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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Aug 01. 2024

아주 오래된 기억

예순넘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있다. 하루하루 다를 만큼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 그것인데, 암기력이라면 누구 못지않다 자부(自負)  나로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우선, 평생의 업(業)으로 삼아왔던 영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흔히 써먹던 단어의 철자(綴字)를 오기(誤記)하는 것은 이제 대수롭지도 않다. 물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었으니, 용불용설(用不用說)이 어디 살아있는 생명체에적용되는 말일까.


데자뷔는 기시감(既視感)을 뜻하는 말로,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이런 기시감을 느끼는 상황이나 장면이 자주 눈앞에 연출이 된다. 여명(餘命) 얼마 남기지 않은 노인들이 흔히 기시감을 경험한다고 는데, 요즘의 내가 바로 그런 것 같다. 아마, 우연히 맞닥뜨린 장면이나 뜻밖의 상황 속에서 억눌려 있던 기억 속 경험들이 되살아남으로써 느끼게 감정임이 분명하지만, 썩 기분 좋은 아니다.


지난봄, 공원 안 벚나무에서 가지마다 움이 돋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봄기운이 실린 산 너머 바닷바람은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두툼한 옷차림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여인들의 화사한 옷매무새가 바로 그랬다. 메마른 가지 틈새로 무리 지어 재잘대고 있는 텃새의 지저귐처럼 그녀들의 수다가 슬며시 귓가를 자분거렸다. 좀 더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들의 말소리는 마치 들어보란  암팡스럽귓전을 파고들었다.


"인자, 이게 우리덜 이쪽으로 오는 마지막 여행길이여! 언제 이 공원에 다시 오겄어?"


"응. 자네 말이 맞아. 긍께 맞는 말이기는 한디, 아즉은 한참 더 가야 하는가 본데? 올라 가? 말어?"


나름 멋을 부린 그녀들로부터 초로(初老)여인들답지 않는 세련미가 묻어났다. 사투리가 섞이긴 해 몇 마디 나누고 있는 말속에는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씨가 엿보였다. 참다못한 오지랖이 그만 발동하고 말았다.


"아마, 스페이스워크를 체험해 보려고 먼 길을 오신 듯한데, 조금 힘들더라도  마저 올라가 보시지요.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공원 안으로 벚꽃이 만발하는 주말이면 족히 한 시간 이상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스페이스워크로 올라갈 수 있답니다."


언덕길 초입(初入)에 이르러 서로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던 차에 예상치도 못한 낯선 사내의 길안내를 받게 되자, 뭔가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그녀들은 일제히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했던 대로, 이들은 코로나 기간 동안 미뤄두었던 여행길을 함께 나선 여고 동창생이었다. 그 순간, 수년 전 영일대 해상(海上) 누각에서 만났던 여인들이 문득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맞아, 그때 보았던 그녀들도 여고 동창생이라 했어.'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계절이 늦가을로 막 접어들고 있어서 바닷가로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저마다 코트 깃을 세우고 머플러를 목 아래 깊숙이 두른 그녀들의 옷매무새는 한적(閑寂)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썩 잘 어울려 보였다. 영일대 아래, 팔짱을 끼고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는 렌즈 속 그녀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셔터 소리와 함께 까르르 터진 웃음소리로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 순간이었다.


그때의 기시감으로 정신이 잠시 흐려졌다가 개었다. 당시 머플러와는 다른 느낌의 선글라스였다. 검은 렌즈가 가려놓은 그녀들 얼굴 안 표정이 사뭇 궁금했다. 마침, 가는 길이 같아서 스페이스워크까지 오르는 길안내를 자처했다. 개장 시간인 10시를 갓 넘어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아직은 뜸했는데, 지금이야 말로 스페이스워크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지금, 스페이스워크 아래 나란히 팔짱을 끼고 웃고 있는 렌즈 속 그녀들은 지난날 영일대 아래에서 가슴속으로 품었던 그녀들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스페이스워크가 들어서면서부터 공원 안으로 아연 생기가 돌면서 모든 것이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다. 공원 공용 주차장엔 평소 보기 힘들었던 관광버스가 수시로 드나들고 있고, 내국인들 사이로는 이국적 옷차림의 이방인들이 수월찮게 보인다. 어느 날은 깃발 뒤, 무리지은 사람들 틈새에 끼어서 어쩔 수 없이 가이드 설명을 들게 될 때도 있는데, 얼토당토않게 그 순간만큼은 주변 풍광(風光)마저 생경(生硬)스럽기까지 했다.


한여름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한 주가 지났다. 지난봄,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징후(徵候)들이 공원 곳곳에 분방(奔放)할 때도 사실은 무덤덤했다.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누적(累積)되어 있는 곳이 아니던가. 당시 내 생각은 그랬다. 결국 계절이란 돌고 도는 것이다. 세상 밖으로 움을 돋우고 새싹을 틔워 꽃으로 활짝 피어났지만 종내 그 자리이다. 무성했던 가지가 앙상해질 무렵이면 공원 곳곳 바람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낙엽만이 뒹군다. 이는 머릿속으로 꾸며낸 데자뷔이며, 무모한 기시감인 것이다.


삶은 무턱대고 닥쳐오지는 않는 것 같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삶을 의탁(依託)할 수밖에 없다 하여도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내용까지 일관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시감이란 이미 경험한 삶에 대한 착각이며 일시적 착시(錯視) 현상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결국,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누에가 실을 토하여 제 몸을 감싸 줄 고치를 만들 듯, 아주 오래된 기억들로 촘촘히 짠 장막(帳幕)을 몸에 두르는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다만, 장막은 깊을수록 어둠이 짙어지고 어둠 속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흐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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