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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l 27. 2024

마지막 틈새

미국의 단편 소설가 오 헨리가 쓴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헨리는 뉴욕을 배경으로, 그 당시 서민들의 삶과 애환에 천착(穿鑿)면서 인간 심리와 사회 이슈의 틈새를 재치 있게 파고들고 있는데, 특히 '마지막 잎새'는 작품 속의 여러 장치를 통해 희망과 사랑, 희생의 중요한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들로부터 깊은 감동을 끌어낸다.


그래서, 오늘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제목이 '마지막 틈새'이다. 글의 제목이 살짝 비틀려 있느니 만큼, 글의 지향점이 다르고 글 속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도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서, 일상적이면서 하찮은 것이다.


포항을 대표하는 공원인 환호공원은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 다양한 공원 시설을 활용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여가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공원 곳곳에 구비되어 있는 운동 기구와 공원 샛길을 요리조리 맛깔나게 이어놓은 등산로를 따라 산책을 즐기면서 건강을 돌볼 수 있는 다목적 공원이기도 하다.


 영일대 해수욕장이 끝나는 해안 마을 뒤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이 공원은 포항 시립 미술관과 간이 동물원, 어린이 도서관, 야외 조각 공원, 어린이 모험 놀이터, 전통 놀이공원, 바닥 분수와 암벽 분수, 전망대와 야외 공연장을 두루 갖추고 있어,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은 물론 체험활동을 위해서 유치원을 비롯한 초중고 학생들도 즐겨 찾고 다. 최근 들어 환호공원의 명성한층  높아진 데는 공원 한쪽 모퉁이 설치되어 있는 스페이스워크의 인기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공원 주위에 살고 있는 동민(洞民)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의 발길을 가장 많이 모으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체육시설과 어린이 모험 놀이터일 것이다. 공원을 크게 반으로 갈라, 좌측편의 서로 이웃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두 시설은, 한편으론 세대를 아우르는 포용(包容)과 화합의 장소이기도 다. 즉, 삶의 뒤안길을 보다 아름답게 마무리하고픈 황혼 녘의 노인과, 이제 막 인생의 도도(滔滔)한 바닷길에 한쪽 발을 담근 어린 영혼이 함께 어울려 있는 곳이란 뜻이다.


지금 난 공중 걷기 운동기구 위에서 양발을 힘차게 구르며 가위 차기를 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공원 체육시설의 애호가가 된 지 2년을 넘어설 만큼 운동요령이 맞춤옷처럼 몸에 익숙해졌고 지구력 또한 눈에 띌 만큼 달라졌다. 허리 아래의 다리 놀림은 분주하지만 눈길은 여유롭게 건너편의 어린이 놀이터를 훑고 있는 것이다. 마침, 한 아이가 원통형 미끄럼틀 속을,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양발을 바둥이며 안간힘을 다해 올라가려 하고 있다. 미끄럼틀의 비탈진 경사가 무색할 만큼 체구가 직한 것이 구멍의 좁은 틈새로 남은 하반신을 억지로라도 구겨 넣으려는 모양새다. 왜, 아이들은 틈만 면 저렇듯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그 순간, 구멍 난 틈새 사이 함께 헤집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어린 영혼 하나가 리릭 스쳐갔다.


시골 촌마을과는 달리, 양팔을 벌리면 손끝이 닿을 것 같은 좁다란 골목길은 그 너머로 마당을 내려다볼 수 없을 만큼 높은 담이 둘러싸인 집들로 이어져 있었다. 도시 외곽의 변두리이긴 해도 지은 지 오래된 집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제각각 마당만큼은 넉넉했다. 집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하나의 담으로 경계가 나눠진 것처럼 보이지만, 뒤를 이어 집을 지을 때는 새로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담과 담 사이에는 어린아이 하나쯤 쉽게 들어갈 만큼 넉넉한 공간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담너머로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에다 무화과나 석류나무를 심은 화단이 따로 있을 정도로 마당 넓은 집이 적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무른 흙으로 흙놀이나 땅따먹기를 하고, 마당이 너른 집에서는 구슬치기와 고무줄놀이를 했다. 늘 해오던 놀이라 싫증이 나면 아이들은 좀 더 무모한 놀이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럴 땐 벌칙이 세지는 숨바꼭질이나 이병놀이를 했다.


옷이 더러워지고 해져서 찢어지는 것조차 시하고 담 위로 기어올라 담벼락 사이로 몸을 감추는 아이들이 있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담벼락 틈새로 내다 버린 연탄재에 얼굴이 숯검댕이가 된 채 홀연히 나타난 '못 찾겠다 꾀꼬리'를 보고 저마다 낄낄거리긴 했지만, 아이들은 그 배포가 못내 부럽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섞여있을 땐 감히 담벼락 사이숨어들 생각을 못했지만, 난 집에서는 달랐다.


어릴 적 우리 집 작은 방은 바깥창을 한쪽 벽으로 내서 담을 대신 했는데, 작은방 옆으로 이웃집이 들어서면서 마당이 있는 본채까지 길게 담을 쌓았다. 그날로 당장, 담에 막힌 작은방 안으로는 햇빛 한 올 스며들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그 당시엔 조망권이란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그저, 창너머로부터 담까지 팔꿈치 길이로 기다랗게 새로 생겨공간을, 우리 밖에 쓸 수 없는 우리 땅라고 스스로 위안삼을 도리 밖에 없었다.


결국, 작은 방은 거의 하루 종일 불을 켜놓아야 했다. 창문 쪽에 책상을 고 스탠드로 불을 밝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난 뒤였다. 그 작디작은 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부대끼던 여동생들이 학교에 다닐 만큼 나이가 들 까지 말이다. 그전에는, 부모님이 작은 방을 쓰시긴 했지만 낮엔 공부방을 대신했는데, 그땐 창문 밖 담 사이의 공간이 사실은 내 전용 쓰레기통이었다.


처음에 멋모르고 한두 번 휴지나 먹다 남은 과일 찌꺼기를 버린 것이 이내 버릇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섞여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엄마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창문 사이로 가까스로 몸을 빼내서, 담벼락 틈새의 쓰레기와 오물을 치우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여동생들이 크고 나서는 창밖에다 격자로 짠 쇠창살을 씌우니, 청소를 위해서는 부득불 이웃의 담을 넘어서 거꾸로 담사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당에서 아이들이 사라졌다. 흙투성이 마당이 깔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고 난 후로는 땅따먹기나 구슬치기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고 맨발로 하는 여자아이들의 고무줄이나 공깃돌 놀이도 시들해졌다. 게다가 아이들의 학년이 높아지면서부터는 체구가 하루가 다르게 커졌고, 더 이상 담벼락 사이의 틈새는 아이들의 침범을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심심풀이 삼아서라도 숨바꼭질이나 이병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긴 했지만.


그리고 또 얼마 안 있어, 한 때 아이들을 허락했던 마지막 틈새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연탄아궁이를 없애고 보일러를 새로 깐다든지, 담을 보수하면서 틈새를 터서 방으로 확장하는 등 집집마다 가옥의 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은 방들이 수용하기에는 아이들 체구가 하루가 다르게 커져버린 탓이 컸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속 Johnsy는 Behrman의 '희생'으로 죽음의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회생을 하게 된다. 죽음과도 같은 절망과 극적인 회생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삶에 대한 '희망'과 이타심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이다.


 돌아가서 다시 우리의 지난 삶을 이야기해 보자. 우린, 지난날의 우리는 정말이지 마지막 틈새 속을 몸부대 끼며 살아온 삶이었다. 담벼락 사이의 작은 틈새조차 온기와 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고, 사랑으로 서로를 품으며 희망으로 함께 보듬어 온 작은 방은 스위트한 우리 집의 보금자리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이미 커져버린 몸을 담아낼 마지막 틈새란 없는 일까? 그저, 몸으로 버텨내기 버겁다고 해서 마지막 잎새를 기어이 떨구고 말 것인가! 그래서란다, 아이야. 지금 너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 것이! 


깜깜한 구멍 속으로 재차 몸을 구겨 넣은 아이가 기어이 미끄럼틀 위로 헝클어진 머리를 드러내자, 대롱 속으로 억지로 쑤셔놓은 풍선이 구멍 밖을 삐져나올 때처럼 덩달아 마음속이 불끈했다. 하늘  멀리서, 막 구름을 벗어난 햇살 한 올이 날 보고 해맑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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