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진 Jul 24. 2024

오디오 시대

매주 화요일은 '한일 톱텐쇼'가 방송되는 날이다. 밤 10시부터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11월 말 방송을 시작한 '현역가왕'을 시발점으로 해서, '트롯 인 재팬'을 통해 선발된 일본 여가수들과 '현역 가왕' 톱 7이 한일전을 벌인 올 4월 시작된 '한일 가왕전'이 종방 되고 나서 편성된 일종의 갈라쇼 프로그램이다. '한일 톱텐쇼' 통해 양국 가수들은 상대 국가의 노래를 그 나라 언어 그대로 부르거나 자국 언어로 번안(飜案)해서 부르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의 찐 애청자 입장으로는 어느 쪽이든 그저 좋기만 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으로 시청이 이어지기까지는 포항의 딸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전유진의 영향이 컸다. 중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로 '포항 전국 해변가요제'에 우승을 해서 KBS 2의 '노래가 좋아'나 MBC의 '편애중계', TV 조선의 '미스 트롯 2' 등 영향력 있는 방송의 가요경연 프로그램으로 가수로서의 인지도를 넓히고 난 후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현역가왕'의 경연자로 참가를 해서 초대 현역 가왕이 되었다.


전유진이 '포항 전국 해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할 때 불렀던 '용두산 엘레지'는 노래도 노래지만, 사회자가 대상 수상자로 지목했을 때 시종 입은 다물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하던 전유진의 앳된 모습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후 대중 가수로 폭넓은 팬덤을 형성하고 성장을 하는 과정은 전유진이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부른 노래나 기존 가수의 커버곡 유튜브 조회수를 통해 잘 드러나 있는데, 전유진의 동영상 유튜브 총조회수가 물경 10억 뷰를 넘어섰다고 한다.


결국, 전유진에 대한 편애가 전유진이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램 시청으로 이어졌고 그녀의 '덕후'가 되었다. 덕후란 말은 일본어 '오타쿠(おたく)'에서 유래된 단어로 특정 분야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한국과 일본의 현역 가수들이 함께 어울려 경연하는 가요 프로그램에 몰입해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과연 진정한 덕후이며, 오타쿠라 말하지 아닐 수 다.


한일 톱텐쇼를 한 회도 거르지 않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한일 대중가요의 교류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번안하지 않은 일본 가요를 방송에서 생으로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가히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이었다. 이는 아마도, J- POP에 대한 K-POP이 갖는 우월감과 한류(韓流)의 확장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우리의 전통가요를 '뽕짝'이나 '왜색(倭色) 짙은 노래'라 부르며 스스로 폄하(貶下)했던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났음을 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7080 세대는 트로트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70년 대 이전 세대들이 즐겨 들어왔던 노래였기에, 이를 두고 이후 세대들이 뽕짝'이니, '왜색 짙은 노래'니 하면서 비하(卑下) 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발라드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외부로부터 유입이 되고 음악적 역량을 갖춘 대중 음악가와 기획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K-POP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함으로써, 연령대 별로, 선호하는 음악을 선택하여 듣는 시대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 고로, 우리  7080 세대는 한국 대중 음악사의 낀세대로, 음악적 장르를 이야기할 땐 늘 어정쩡한 스탠스에 머물러 있다. 70년대 전후에 청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쎄시봉 시대'라 칭하며, 당시 유행했던 청년문화에 진한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이전의 트로트는 낡고 진부(陳腐)하며, 이후 전개되는 음악적 장르는 이들에게 아직은 낯설고 귀에 익숙해지질 않았던 것이다.


8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각 가정마다 홈 오디오 세트를 들여놓는 일이 산야(山野) 들불 번지듯 유행했다. LP판을 트는 턴테이블과 녹음 기능이 있는 카세트 기기를 하나묶어 만든 전축이 바로 그것으로, 독수리표 전축이나 태광 에로이카와 같은 국산 전축과 인켈, 파이오니아, 파나소닉과 같은 일제 전축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음악적 다양성과 대중화가 이전보다 더욱 확보되고 확장되어 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무렵, 우리 집에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1986년 봄, 여든여섯의 나이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와 함께 쓰고 있던 안방과 세를 놓은 옆방을 터서 하나의 큰 방을 만들었다. 한 해 전부터 포항에서 근무를 해 왔기에, 새로 튼 안방은 부모님 두 분이 차지하게 되었다. 주말이면 이곳 본가로 올라와야 했으므로, 잠 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선 방을 트기 전 내벽을 양쪽 경계로 하여 옆으로 밀어서 열어젖히는 파티션을 만들었다.


그해 어느 주말, 집으로 돌아오니, 파티션으로 나뉘는 방 가운데에 포장도 미처 뜯지 않은 신상품 전축이 떡하니 자리 고 있었다. 새로 장만한 전축을 경계로 해서 주말마다 장롱이 있는 왼편 방은 부모님 방, 오른쪽 서랍장 위 TV가 놓인 방은 내 방으로 결정이 났다. 아버지는 전축이 들어간 장식장에다 이미 수십 장의 LP판과 원로 가수의 가요 전집, 최신가요 카세트를 갖춰놓았는데 대부분의 노래가 트로트 일색이었다. 아무리 새로 산 전축라지만 함께 듣고 감상하기에는 음악적 취향이 너무나 달랐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아버지는 종종 전축을 틀어놓곤 하셨는데 좁은 방이 중저음의 베이스 소리까지 감당하기에는 스피커의 출력이 너무나 컸었다.


결국, 파티션 너머에서 들리는 코골이로 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제야 TV의 볼륨을 낮추고 포항에선 볼 수 없는 AFKN의 'Saturday Night Live'시청하거나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수위 높은 외화를 몰래 감상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평소 싫어했던 트로트가 더욱 싫어지게 된 시기였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트로트에 젖어든 것은 임영웅이 1등을 한  '미스터 트롯 시즌 1'부터였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병원생활이 막 시작된 무렵과 거의 시기를 같이했다. 광명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교사로 힘들고 바쁜 와중에서도 기꺼이 아버지 병구완에 나서 주었다. 병상에서 홀로 고통스러울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어머니를 향한 죄스런 마음과 함께, 한편으론 동생이 이루 말할 수없이 고마운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미스터 트롯에 출연한 경연자들이 무명의 설움에서 벗어나려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필살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런 간절함이 마음에 닿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는 경연을 펼치고 있는 가수의 노래 속 가사 한 마디나 음정과 박자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들리는 게 없었다. 이처럼 노래에 감정을 이입시키며 들었었던 것이 언제 적이었는지 기억이 까마득했다. 30대에 요절(夭折)한 가수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나 '하얀 나비', 60대 초반에 장년의 나이로 유명(幽明)을 달리한 장현의 노래 '미련'이나 '나뭇잎', '나는 너를'을 들으면서 감정이 요동쳤었던 때와는 또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졌다. 후련했다. '이 나이에 노래를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다니!' 다시, 병상에서 홀로 병마와 맞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옛날, 아버지가 즐겨 듣고 부르시던 노래가 지금 내 마음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자주 들은 적은 없지만, 음치에 박치(拍癡)이기도 한 아버지가 부른 노래였지만, 그 노랫소리가 지금 내 귓전에 닿아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애지중지(愛之重之)했던 전축에서 흘러나왔던 아버지의 그 노래가!


칠곡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아버지의 전축은 수명(壽命)을 다하고 말았다. 오디오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사한 집으로 전축 들여놓을 일을 이후로도 생각조차 하신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아버지는 월요일이면 가요무대를, 일요일이 되면 전국노래자랑에다 채널을 고정하셨다. 세월이 변했어도, 경계 너머 다른 세상을 엿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와는 달리, 난 대중가요에 대한 수용성이 큰 편이다. 아마 그런 시대를 두루 거치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운 좋게도 잠시 낀세대에 머물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하나의 장르에만 매몰(埋沒)되었던 시기를 살아야만 했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가요를 포함한 모든 대중문화나 문명의 발전 속도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세대를 겪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난 또 다른 나 만의 오디오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 눈앞에서 전유진이 부르는 노래가 여전히 듣기에 편하고 사랑스럽다.


작가의 이전글 라디오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