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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l 23. 2024

라디오 시대

일요일 아침, KBS1에서 방영되는 'TV 진품명품'생전에 아버지가 즐겨보시 프로그램이다. 전문가의 감정을 받아보려고 의뢰한 고미술품이나 선인(先人) 쓰던 일상용품 주로 출품되지만, 용도나 용처(用處)짐작하기 힘든 진귀한 물건들이 소개되기도 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이유는 고미술품에 대한 소양이 깊어서가 아니라, 출품된 고미술품에 대한 지극히 즉물적(卽物的)이고도 세속적인 관심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정가가 매겨지기까지의 과정과 최종 결정된 감정가가 이전 기록을 깨트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 것이다. 전문가가 내리게 될 최종 감정가를 추정하면서 함께 시청 중이던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늘 대화의 중심에는 최고 감정가를 기록한 출품작었다.


예를 들어, 앞선 기록을 깨트리면서 방영을 이어 온 최고 감정가 Top 5에 관한 것들인데,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위는 추정 감정가가 9억인 '선무공신(宣武功臣) 권협 영정(影幀) 2점'이고, 4위는 추사 김정희의 서화(書畵)인 '불기심란'과  동일 액수로 감정된'열녀 서씨 포죽도', '조선경국전 초간본'이 있는데 최종 감정가가 각각 10억으로 매겨졌다. 3위는 '청자상감 모란문 장구'인데 추정 감정가가 12억에 이르고, 그 뒤를 잇는 2위는 조선후기 화원(畵員) 김희겸이 그린 '석천한유도'로써 15억으로 감정되었다. 1위는 추정 감정가가 물경 25억인데, 세계적으로 3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채색본'과 국보급 청자 매병인 '청자 음각 연화문 매병'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아예 감정가가 0원으로 감정가를 매기지 못한 출품작도 있었는데, 바로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이 찍혀 있는 유묵(遺墨) '경천(敬天)'이다. 진품으로 감정된 이 출품작은 감정위원 스스로 감정가를 매길 수 없다 하여 감정가를 0원으로 책정했는데, 아마도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숭고한 역사적 의미를 속물적인 판단으로 훼손하는 것이 망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출품작 가운데서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이전까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9억의 어마어마한 감정가를 기록한 2004년 4월 11일 자 '선무공신 권협 영정' 방영분, 두 달 뒤 12억으로 기록을 바로 깨트려 버'청자상감 모란문 장구'이다. 감정을 위해 소개되는 출품작들이 희소성이 있고, 방영될 때마다 앞선 기록들이 깨어지곤 했던 이 당시가 아마도 TV 진품명품 시청률이 가장 높았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출품작으로만 한정하자면 고미술품보다는 용처를 예측하기 힘든 일상용품 쪽에 더 관심이  컸었다. 고미술품에 비할 바 아니지만 TV를 시청하면서 골동품으로서의 현재적 가치를 추정해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던 것이다. 하지만, 방영 횟수가 거듭될수록 프로그램 진행방식이 다소 진부해지고 출품작들의 희소성도 덩달아 떨어졌다. 이제, 'TV 진품명품' 기다려진다거나 일부러 찾아보는 프로그램에서 한 걸음 씩 멀어졌고, 어느 때부턴 가는 머릿속에서도 까마득히 지워졌다.


오늘은 평상시와는 달리, 이른 시간을 택해 아파트 헬스장을 다녀왔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헬스장을 찾는 아파트 동민들이 많아져 이른 아침 시간대가 아니면 러닝 머신을 차지하기도 힘들어진 것이다. 기분 좋게 운동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거실에 켜 둔 TV에서 막 'TV 진품명품'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침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없었기에 얼른 땀만 씻고 나와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날  방송 내용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것은 1962년  금성사에서 제작해서 시장에 내놓은 진공관 라디오 A-504였다. 어릴 적 방 안 서랍장 위를 굴러 다녔던 기억 속 라디오 형태 그대로였다. 뒷면 칸막이 합판을 떼어내니 안테나 선이 한쪽으로 둘둘 말려 거치(据置)되어 있었는데,  '맞아, 당시 라디오 구조는 저랬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진행자의 말에 따르자면, 당시 국내 기술로는 성의껏 만든 최 라디오였지만 판매 실적이 신통찮았다고 한다. 금성사 신입 직원 월급의 3분의 1에 달할 만큼 고가의 가격이 매겨진 사치품에 다름 아니었으니, 널리 대중화되기까지 단단히 발목이 잡혔을 것이다. 이를 타개한 것이 바로 대통령령에 의한 정부시책이었다고 한다. 1959년에 겨우 30만 대를 넘어섰던 라디오는 1961년 후반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부의 적극적 시책에 힘입어 134만 대로 그 숫자가 크게 증가했는데, 폐업까지 고려했던 금성사의 전자사업 부문은 이로 말미암아 극적으로 회생(回生)했다고 전해진다.


진행자가 출연자들에게 제시한 문제는 바로 이 정부시책에 관한 것이었다. 퀴즈의 정답을 선다형으로 열거 여러 선택지 중에서 올바른 선택지를 답으로 제시한 출연자가 없었지만, 난 바로 정답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1960년대 초반 무렵이면, 고향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나의 어린 시절과 정확하게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눈앞으로는 기억력이 미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의 고향마을이 그려지고 있다. 명당(明堂)까지는 아니더라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우리 고향집은 마당 왼쪽과 본채 뒤편을 이웃으로 둔 외딴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앞으로는 그리 넓지 않은 전답(田畓)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실개천 건너편엔 예배당까지 있는 큰 마을이 터를 잡고 있었다.


가끔, 건너 마을 멀리에서 왕왕 울려대는 확성기 소리에 가까스로 마을 소식을 들을  있었으나, 라디오를 통해서 송출(送出)되는 나라 소식까지 세세하게 접할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오더니 사랑방 문간에다 소리통을 달고 길게 전선줄을 이어달았다. 그때까지 우리 마을에는 여전히 전깃불이 들어오진 않았으므로, 아마 신작로를 따라 매설한 전봇대의 전기를 문설주에다 끌어놓았을 것이다. 이미 전기가 들어와 있던 앞마을 공동 라디오로부터 이어지고 연결된 소리통을 통해 바로 그날로, 혁명 이후의 어수선했던 나라 소식이나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 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 미쓰'와 같은 대중가요 귀로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바야흐로, 우리 마을에도 라디오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물론 당시의 어린 나로서는, 소리통에서 들려오는 사람들 말소리가 신기한 한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했지만.


사랑채에는 '이문이'라 불리는 머슴이 살았는데, 왼쪽 눈 주위로 혹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어 이문이를 처음 사람들은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 하지만 난, 평소 마을 사람들이 부르듯 "이문아. 이문아."라 부르며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처럼 어디를 가든 그의 뒤를 쫓아다녔지만, 단 한 번도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보단, 한 번씩 나를 무등 태우고 소리통 가까이로 머리를 들이대곤 했는데, 그때마다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고 껄껄  소리 내어 웃는 것이 밉기도 했다. 그럴 때면, 평소에는 거의 감겨있다시피 한 그의 왼쪽 눈이 가늘게 뜨였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무척 슬퍼 보였다.


이문이를 추억해 낸 것을 끝으로, 지지직 유년 시절의 잡음 섞인 기억이 눈앞을 흐리더니 끝이 났다. 'TV 진품명품'도 이제 방송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는데, 과연 퀴즈의 정답은 내가 추측한 바 그대로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었다. 진공관 등 라디오 부품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되어 생각한 만큼 소리가 잡히진 않지만, 제품의 보관상태가 양호하여 감정가가 500만 원으로 측정되었는데, 제품명인 A-504에 착안(着眼)을 해서 추정가를 504만 원으로 적어낸 김구라의 아들 김그리가 최종 우승을 했다. 마침, 그가 해병대 입대를 앞둔 마지막 방송 출연이기도 해출연자들로부터 축하의 말이 쏟아진 훈훈한 순간이었다.


'시대'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기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을 말한다. 오늘 난, 'TV 진품명품'을 보면서 나와 아버지가 라디오 시대를 두고 구획(區劃) 되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지만, 글 속에서 라디오 시대를 먼저 맞은 것은 당연히 아버지였다. 어느 순간, 내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즐겨 듣게 된 후로는 라디오 시대를 공유한 적도 있었겠지만 분명 둘 사이에 시대적 간극(間隙)은 존재했었다.


결국, 라디오 시대가 저물면서 'TV 진품명품'을 한 자리에 함께  앉거나 누워서 볼 수 있, 이를테면 시대의 간극을 메워준 비디오의 시대가 도래(到來)했다. 아마, 비디오의 시대를 실감하는 강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차이가 진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이미 아버지 못지않게 비디오 시대를 어려움 없이 수용할 만큼 웃자라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후의 인터넷 시대에 이르러서, 라디오 시대와는 다르게 입장을 달리해서 구획의 정반대 편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잰걸음으로 쫒으려 해도 따르지 못할 만큼 이미 문명의 발전이 빛의 속도로 리 달아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뒤를 쫓지 못하셨다.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아버지가 떠나신 빈자리만 홀로 남아 공허하다. 당신과 함께 듣고 보던 시대가 영영 시간 속으로 저물고 만 것이다. TV속 A-504가 마지막까지 열과 빛을 태워가며 전해주려 했던 이야기들은 이미 꺼져버린 화면 속 잔상(殘像)으로 남아 안타까운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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