌이었다. 평소처럼, 이들 형제가 우리 집으로 놀러 와서 함께 밥을 먹거나, 댓잎을 길게 이어 만든 빗자루 잠자리 채집 앞 연못가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자주 어울리기는 했으나 이전처럼 썩 재미있지는 않았다. 여름이 훌쩍 지나고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가 검붉은 빛을 띨 무렵, 감나무집 나뭇가지는, 까치발을 하고 손을 높이 들면 제자리에 선 채로 닿을 만큼 감의 무게에 못 이겨 힘없이 아래로 축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 기가 죽은 채로 늘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성호 형과 성진이 형을 보는 듯했다.


늦가을이 되자 느닷없이 고향 마을을 떠나 건 우리 집이었다. 아버지가 고모부 댁이 있는 대구를 몇 달 새 정신없이 오가는가 싶더니,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새벽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세간살이는 빈집에 그대로 내버려 두다시피 하고 몸만 빠져나가는 이사길이었다. 전날, 성호 형이 미리 점찍어 둔 뒷산 비탈의 고욤나무에서 함께 고욤을 따먹자던 약속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뭐라 떼를 쓰고는 싶었지만, 할머니를 비롯해서 모든 식구들이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분위기에 짓눌려 그저 눈치만 보았을 뿐이었다. 운전석 옆 엔진 룸 위에다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니 싸늘했던 몸에 온기가 돌면서 금세 몸이 훈훈해졌지만, 아직 동이 틀려면 멀었는지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신작로 위를 환하게 비추며 거친 엔진소리를 토해내자, 마을 어딘가로부터 사람들의 새벽잠을 깨우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듯 서둘러 대구로 이사를 온 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철이 들기 전까지 감나무집 형제들을 따로 만난 적이 있는지는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 중학생이 되어서 아버지를 따라 고향 마을로 벌초를 갔을 때, 감나무집 할머니로부터 전해 듣는 소식이 다였다. 고향을 떠나고 나서, 처음엔 외가가 있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다. 아주머니어려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아저씨와 연애를 하던 중에 성호 형을 덜컥 임신하고 말았다는 것인데, 아주머니 친정에서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해 주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아주머니는 쫓기듯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와 멋도 모른 채 감나무집에서 수년간을 시집살이를 했던 것이고, 아저씨와 오랜 불화를 겪는 중에 힘겹게 지켜오던 가정마저 파탄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때 아저씨와 함께 살았던 왜관에서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서울 외가가 성호 형제를 받아 준 것은 아주머니에게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성호 형이 군에서 복무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그해 벌초를 갔을 때 감나무집 할머니로부터 성호 형이 우리 집 전화번호를 적어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기 저편에서, 뭔가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혹시, 상진 씨 아니세요?"

"예, 맞습니다만 누구세요?"

"혹시, 성호라고 제 이름이 기억나시는지요?"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음성의 주인공은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오매불망하던 바로 그 성호 형이 틀림없었다.


"그럼요! 성호 형. 기억이 나고 말고요. 그래, 지금 형이 전화 걸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시골 할머니를 뵙고 올라가는 길에 아줌마와 할머니를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가려고요. 방금 북부정류장에 내렸어요."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머니의 눈가는 벌써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할머니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옆에서 연신 혀를 차고 계셨고.


택시를 타고 집 가까운 곳으로 오라고 일러주고는, 성호형을 맞으러 바로 큰길로 이어진 골목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따라 군복 입은 군인들이 얼마나 자주 눈앞을 오고 가는지! 이 사람, 저 사람 모두가 하나같이 성호 형처럼 보였다. 실제 어느 군인 한 사람은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서 확인한 명찰에는 전혀 엉뚱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30분이 훌쩍 지나도 형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마음만 급해지고 훌쩍 조바심이 커졌다. 그러다 문득, 골목길의 반대쪽에서 거슬러 올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바로 맞은쪽 골목길로 몸을 돌리려는데,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군인 한 사람이 보였다. 성호 형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가 어깨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속에서 시뻘건 불덩어리 하나가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도 너무나 반갑게 형을 맞아 주었다. 특히 어머니는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양어깨의 잔떨림이 눈에 띄더니, 성호 형이 방 안으로 들어와 할머니에게 넙죽 절을 하자 크게 어깨가 한번 들썩이고 나선 급기야 눈물까지 보이고야 말았다. 어머니가 무엇보다 궁금한 건, 당시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아주머니의 안부였다. 아주머니는 아직도 대구와 가까운 왜관에 살고 있는데, 미군부대에서 옆길로 빠져나오는 군수품을 취급하면서 한국 사람을 상대로 구제의류나 화장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당장 어머니아주머니 사이에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말 가운데 반은 울음이 섞여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전하는 위로의 말이었다. 차제에, 다가오는 주말을 맞아 아주머니가 대구로 할머니를 뵈러 오겠다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길고 길었던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예정에도 없던 불시방문이어서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이고 성호 형을 떠나보낸 게 못내 아쉬웠던지, 이번 주말 아주머니가 방문할 때는 미리부터 단단히 준비를 할 요량으로 보였다.


이날 저녁, 어머니와 나는 의논 끝에 고향 마을로 기별을 해서 감나무집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시도록 일을 꾸몄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앞 못 보는 할머니의 말 상대가 되어주려 어떨 땐 일주일씩 우리 집에 머물다 가시곤 했었으므로, 이번 주 금요일도 틀림없이 다녀가시겠다는 약속을 미리 받아두었다.


이미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대합실은 대형난로의 온기로 훈훈했지만, 마음은 벌써 조급함이 앞서 쌀쌀한 바깥날씨만큼 메마르게 갈라지고 있었다. 감나무집 할머니는 어제부터 안방에 머물며 할머니의 말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지난밤도 밤늦도록 두 분이 두런두런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터였다. 아주머니가 아침 전화로 자신의 인상착의를 미리 일러주었기에, 막 도착한 시외버스에서 내려오는 아주머니를 분간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기억 속의 젊은 아주머니 못지않게 아주머니는 여전히 얼굴이 곱고 세련되어 보였지만, 아담한 체구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아마 아주머니가 이미 흘려보낸 세월보다는, 내가 살아오면서 맞이한 세월이 나를 아주머니보다 훨씬 웃자라도록 이끌어 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양쪽 팔을 활짝 벌려 수줍게 인사를 하는 나를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 어린 시절, 처음 본 나를 안아 주었을 때의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에서 되살아났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체취나 향기의 기억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마당 건너 방의 여닫이 문을 꼭 닫아 둔 것은 미리부터 계획에 있던 일이었다. 아주머니가 들고 온 선물 보따리를 들고 방문 앞에서 크게 헛기침을 하자 우선 어머니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마루로 뛰쳐나왔다. 마루 건너 깊숙한 곳에는 오랜만에 오신 감나무집 할머니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역시 부둥켜안고 훌쩍이고 있는 어머니에 가려 방안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내가 모른 척하고 아주머니를 먼저 방 안으로 올라서게 했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릴 요량으로 안방을 쓱 훑어보던 아주머니의 탄식이 쏟아지며 방바닥에 주저앉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와 반대로, 감나무집 할머니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쓰러지듯 앉아 있은 아주머니에게로 달려가 양 어깨를 부여잡고는 한 손으로 아주머니의 등을 크게 어루만지며 흐느껴 울었다.


"아이고, 야야! 니가 대체 여기는 우짠 일로 왔노? 말 좀 해 봐라. 도대체 무슨 일이고!"

"어머님, 어머님이야 말로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전 아무런 소식도 받질 못했는데. 그리고 죄송스러워 어쩌죠? 어머님, 죄 많은 절 용서해 주세요."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도 흐르는 눈물을 출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잠시 마음을 추스르더니, 먼저 감나무집 할머니에게 큰 절을 올렸다. 아마도 오래전, 아이들을 서울 외가에 맡기려고 시골을 찾았던 날이 이들 고부간의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이다. 뒤를 이어 할머니에게 절을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선 아주머니 가져온 선물보따리를 풀면서 미리 해를 구했다.


"이 공단은 큰 어머님 지어 드리려고 떠 온 옷감인데, 먼저 어머님에게 드려야 할 것 같으니 해해 주세요. 여태껏 어머님에게 옷 한 벌 제대로 지어드리지 못한 죄 많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동생 줄려고 가져온 이 영양제도."


무슨 말이 필요하고, 무슨 섭섭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쏟아진 눈물로 화장이 지워져 여기저기 얼룩아주머니의 얼굴이 이 세상 그 누구의 얼굴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감나무집 할머니는 다시 잡은 며느리의 손을 좀처럼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때는 옳거 하며 자신의 무릎을 치다가, 또 다른 삶의 고빗길과 마주쳐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맞잡은 손등을 어루만지며 안타까워했다. 원래대로라면, 저녁을 먹고 나서 막차를 타고 왜관으로 돌아가려 했던 아주머니는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한사코 만류하는 어머니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서였던지, 하룻밤을 함께 지내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밤을 꼬박 새워가며 할머니들과 어울려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성호 형과 성진이 형, 그리고 아주머니와 우리 가족은 그 이후로도 종종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해 후, 위장에 악성 종양이 생긴 아주머니는 서너 해를 더 버티다가 그만 유명을 달리하셨다. 할머니가 세상을 버리시고 한참을 더 고향 마을을 지키던 감나무집 할머니는 아흔넷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손자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잠자듯 편히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감나무집에는 할머니 사후로 낯선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 성호 형이 동네 사람에게 집을 넘기지 않고 밑둥치부터 썩어가고 있는 감나무도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송두리째 지워지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대구로 이사 와서 50년 가까이 살았던 원대동 집은 10여 년 전 부모님이 칠곡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한동안 폐가로 버려졌다가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었다. 세상에는 지워지는 것과 지워지지 않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TV를 통해 오랜만에 할미꽃을 보았다. 옛날 고향 마을 뒷 뒷동산에서 보았던 기억 속의 할미꽃은, 속이 더 검붉으면서 겉은 실 같은 잔털이 보송보송한 보랏빛이 감도는 꽃이었다. 그 어떤 봄꽃보다도 예쁜 꽃이지만 할미꽃을 보면 여전히 서글프고 애처로운 느낌부터 드는 것을 마음속에서 감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날, 우연찮게 이뤄졌던 눈물겨운 재회의 순간은 두고두고 우리들 가슴속에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그날 저녁,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고향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우리 집 방에서는, 두런두런 밤을 잊은 할머니들이 이런저런 사연 속에서 아름다운 할미꽃 두 송이로 피어났다.


대문 사진은 다음 이미지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글은 사실과 허구가, 가공의 인물과 함께 섞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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