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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내연산

by 박상진

설날을 전후로 며칠 동안 날이 궂었다. 눈발이 잠시 비친 적도 있었지만, 날이 풀리면서 오늘은 종일토록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이틀만 있으면 입춘이니 절기(節氣)로는 이제 봄이 오는 길목이다. 아파트 울타리 외진 곳에 오롯이 서 있는 목련은 가지마다 서둘러 움을 틔우고 있고, 산책로를 따라 빽빽이 심어놓은 동백은 여차하면 꽃망울을 터트릴 기세이다. 봄을 시샘하여 느닷없이 닥쳐올 꽃샘추위만 아니라면,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곳까지 이미 봄이 이르러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해마다 이랬다. 이런저런 이유로, 단단히 꿍쳐 두었던 새해의 마음다짐이 슬금슬금 봄눈 녹듯 풀릴 때면 어느새 1월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특히, 지난 연말 이후 봇물처럼 터지고 있는 사건사고에다 계엄령으로 인한 혼란한 시국에 유행성 독감까지 겹치니, 너나 할 것 없이 새해의 설렘과 굳은 다짐이 여물기는커녕 심신의 무기력이 오히려 극에 달할 지경이다. 오늘처럼 겨울비로 하루 종일 발이 묶이는 날이면, 설날을 빌미 삼아 게으름을 피웠던 지난 며칠이 송두리째 아쉬워지면서, 아무런 작정 없이 나선 연초 내연산 산행(山行)이 한 폭의 그림처럼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른다.


새해 해맞이 행사를 그냥 넘긴 건 올해로 3년째이다. 10여 분만 걸으면 바로 바닷가이고 일출 명소로 이름난 곳인데, 며칠간 이어진 게으름 때문에 마냥 해를 넘기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이튿날엔 날이 밝으면 새해맞이 산행이라도 하릴없이 떠나고 싶었다. 좀처럼 쓰지 않는 귀마개 달린 방한모(防寒帽)에다 두툼한 등산복으로 위아래를 치장하고 나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몹시 낯설어 보였다. 등짐을 가득 채운 배낭만 멘다면 산악 원정대의 알파니스트와 다름없었다. 집 가까이에 있어서 늘 만만한 내연산으로 마음을 정하고, 배낭을 대신해서 크로스로 매듭을 한 힙색 안에다 물 한 병을 넣고 나니 두 손이 허전했다. 잠시 망설이다 워킹스틱을 하나만 달랑 챙겨서 집을 나서는데, 서두른다고는 했지만 이미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내연산은 포항시와 영덕군을 함께 아우르고 있는 산으로, 최고봉인 향로봉은 높이가 930m에 이른다. 수려한 능선으로 어어지는 내연산은 골이 깊은 계곡을 따라 12 폭포가 계절을 달리하며 철마다 절경(絶景)을 이루고, 내연산의 자락에 있는 경상북도 수목원은 조경(造景)이 잘 되어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이 즐겨 찾는 트래킹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내연산의 주계곡인 청하골이 시작되는 곳에 터를 잡은 보경사는 신라시대에 창건(創建)된 천년 고찰(古刹)로서 수행도량(修行道場)으로 이름 높은 곳인데 오늘 산행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보경사 초입(初入)에 있는 해탈문(解脫門)을 향해 길을 나서면, 도로 양쪽으로 상가가 쭈욱 늘어서 있다. 오늘 점심으로 산채비빔밥을 미리 마음속에 담아두었기에 상가로 접어들면서 이내 도로 왼쪽 편에 있는 진주식당으로 눈길이 쏠렸다. 모친과 함께 쉰을 훌쩍 넘긴 제자가 주인장인 이 맛집은 산채비빔밥과 더불어 김치에 삭힌 통마리 꽁치 식해(食醢)로 특히 이름 높은 곳이다. 가던 길을 좀 더 재촉하면 공터가 넓어 야외 식당까지 겸하고 있는 춘원식당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 또한 다른 제자가 운영하는 맛집으로, 도토리묵과 호박전, 다양한 산채요리로 유명하다. 잠시 제자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싶어 식당 안을 기웃거렸지만, 아직 점심을 준비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어선지는 몰라도 안으로부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보경사는 영화 '남부군'과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진 사찰(寺刹)이다. 보경사 경내(境內)는 하산할 때 둘러보기로 하고 사찰의 왼쪽 등산로를 택해 완만하게 비탈진 계곡을 따라 걸었다. 며칠째 날씨가 몹시 추웠다가 살짝 풀리긴 했어도, 아침나절 계곡 아래쪽으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칼날 같은 냉기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계곡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드물었고, 틈새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 깊은 산중을 나 혼자 호젓이 걸을 때도 있었다. 이럴 때면, 실팍하게 얼어있는 계곡의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하늘을 비껴 푸드덕 날아오르는 산새의 날갯짓같이 먼발치에서도 힘차게 들렸다.


지난 초가을, 고등학교 후배들과 이곳으로 왔을 때는 산행보다는 동문 간의 친목이 우선이었다. 처음에는 연산폭포를 최종 목적지로 삼았으나, 산행을 하기엔 여전히 날씨가 무더웠고, 애초부터 산을 오르지도 않은 채 식당에 퍼질러 앉은 녀석들이 있어서 관음폭포도 못 미쳐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깊어질 때까지 집 앞 해맞이공원 등산로를 쉬지 않고 걸었던 덕분인지, 오늘은 관음폭포에 이를 때까지도 아직 다리 힘이 여전했다. 이에 더하여, 사람들로 한창 붐빌 때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던 연산폭포의 이런저런 풍경들을 사진 속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겨울산행의 즐거움이 주는 또 하나의 덤이기도 했다.


연산폭포를 끝으로, 하산하는 길 한참 동안은 마음속 번민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곧장 하산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다리 힘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금강 전망대로 오르는 갈래길에 이르렀을 때엔 마음에 앞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쪽으로 갈길을 택했는데, 나로서는 연산폭포와 소금강 전망대 동시 산행이 난생처음으로, 살짝 무모한 도전처럼 여겨졌다. 아주 오래전, 전망대로 올라가는 데크가 조성되기 전에 이쪽 길을 오르다가 경사가 가파른 비탈길을 만나 혼이 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금강 전망대를 오를 땐, 위에서 아래쪽으로 하산하는 무리들과 종종 마주쳤다. 처음 보경사에서 산행을 시작할 때 확인해 둔 시간이 11시경이었으니 연산폭포를 거쳐 전망대까지 올랐을 때는 벌써 오후 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연산폭포를 들리지 않고 애초부터 전망대 쪽을 택해 올라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전망대 아래로 내려다본 골 깊은 계곡 풍경은 나뭇가지만 남아 허허로운 겨울 나목(裸木)에 가려질 게 없어서 그런지 온 사방이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의 계곡 풍경과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내연산의 정상인 향로봉을 가리키는 이정표에는 이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은폭포(隱瀑布)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힘들게 이곳까지 올랐으니 기왕이면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은폭포로 향하는 반대쪽 오솔길을 택해 다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은폭포는 생긴 모양이 여자의 음부(陰部)를 닮았다 하여 음폭(陰瀑)으로 불렸다가 이를 상스럽게 여겨 은폭(隱瀑)으로 고쳐 불렀다는 설이 있지만, 가까이 다가서서 본 폭포는 보는 사람의 생각이 그리는 대로 마음속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계곡 곳곳에 잔설(殘雪)이 남아 살짝 눈으로 덮인 얼음장 아래로는 바닥이 환히 내려다 보일만큼 맑은 개울물이 시리도록 청명(淸明)한 소리를 내며 돌돌돌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몸을 기울여 목을 축이고 얼굴을 씻으며 세안(洗眼)을 하고 나니 온 세상이 그보다 더할 수없이 맑아 보였다. 뿌리로부터 생명수(生命水)가 줄기를 타고 오르듯, 말뚝 박힌 듯이 지쳐있던 양발에 생기가 다시 돌면서 되돌아 오르는 비탈길이 사뭇 가뿐해졌다.


소금강 전망대가 다시 얼마 남지 않은 구빗길에서 조곤조곤 나누는 말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평평한 바위에 앉아있는 두 명의 중년 여인이 눈에 띄었다. 방금 보고 온 음폭(陰瀑)이 머릿속에 떠올라 그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가 참으로 저어했다. 소풍이라도 나온 듯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들이 발치에다 펼쳐놓은 도시락에는, 샤인머스캣과 모양 좋게 잘라놓은 사과가 껍질을 까지도 않은 천혜향의 고운 물색(物色)과 어울려, 이를 곁눈질로 지켜보는 사람의 시장기를 한껏 돋우었다. 혹시 사과 한쪽이라도 건네줄까 은근히 기대하는 심정이 없지는 않았으나,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으로 인해 이들이 나누고 있을 밀담(密談)을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도망치듯 서둘러 지나쳐가는 귓등으로 그녀들이 나지막이 웃는 웃음소리가 비수같이 날아와 알알이 박히고 있었다.


보경사가 가까워지면서 계곡을 오르는 사람들로 오솔길이 아연 붐비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으니 식사를 마치고 느지막이 오후 산행을 시작한 사람이거나, 새해를 맞이해서 보경사로 부처님께 구복(求福)하러 온 불자(佛子)임이 분명했다. 경내에는 이들 남녀노소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산사(山寺)의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었는데, 부처님의 반개(半開)한 눈길을 쫓아 마주 합장(合掌)을 하면서 불심과 공덕을 함께 쌓고 있는 듯했다.


진주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고 나니 벌써 세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여든은 훌쩍 넘겼을 제자의 모친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손맛이 여전했다. 적어도 해마다 한번 이상은 들리는 곳이니 서로 얼굴을 잊어먹을 리는 만무했지만, 해마다 한 살씩 늘어가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모친의 건강은 양호했고 총기도 충만해 보였다. 늘그막에 늦손주까지 얻어 얼굴에서 웃음꽃이 지지 않으니 이마저도 보기가 좋았다.


사실, 2월 첫날에 다시 내연산을 찾기로 이날 다짐을 했었다. 이맘때가 되면 새해 결심이 쉬이 풀어질 줄 알고 오늘의 나에게 미리 다짐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다음 주부터 다시 영하를 크게 밑도는 한파가 시작된다고 예보되어 있다. 겨울 산행은 어지간한 추위가 아니라면 날씨가 칼칼할수록 산을 오르는 재미가 있다. 입김을 훌훌 불어가며, 그래서 안경에 하얀 김이 서릴 만큼 차가운 겨울바람 속으로 몸을 내맡기는 즐거움 또한 이에 못지않을 것 같다.


아무런 작정 없이 홀로 할 내연산 산행에서, 이번엔 또 어떤 풍경이 펼쳐져 마음 설레게 할지 사뭇 궁금하다. 한 달 사이 내연산 계곡 속속들이, 봄은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불현듯 이르러 있을 터이고.


해탈문 / '남부군'과 '대왕의 꿈' 촬영지 표지석
보경사의 옹기 장식
살얼음이 낀 계곡 / 상생폭포 / 관음폭포
연산폭포
음폭포(陰瀑布)? or 은폭포(隱瀑布)?
소금강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연산폭포와 주변 풍경
소금강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 풍경
보경사 대웅전과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원진국사 비(碑)'

https://youtu.be/N18nvmIEPM4?si=jjOfpNT5uu8Do2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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