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진 Aug 12. 2024

3학년 4반, 이어지는 이야기

8월 10일, 토요일이다. 오늘은 포항시 동해면 호미로에 있는 어촌 마을 펜션 80 캠프에서 3학년 4반 친구들이 1박 2일의 모임을 갖는 날이다. 재작년 8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친 첫 모임 후 2년 만의 모임인 것이다. 일찌감치 포항으로 출발한 병준이의 차에 진무와 재윤이가 동승하고 있다는데, 지난번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진무가 함께 온다니 벌써부터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마침 오늘이 10일이어서, 아파트 상가의 텐퍼센트에서는 텐데이 행사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 원에 팔았다. 얼음을 많이 넣고 물은 적게 타서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잔을 주문하고 매장 안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낯익은 병준이의 BMW가 막 도착을 해서 상가 앞 공터에 주차를 했다.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로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진무는 군살이 붙지 않은 날씬한 몸이 여전히 홀가분해 보였다. 작년에 교감선생님으로 승진을 한 재윤이는 방학이라 해도 학교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용케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었다. 민소매 셔츠의 병준이는 헬스로 다져진 단단한 가슴과 터질  부풀어 오른 어깨 근육이 남자인 내가 보아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아마추어 수준을 훨씬 뛰어넘교사 밴드의 기타 플레이어이기도 하니, 마초풍의 옷차림 전혀 위화감 없이 썩 잘 어울렸다.


포항으로 오는 중에 미리 점심약속을 잡아 두었던 가 보다. 오랜만의 고향길이어서 포항 별미인 물회를 점심으로 먹자고 했더니, 구룡포에 있는 오징어 물회집에서 장해와 만날 약속이 이미 되어 있다고 한다. 포항에서 한 시간 거리이니 구룡포항에 도착하면 오후 1시 반 경으로 시장한 배를 채우기에는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


장해의 단골 가게인 태종물회는 구룡포항 공용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오징어ㆍ전복 물회 전문집인데, 구룡포를 종종 오가는 나로서도 처음 들리는 곳이었다. 요즘 들어 어획량이 확 줄어든 오징어를 전복과 함께 채로 썬 물회라기에 가격이 만만찮을 것으로 봤는데, 의외로 포항의 일반 물회 가격인 18,000원이다. 가지 수가 더 많은 정갈한 밑반찬에다 콩나물 냉국과 소면, 그리고 물회 양까지 넉넉하여 결국 밥을 반공기나 남겼다. 웬만큼 이름난 곳이라면 방문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물회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가게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풍미(風味) 혀끝에 남아 그 맛이 특별나기는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장을 볼 때는, 각자 기호에 따라 맥주를 골랐다. 숙소 가까이엔 편의점이 없어서 미리 술을 넉넉하게 준비했는데, 차박을 좋아하는 병준이의 쿨링 박스 속 41도짜리 화요 세병과 진무의 퀄리티 높은 와인, 내가 갖고 온 18년 산 싱글몰트 글렌리벳 위스키 한 병을 먼저 감안해야만 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으니, 지나치게 많은 술은 밤늦은 통음(痛飮)으로 이어질 것이고 요즘 피서지에서의 아침 음주단속은 그리 드문 풍경은 아니었다. 다음날 오후 2시에 선약이 있는 진무와 이미 개학을 한 병준이가 서둘러 포항을 떠나야 했기에, 굳이 아침 음주단속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운전하는 몸에 취기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장해의 말을 빌자면, 이번 모임에 참석할 인원은 말린 민어와 대구포, 소라 간장조림과 구이용 돌문어, 각종 양념을 갖고 올 용석이와, 울산에서 출발해서 5시 무렵 도착할 승대, 버스로 환승해서 숙소 가까이 오면 픽업하러 가야 할 철호, 14회 동기생 연례행사인 영화관람 후 10시경에 합류하게 될 영성이와 전 동기회장으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안줏거리를 후원해 온 순찬이까지 도합 열명이었다. 80 캠프에 짐을 풀고 나서 장해가 몽돌 바닷가에 미리 쳐 둔 그늘막 아래로 자리를 옮기니, 이내 용석이가 도착했다. 용석이는 보험사 영업소장을 하면서 부동산 중개업을 겸하고 있는데 최근 건강 진단검사에서 심근육 이상이 발견되어 몸관리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중이기도 하다.


그늘막 아래에는 70 캠프를 숙소로 잡은 젊은 부부 일행이 자녀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마을 주민 몇몇은 앞바다에서 막 건져 온 전복과 뿔소라, 홍합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병준이는 준비해 온 고출력 스피커로 노래방을 세팅했다. 반주기 역할은 휴대폰에 저장된 노래나 인터넷을 이용하면 충분했기에 우선 듣기에 감미로운 노래부터 틀어 주위 분위기를 달구었다.


진작부터 (醉興)이 올라 있던 마을 주민들로부터 노래 신청이 들어왔는데, 주로 '안동역에서' 같은 트로트를 걸걸한 목소리로 불러대곤 했다. 물질에 나선 장해가 건져 온 뿔소라를 손질해서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는데, 안정환이 진행하는 '푹 쉬면 다행이다'나 '안 싸우면 다행이다'에서 천렵(川獵)한 해산물을 먹을 때 보이는 출연자들의 과한  반응이 충분히 이해할만했다. 마을 주민이 노래를 부르게 해 준데 대한 보답으로 건네준 삶은 전복과 홍합은 우리가 흔히 먹는 양식 전복이나 홍합과는 비할  없는 없는 풍미(豊味)가 있었다.


철호에 이어 승대가 도착하고 나서마당 앞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철호는 친구들과 나에겐 아픈 손가락과 같다. 서울대 입시에서 실패하난 후, 어려워진 가정형편 때문에 몇 해의 공백 끝에 경북대 법대를 입학하고 졸업까지 했으나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는 등 상황이 여전히 좋아 보이진 않지만,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것만으로도 모두들 고마워했다. 승대는 울산광역시 행정 부시장으로 올 4월 부임했는데, 오늘만 하더라도 바쁜 시정(市政)을 모두 소화하고 난 연후에야 참석이 가능했던 터였다.


이제야 성원(成員)이 이루어져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맥주로 이미 입가심이 되어 있으니 준비해 온 41도짜리 화요 칵테일과 싱글몰트 위스키, 와인에다 지평 막걸리까지 자신의 취향에 맞게 골라서 마실 수가 있었다. 제자들과 오랜만에 갖는 술자리인지라 오후 들어 넙죽넙죽 받아 마신 맥주로 인해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었지만 처음 마신 화요 칵테일 맛이 각별했다. 사이드 테이블에선 장해가 연신 바쁜 손놀림으로 전복을 회로 썰고, 며칠 전부터 물질해서 잡아놓은 뿔소라와 고동을 함께 삶아냈다. 죽도 시장 안에서 밖으로 가게를 옮긴 순찬이가 성의(誠意)미리 보내온 특산 해산물 구이마저 맛보려면 초등학교 교사인 영성이와 순찬이가 영화를 보고 올 9시 너머까지 버텨야만 했다.


 홀로 생각인지는 몰라도 첫 제자인 14회 3학년 4반 친구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지난 추억 속에서, 교사인 나의 입장과 그간 몰랐던 제자들 입장 사이에 접점이 생겨 그 속에 또 다른 기억들모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난 이야기가 새로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흐른 연후에 가슴속으로 평생 지니고 갈 보석 같은 추억이 된다. 설령, 앞으로 그 자리에 내가 없을 그런 날이 오더라도 말이다.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 중에, 그토록 기다려왔던 영성이와 순찬이가 숙소 앞에 도착을 했다.


으슬으슬한 한기와 함께 심한 갈증으로 눈을 뜨니 술자리가 이미 났는지 눈앞에서 철호가 곤한 잠에 빠져 있다. 몸이 아프다면서 저녁 내내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던 철호였다. 기특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가슴 한쪽이 체한 듯 아릿한 둔통(鈍痛)이 느껴졌다. 숙취(宿醉) 탓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둠에 익숙하진 않았지만 곤한 잠을 깨울 수는 없어서, 까치발로 전날 얼려 둔 냉수병을 찾아 꺼낸 다음 조심조심 화장실을 다녀왔다. 대충 눈으로 헤아려 보니 두 사람이 모자랐는데, 이른 새벽부터 장사에 나서야 할 순찬이가 영성이와 함께 포항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억지로 시 잠을 청했다가 눈을 뜨니, 이미 창문 밖은 훤했고 7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영성이가 막 도착을 했다. 멀리서 온 친구들에게 아침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이른 시간 문을 여는 식당을 수소문하면서 온 모양인데,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서울로 일찍 올라가야 할 친구들이 마음에 쓰여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채 득달같이 돌아온 게 분명해 보였다.


진무가 방 한쪽으로 불러서 가보니, 건강식품 꾸러미와 함께 그 속에 든 책 한 권을 꺼냈다. 'GEOGRAPHIC INFORMATION ANALYSIS(지리 정보 분석 원리)'란 제목을 단 이 책은 원서 번역본으로, 공동 번역자  교수가 강의교재로 쓰고 있는 책이었다.  덧붙여서 하는 말이, 학자 된 입장으 따로 저술한 책도 있지만 인쇄 중이거나 따로 보관 중인 새책이 없어 대신 가져왔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로선 더 의미가 큰 책이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대학교수로, 첨단 시스템과 기술을 접목시켜 신학문이나 다를 바 없을 만큼 진화한 지리학 분야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학자들 중 한 사람이 아니던가! 표지의 첫 장을 여니, 진무가 쓴, '선생님. 늘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진무 올림.'이란 자필 서명이 오롯이 눈에 들어와 습해진 물기로 잠시 눈이 흐려왔다.


문득, 물회를 먹고 나서 숙소로 가는 도중에 호미곶 광장에서 병준이와 나눴던 어제 오후의 대화가 생각난다. 페이스북에 박 선생이 올린 글이 머릿속에 떠올라 시작한 대화였다. 박 선생 글을 이 자리에 옮겨 본다.

퇴직 전까지 전 세계 영어 어휘교재의 바이블로 알려진 Norman Lewis의 Word Power Made Easy의 모든 내용을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하리라 결심한 이후 작년부터 틈틈이 가능한 주말 아침에 영상 제작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처음으로 정규고사 시험범위에 영상 일부를 추가하기도 했다. 사용되는 사진은 대부분 유료의 AI로 생성한 사진을 사용하지만 음성은 직접 녹음한 나의 목소리로 제작하고 있다. 영상 1분 분량 제작에 평균 2시간가량이 소요되어 때론 새벽부터 주말 오전을 모두 영상 제작에 할애해야 하기도 한다. 책 전권을 영상으로 제작하려면 그야말로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지만 10년 이내 완본 제작을 목표로 수양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작업의 지루함을 견뎌낸다. 오늘은 graphein 어근 관련 어휘들로 제20강 제작 중이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무렵, 대기업 입사를 목적으로 토플을 공부하면서 어휘력 향상을 위해 내가 공부했던 책이 공교롭게도 Norman Lewis가 집필한 'Word Power Made Easy'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교직에 발을 들이고 나서, 당시 공부해 둔 내용이 어휘 지도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Word Power Made Easy를 칠판에다 크게 써 둔 채 어휘의 중요성을 일갈(一喝) 하기도 했다. 이 책을 사이에 두고 박 선생과 사제(師弟)의 연이 기묘할 정도로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더군다나 10년을 대계(大計) 강의 내용을 영상물로 제작 중이라니 이 얼마나 고맙고 미덥지 아니한가.


마을 어귀 밖으로 나와 차로 5분 걸리는 거리에 중국집이 있었다. 이전에 와 본 적이 있는 지역 해물짬뽕 맛집이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듯 이른 아침임에도 주인이 주방 밖으로 나와 우릴 반겼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잠자리에 들고 난 후로는 밤늦도록 노래만 부르고 놀았다고 한다. 이른 아침 출발을 염두에 두고 미리 조절해 가며 술을 마셨다 하니 그야말로 기우(杞憂)였던 셈이다. 식사 후,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하고는 가야 할 목적지에 따라 각각 차를 나누어 탔다.


김 선생 차를 타게 되었는데, 멀리서 온 친구들을 한 끼라도 먹여 보내려고 한달음에 달려온 귀한 발걸음이었다. 포항 종합운동장 부근에서 철호를 내려주고는 지난밤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이어갔다. 철호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매듭짓고 난 후에, 선생 된 제자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입꼬리로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심지(心志)가 굳어 교권 보호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면서도 아이들 사랑이 극진한 우리 김 선생 이야기를 누구라도 귀담아 들어준다면 당장이라도 여기저기 달려가 자랑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3학년 4반,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면서 전날 사정상 참석은 못했지만 전화로 나마 연락이 닿은 제자들을 생각해 본다. 저마다 각자 쌓아 놓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있다. 말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이야기를 말하기보다는 이들이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힘닿는 대로 성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지 대로를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 한쪽으로는, 치열하게 자신을 불사르며 험로(險路)로 들어서 있는 제자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들 모두 3학년 4반이란 하나의 그늘 아래 미래를 꿈꾸고 가꿔던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두리뭉실 둥근돌도 있을 것이고 모난 몸으로 스스로 상처받으며 험한 자갈길로 들어선 제자도 있는 것이다.


겨울엔 남해의 어느 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만호를 위로차 방문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어느 적절한 시점에 구체적 제안이 따를 것이고, 이후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건강한 몸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첫날, 오징어ㆍ전복 물회를 먹은 태종물회
오징어ㆍ전복 물회 상차림
상생의 손 앞에서
장해가 건져 올린 전복
전복과 뿔소라 손질
우선 입가심으로 한 잔의 술
80 캠프 앞에 선 3학년 4반 사나이들
하늘과 달과 바다, 이 모든 것을 품은 사나이들
80 캠프 마당에 노래을 방을 세팅 중인 박 선생
장해가 어촌 마을집을 손수 일군 70캠프
최 교수의 강의 교재와 속표지

 선생이 제작한 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Fil5ZbfyWeQ?si=nRFxfHpIWyfXfOLW






작가의 이전글 잊혀지는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