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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12. 2024

창밖의 여자

요 며칠새 날이 흐렸다. 이런 날은 볕에 얼굴이 그을릴 염려가 없어 오랜만에 바닷길을 걷기로 했다. 서두르느라 바다가 눈앞에 보일 때까지도 이어폰을 두고 온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깊이 우려낸 된장국 냄새가 맛바람에 실려 와 코앞에서 어른거렸다. 익숙한 이 냄새!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항구초등학교가 지척에 있었다.


옛날,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면 학교 급식실 밖으로 늘 된장국 냄새가 풍겼다. 가정통신문을 통해 매달 식단이 공개되고, 교실 뒤편 게시판에도 공고가 되어있지만 실제 된장국이 메뉴로 나오는 날은 드물었다. 그러나, 수백 명이 함께 급식을 하는 학교에서 국물 음식을 조리할 때는 희한하게도, 밤새 우려낸 사골이나 쿰쿰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맞다, 그때도 이 냄새였어! 아침을 거르고 온 탓인지 갑자기 시장기가 확 올라왔다.


날이 우중충해서인지 아니면 추석을 앞둔 사람들 마음이 덩달아 바빠졌는지 모르겠지만, 평상시와는 달리 바닷길을 걷는 사람이 드물었다. 맞은편 도로에서 붉은색 관광버스가 서서히 다가오더니, 스페이스 워크로 올라가는 공원 진입로에 멈춰 섰다. 버스 문이 열리고, 짙게 선팅을 한 유리창으로 빛이 스며들면서 창가에 기대어 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눈이 마주쳤다기보다는 버스 옆을 지나치며 무심코 바라본 유리창으로 그녀의 얼굴이 비쳤던 것이다. 느닷없이, 조용필이 노래한 '창밖의 여자'가 머릿속에 떠오르며, 서둘러 나오느라 챙기지 못한 이어폰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는 예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다 갑자기 돌아앉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몰래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휴교로 한 학기를 온전히 날리고 맞은 방학이었다. 대구 근교로 1박 2일 야유회를 다녀오는 길이었고, 마침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니는 조용필 노래, '창밖의 여자' 들어봤나? 노래 어떻드노?"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는 1980년 3월에 발매되어,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함께 연타로 히트를 치고 있던 중이었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오랜 무명생활을 청산했지만, 이어진 대마초 파동으로 가수활동이 금지되었다. 1979년 연말가까워져 비로소 해금되었고, 이후 경쾌한 멜로디로 편곡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함께 1집 대표곡으로 발표한 노래가 바로 '창밖의 여자'였다.


당시, 나는 조용필이 부른 노래가 그리 탐탁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는 통기타로 대변되는 청바지 문화의 마지막 세대로, 뽕끼가 섞인 노래보다는 팝이나 포크송, 그리고 그룹사운드의 밴드음악이 오히려 익숙했다. 조용필 역시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긴 했으나 트로트에 가까운 히트곡으로 이름을 알려, 내겐 변절자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창밖의 여자'의 노랫말이, 그리고 그녀를 향한 나의 속마음이 그렇게 그녀에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응, 정말 좋더라. 그런데, 가사는 좀 그러네. 이별한 뒤의 슬픔이나 그리움을 노래한 것 같은데, 사랑을 시작할 땐 왜 적극적으로 다가서질 못하고..."


말끝을 흐리면서 머뭇거린 이유를 과연 그녀가 알기는 할까?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창밖의 여자'이지? 지난밤, 모닥불을 피우고 캠프 파이어를 할 때 정말 많은 노래를 불렀다. 트윈 폴리오와 이장희, 양희은과 박인희, 김세환과 장현, 최헌과 샌드 페블즈가 소환되어 그들의 노래, '웨딩 케익'과 '그건 너', '아침이슬'과 '모닥불', '사랑하는 마음'과 '나는 너를', '오동잎'과 '나 어떡해'를 목쉬도록 부르며 즐거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다시 그녀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돌아앉은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는 내 얼굴이 유리창으로 고스란히 비쳐 보인 것은. 그녀는 창밖이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서 눈 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린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길을 걸어가는 내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과연, 아직도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는가, 아니면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를 서성이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그 사람이 그대인가, 아니면 나였던가?


바다의 물빛은 릿했고, 그 위의 하늘은 더욱 흐렸다. 계류장의 요트가 하나 둘 닻을 올리더니 역풍이 부는 먼바다로 빠져나갔다. 방파제로 에워싸인 계류장 기슭에서는 부리가 긴 새끼 갈매기가 모래 속을 헤집으며 먹이를 찾고 있었고, 드물게도 몸이 흰 어린 갈매기는 잔 물결을 일으키며 얕은 바다 위를 여유롭게 유영하고 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노인이 마을회관에서 나오더니 어둔한 발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갔다. 바닷길을 걸을 때면 종종 마주치던 두무치 마을의 토박이였다. 오늘은 행색마저 초라해 마른 몸이 더욱 왜소해 보였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던 2, 3년 사이에 몸이 축나서인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양어깨가 위아래로 몹시 흔들렸다. 손수레가 있는 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니 해녀들의 물질이 끝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늦은 봄을 끝으로 미역철은 이미 파장했기에, 해삼이나 멍게, 전복 같은 어패류를 따는지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도 달랑 둘 뿐이었다. 길건너편 해녀의 집에는 이름 모를 해초를 덕장에다 말리고 있었는데, 줄기가 노르스름한 것으로 보아 아마 햇미역인 듯 보였다.


여름의 끝은 어디서든 어수선하다. 오늘 산책의 반환점에 있는 모래조각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다. 10월 초순까지 전시될 작품 중에는 미국 러시모어 산(Mount Rushmore)의 조각상을 패러디한 인물조각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수 전유진의 얼굴 한쪽이 허물어져 있어 이를 지켜보는 내내 속이 상했다. 얼마 전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저께 심한 비바람이 불고 나서 다시 무너진 것으로 보아 고의로 훼손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어, 전유진의 사랑하는 열성팬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었다.


철 지난 바닷가가 늘 그러듯이 피서객이 떠난 해수욕장 풍경은 한산하다 못해 황량했다. 점심때가 가까워졌는데도 길 건너 조개구집은 이 집 저 집 할 것 없 출입구가 포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해마다 추석 전후로 열리는 칠포 재즈 페스티벌의 배너만이 세찬 바람에 맞서 찢어질 듯 너풀거렸다. 너울이 심하면 먼바다로 나갈 수 없는 낚싯배가 가까운 바다 위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고, 보름을 닷새 앞둔 바다는 만조가 가까왔는지, 평상시와 달리 서너 개의 암초를 수면아래로 꼭꼭 감추고 있었다.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비가 내리거나, 오늘같이 바람이 거친 날이면 오를 수 없는 스페이스워크 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였다. 버스  그녀도 무사히 스페이스 워크 위를 걸었으리라 생각하니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하늘 층층이 드리운 구름이 따가운 햇살은 가리고 있었지만, 습도가 높아서인지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얼굴이나 씻고 갈까 싶어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의자라도 있으면 잠시 앉아서 쉬어가고 싶을 만큼 화장실 안은 서늘했고 공기도 청량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시설면으론 전혀 뒤질 게 없는 선진화된 화장실이었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어느 순간부터인가 '창밖의 여자'의 한 소절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흥얼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조금 전, 버스가 떠난 자리를 지나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아직도, 그녀는 한줄기 바람이 되고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창밖의 여자' by 조용필

https://youtu.be/GsIbYLXUfDk?si=2nwrEfvY3b58L4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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