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역에서 포항으로 가려면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열차시간표를 확인해 보니, 두 명이 함께 나란히 앉아서 갈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부득이 따로 떨어져서 가기로 하고 KTX를 예약했는데, 호텔에서 눈을 뜬 시점으로부터12시 6분이 포항으로 출발하는 가장 이른 시간이었다.
8호차와 4호차로 나뉘어 탑승을 하고,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순찬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4호차의 예약된 자리인 5B 좌석에 다른 승객이 앉아 있어, 사진으로 찍어놓은 코레일앱의 좌석표를 확인해 보니 해당 승객과 같은 시간, 동일한 좌석으로 서로 겹쳐져 있는 것이 틀림없단다. 순간, 등줄기로부터 전율이 일어나며 식은땀이 났다. 코레일앱 사용에 익숙하지도 못한 사람이 괜히 나서서 표를 잘못 예약하지는 않았나 후회를하며 좌석표를 재차 확인하고 있던 중에 객차 승무원이 마침 통로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전화기를 쥔 손까지 떨어가며 코레일앱을 다급하게 열어 예약한 좌석표를 보여주니, 순찬이가 사진으로 찍어놓은 4호차 5B 좌석은 동대구역에서 환승해서 포항으로 후행할 이다음 KTX의 예약석이라 알려주었다. 한편으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바탕 소동을 올려다보고 있던옆자리의 다른 승객과 우연히 눈이 마주쳐 멋쩍은 마음에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마도, 동일한 좌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지도모를 순찬이의 당혹스러운 얼굴 표정이함께 떠올라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얼마 안 있어 황당한 얼굴로 8호차 통로의 문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순찬이에게 동대구까지 가는 수원발 선행열차인 8호차 14C 좌석표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창문밖으로 눈을 돌렸다.
박 선생이 용인 수지의 한 아파트 지하상가에 밴드 합주실인 준스튜디오를 개소했다는 소식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순찬이로부터 함께 방문하자는 요청을 들은 것이 벌써 열흘 전의 일이었다. 마침 독감이 유행하고 있었고, 근래 보기 드물 정도의 한파까지 닥쳐서 바로 확답을 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한 것이 일주일이나 흘러버렸다. 버스 편을 미리 예약해 두어야 했기에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 동행하기로최종 확언을 한 것이 지난 수요일이니, 토요일 모임까지 겨우 3일을 남기고서 가까스로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때마침, 경기도에 살고 있는 동료 선생님도 용케 연락이 닿아 제자들을 만나려 온다고하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처음엔, 가까이 사는 14회 친구들끼리단출하게 모임을 가지려다 나를 위시한 모교 선생님이 가세를 하고, 다른 지역 친구들과도 연락이 닿으면서 그만 판이 커져버렸다고 한다. 이럴 때손이 바빠지는 것은 오롯이 순찬이의 몫이었다. 말린 가자미와 대구를 비롯해서 직접 손질하고 양념을 한 여러 해산물을 찌거나 염장을 하고, 해풍에 잘 익은 과메기에다 문어 내장까지 삶아서 먹음직한 안줏거리로 장만해 도시락으로 낱낱이 포장을 하고 나니 스티로폼 큰 상자로 세 박스나 되었다.
금요일 밤에는 이번 파티에서 마실 전통주 사진이 단톡방으로 전송되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술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한국식품연구원에 근무하는 김 박사는 술 품질인증 심의관으로도 활약하고 있는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데, 순도 높고 질 좋은 여러 병의 고급 증류주를 이번 행사를 위해 기꺼이 협찬해 주었다. 게다가, 경희대학교 대학원의 소믈리에 양성 과정에서 김 박사의 지도를 받은 '알사모(알코올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성회원인 유지님 또한 여러 이름 높은 지역 막걸리와 함께 와인과 곡주 수십 병을 기꺼이 희사해 주었다고 들었다. 사실, 이번 수원행을 노골적으로 유혹받은 이유가 이들 명주 하나하나를 따로 맛볼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 때문이었다고 이 자리를 빌려 솔직히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토요일, 포항 고속터미널에서 서울행 프리미엄 고속버스를 타고 출발한 시간은 11시 반이었다. 주말 상습 병목 구간이나 정체 지역까지 감안을 해서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보니, 오후 세 시 반이면 충분히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중 나올 김 작가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버스전용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던 리무진이 서울 가까운 병목 구간을 지나칠 때마다 잠시 잠시 서고 가기를 되풀이하긴 했지만 예정된 시간에 무난하게 도착을 해서, 20분 후인 3시 50분에 데리러 오기로 했던 김 작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이번 모임에 유지님이 초대한 알사모 여성회원 두 분을 함께 픽업해 가기로 약속이 되어 모두 5명이 김 작가의 차에 동승하게 되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첫인사를 나누게 된 이분들 역시 소믈리에 양성과정에서 김 박사의 지도를 함께 받으면서 서로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 뉴질랜드 대사관에 근무하는 회원과 커리어 우먼으로 삼성에서 10여 년 가까이 일을 했었다는 또 다른 회원까지, 두 분 모두가 전문직에 종사를 했거나 하고 있는 분들 답게 교양이 넘치고 예의가 발라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 어설픈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말 한마디를 건네더라도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자세를 보고는, 당장의 낯섦부터 바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밴드 합주실이 파티룸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며칠 전부터 함께 준비를 해 온 박 선생과 김 교감의 역할이 컸다. 이 두 사람의 3학년 담임으로서, 교사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일이 이루 말할 수없이 기쁘기도 하지만, 이처럼친구들과 은사를 위해 오늘 같은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 준 마음씨 역시 고맙기 그지없었다. 특히 오늘은, 한국수출입은행에 근무하는 정 소장이 최 교수와 함께 이미 차려 놓은 테이블 위 음식들이 포항에서 공수해 온 갖가지 해산물과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새로 세팅을 해서 이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한 명, 두 명 약속한 얼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면서 오랜만에 서로 만나는 반가움까지 더해지자 파티룸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올랐다. 동탄에 살고 있는 박 선생님이 박 선생의 밴드 합주실 소식을 듣고 개소를 축하하는 꽃화분과 함께 입장을 하고,이어서 졸업 후 처음 보는 제자들도 하나 둘 파티룸 안으로 들어와서는 멀찌감치 떨어져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품에 안기곤했다. 정말이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따스함이, 한층 매서워진 엄동설한의 추위조차 녹이고 말 듯 훈훈한 온기로 마음속을 촉촉이 적셔왔다.
도수가 낮은 저도의 막걸리로 오늘의 시음 행사를 개시하기 위해 알사모 여성회원들이 준비해 온 숙취해소제부터 먼저 마셨다.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모든 술을 돌아가며 맛보자면 단단한 마음가짐과 함께 속을 든든히 받쳐줄 강장제부터 미리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젤리 타입의 숙취해소제에 액상으로 된 숙취해소 드링크까지 함께 마시고 나니, 수십 병의 술을 눈앞에 두고서도 나도 모르게 기고만장, 자신이 만만해졌다.아울러 본격적으로 시음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밴드 합주실개소식을 늦게나마 축하하고자 김 작가가 손수 제작한 기념작품을 전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가 1969년 우드스탁 록페스티벌에서 연주했다는 '스트라토캐스터(Stratocaster)'를 분석한후 이를 정밀하게 축소해서 스틸로 된 패널 위에 은색 스레인레스를 주 재료로 사용해서 실물 모형으로 재현해낸 작품이었다.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세세한 기타의 생김새와 특징들이 작품 속에 하나하나 그대로 녹아 있어 연주자의 현란한 손놀림에 따라 찢어질 듯 길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기타음이 당장이라도 패널 위에서 되살아 날 것 같았다. 김 작가 특유의 재능과 무궁한 역량에 더해 작품의 미학적 깊이가 더해질수록 작품의 소장가치도 덩달아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얼른 봐서도 고운 빛깔로 제대로 빚은 막걸리가 하나 둘 개봉될 때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막걸리 고유의 주향보다는 달콤한 과일향부터 먼저 코를 자극했다. 목 넘김도 한층 부드러워진 것이 걸쭉한 와인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잘 익은 과메기와 여러 요리된 해산물을 곁들이자, 막걸리를 마신 후 안주를 씹는 기분 좋은 질감이 향긋한 후각과 함께 입안 곳곳을 휘젓고 다니는 듯했다. 도수 높은 화주나 증류주에다 안동소주와 소곡주로 주종을 바꾸기 전에 박 선생이 기타리스트로 참여하고 있는 '유쾌한 밴드'의 축하공연이 있었다. 이들은 오늘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환영하기 위해, 귀중한 토요일 오후 시간을 일부러 짬을 내서 밴드 합주실로 찾아온 것이다.
미리 준비한 다섯 곡에다 앙코르곡까지 이어졌지만 이 노래들 가운데 백미는 영국의 팝가수 로버트 팔머(Robert Palmer)가 1979년 리메이크해서 부른 'Bad Case Of Loving You'를 연주할 때였다. 자리를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이 나이차를 서로 불문하고 노래의 절정부에 이르자 자연스러운 떼창으로 이어졌다. 뒤에서 떠미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무대 앞으로 뛰쳐나오더니 흥에 겨워 저도 모르게 둠칫둠칫 어깨춤을 추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이들 밴드의 연주가 어느 유명 락밴드의 공연 못지않은 열기로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유쾌한 밴드'는 과연 밴드 이름에 걸맞게 공연을 마치자마자 유쾌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고, 난장의 주 종목은 술병에 아로새긴 상표 이름만 보더라도 주기가 진득하게 묻어날 만큼 도수가 높은 독주였다. 아울러, 박 선생이 미리 출력을 높여 세팅한 노래반주기를 통해 '알사모 노래방'이 가동되었고, 각자 그동안 몰래 감춰뒀던 필살의 십팔번들이 회원들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방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트롯 사랑이 남달랐던 박 선생님의 구수한 노래를 다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기타 연주를 곁들인 박 선생의 올드팝은 오늘 모임에 참석하여 '대동여고생'이란 새로운 타이틀을 얻게 된 알사모 여성회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버스가 끊기거나 지하철을 이용하기가 버거워질 시간이 가까워지자 부득불 자리를 먼저 떠나야 할 사람들이 생겨났다. 애초 모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젠틀한 김 박사는, 알사모 여성회원들의 안전귀가를 위해 너무 늦지 않을 시간을 택해서 조용히 이들을 밖으로 불러내었다. 포항에서의 재회를 다짐하는 것으로 오늘의 행사 참여와 협찬에 대해 고마움과 작별인사로 갈음한 것이,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에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10시를 너머서면서 뒷정리가 시작되었다. 태운이의 후원으로 수원역 가까이에 있는 노보텔을 숙소로 잡아두었다고 김 교감이 슬며시 귀띔해 주었다. 다음날 새벽경매로 인해 순찬이의 당일 숙박 여부를 알 수가 없어서 본의 아니게 제자들에게 또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게다가 1인 조식까지 미리 셈을 치렀다니, 졸업 후 처음 본 태운이에게 더할 수 없는 고마움에다 미안한 마음이 더해졌다. 결국, 통음한 순찬이가 오늘밤을 함께 하기로 해서, 뒷정리조차 마다하고 출발을 재촉하는 박 선생의 강권에 못 이겨 호텔로 이동을 하니 11시를 막 넘어선 야심한 밤이었다. 킹사이즈의 싱글베드에서 사제간에 부둥켜안고 만리장성이라도 한번 쌓아보자는 끈질기게 유혹에도 불구하고 소파 위에서 자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피우더니 이내 순찬이의 요란한 코골이가 시작되었다. 편히 잠을 자도록 나를 배려해 주는 속내를 모르진 않지만,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좁은 소파 위에 몸을 웅크리고 곯아떨어진 순찬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롱패딩 밖으로 삐져나온 몸을 마저 갈무리해 주려는 순간 보일 듯 말 듯 웃음 한 자락이 순찬이의 두툼한 입술 언저리로내려앉아 이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즐거웠다.
결국, 오늘 아침 호텔 조식은 나만 먹게 되었다. 순찬이는 지난밤, 모처럼 만에 통음을 한 탓으로 숙취로 인해 속이 불편한 탓인지 아침 식사를 마다했다. 평소 아침을 거르는 일은 나 역시 다반사였지만, 조식을 먹지 않고 체크아웃하기에는 미리 지불한 돈도 돈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태운이의 성의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잠시 룸을 벗어난 순찬이와 남겨 놓고 1층 레스토랑에 들렀더니, 조식으로 서빙되고 있는 뷔페가 우선 보기에도 다양하게 가짓수가 많고 음식의 질도 뛰어나 보였다. 이용후기를 검색해 보니 44,000원의 만만치 않은 식대에 걸맞을 만큼 온통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과음으로 인해서 당장이라도 속이 뒤집힐 것 같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과일, 요구르트, 주스와 함께 뺑오쇼콜라와 크루아상, 피칸페스츄리 몇 개만 접시에 올리는 것으로 불편한 속을 달래 보기로 했다. 커피까지 챙겨 마시고 자리를 떠야 할 마지막 순간까지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은 촌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속성 때문일 거란 생각이들자 굳이 에둘러가며 스스로 자책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KTX 타자마자 지난 일을 머릿속으로 되살리며 글을 쓰고 있는데, 카톡 대화방에서 불이 났다. 서로 안부를 묻는 글과 지난밤의 행사 사진들이 난무하면서 불 난 방에 때맞춰 부채질까지 한다. 올라온 글을 읽거나 여러 장의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미소 짓고 있을 지난밤 모임에 참석한 분들의 얼굴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슬쩍 뒤돌아보니네댓 칸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순찬이의 얼굴이 보였다. 눈은 감고 있지만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여전히 속히 불편한 모양새였다.
동대구에서 환승을 한 열차를 타고 포항역에 도착하니 벌써 네시가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다. 고층 아파트 사이로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석양은 쌀쌀해진 날씨까지 보듬어 줄 만큼 포근함을 품고 있진 않았지만 하늘을 서서히 붉게 물들이고 있는 저녁노을은 따사로운 색조에다 빛깔마저 너무 고왔다. 마치 지난밤의 행사로 힐링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 듯하여 마음이 한층 더 풍요롭고 넉넉해졌다. 택시를 타고 가자는 순찬이 제안을 마다하고 30분이나 더 기다려 버스를 타고자 한 것도 그만큼 여유로워진 마음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저런 한가한 상념들이 이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오늘 아침, 순찬이가 일어나자마자 호텔방에서 건네준 배낭 속 증류주 '가무치'의 맛이 사뭇 궁금했다. 하지만, 다음 주 다녀갈 막내를 위해 그때까지 시음의 유혹을 견뎌내기로 다짐을 하고 나니 한층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할 그날의 술자리를 떠올리자 지난밤의 설렘과 결이 같은 흥취가 다시 미각을 돋우면서 지난밤의 기분 좋은 숙취로부터 여전히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