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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Aug 22. 2022

밸런스가 무너졌다고?

칠곡 5일장

'밸런스가 깨졌다',  아니면, '밸런스가 무너졌다'란 말을 쓸 때가 있다. 보통, 이 말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흔히 사용하는 말인데, 이를테면, 생체학적으로 잘 유지되어 오던 신체적 기능에 일시적으로 어떤 이상이 발생했을 경우와, 일상적인 잘 이어오던 삶의 흐름이 어떤 특정한 사건사고로 인해 그 리듬에 큰 굴곡이 생겼을 때 종종 이 말을 쓰곤 한다. 그런데 최근, 상하게도 이 말을 사용해야 할 두 가지 일이 거의 한꺼번에 나에게 닥쳐왔다.


마흔이 넘어서자 몸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자신의 몸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시기에,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만큼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몸은 나이에 비해 비만의 정도를 이미 넘어서고 있어서, 2년마다 정기 신체검사에서 혈압과 결과가 보여주는 여러 혈청검사의 지표가 몸안 여러 군데에 이상이 있음을 적신호로 알려주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운동 삼아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인데, 수업 사이의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운동장을 거의 매일 열 바퀴 이상을 돌다 보니, 140을 넘나들던 혈압과 올챙이 배처럼 래로 볼록하던 뱃살이 줄어들면서 바지의 허리춤에 주먹이 들어가도 남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85kg을 웃돌던 몸무게는, 저울 위에 몸을 올리면 눈금이 한계점 가까이서 크게 한번 요동을 치고 제자리를 찾아가듯,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수치가 아래쪽에서 출렁거리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20년 가까이 피던 담배를 끊었을 때처럼, 어느새 체중이 15kg 가까이나 줄어 70kg에 이르자 몸도 마음도 그쯤이면 됐다고 안도하기 시작했다. 다만, 담배는 일단 끊고 나서 금단현상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졌지만, 몸무게가 현격히 줄어들어 스스로 생각해두었던 목표치까지 이르면서부터 몸 안팎으로는 이로 인한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다. 거울 앞에 선 내 얼굴에는 어느 순간부터 숨길 수 없는 잔주름들 가득했던 것이다. 마음 저편에서 이만하면 됐다고 속삭이던 유혹이 다시 꼬리를 문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달리기로 시작했던 운동에 살이 빠지는 재미를 더하자 수영과 mtb 등 보다 과격한 운동으로 영역이 넓어졌고, 나이가 들면서는 걷기와 가벼운 등산으로 신체가 버틸 수 있는 운동량을 조절하게 되었다. 중간중간 살이 급속히 찌다가도, 지난 경험을 되살려 수영을 제외한 나머지 운동을 되풀이하면 그 후로도 75kg 안팎의 체중 정도는 쉽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잔병치례가 거의 없던 나로서는, 체중의 오르내림과 비례해 높낮이를 달리하는 혈압관리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옥죄이기 시작하면서 심혈관계 질환인 협심증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협심증으로 병증이 최종적으로 진단되고 나서부터는 아침, 저녁 두 차례로 나눠 약을 매일 먹어야 하는데, 건강에 소홀했던 결과로는 그리 만만치 않은 대가인  같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덮치자 10년 가까이 가까스로 이어오던 70kg 후반대 체중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내 몸의 밸런스는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인가, 오른쪽 종아리 아래로 열꽃이 피더니 온몸이 쑤시고 몸에서 열이 났다. 가족들이 함께 외식을 하러 들렀던 식당에서 발열 체크를 받은 뒤 고열로 문전박대를 할 때는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자가 격리를 한 후  다음날 당장 보건소로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음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열이 다스려지자 아픈 오른쪽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오더니 발등마저 잘 익은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손으로 꾹꾹 누르면 마치 잘 다진 찰흙을 누른 것처럼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발등에 남았다가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몽실몽실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부푼 다리의 정강이 줄기도 손아귀에다 힘을 주고 누르면 힘을 준 손가락 수 대로 움푹 파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영 마음이 거슬렸다.


양쪽 다리에 기가 동시에 나타나면 신장에 문제가 있지만, 내 몸에 나타난 여러 병증은 전형적인 봉와직염에 걸렸을 때의 증세였다. 발에 난 상처의 혈관을 타고 바이러스가 피부의 진피와 피하 조직에 침범하면서 생긴 염증 반응으로 인해 봉와직염이 발병한 것인데, 발열과 오한, 두통, 전신 근육통, 식욕 부진, 국소 홍반 등이 한꺼번에 닥치니 몸이 거의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서 시작되었던 심한 몸살 기운과 근육통은 연휴가 끝나갈 즈음 일단 열이 내리면서 가라앉았고, 목의 인후통까지 사라지니 그제야 살만해졌다.


문제는 염증으로 인한 기였는데, 병원에서 항생제를 주사를 맞고 처방한 약을 며칠 먹고 나니 종아리 전체를 붉게 물들게 했던 홍반이 사라지면서 이내 부기가 빠졌지만, 발등의 염증 증세는 여전해른쪽 신발을 신기가 어려울 만큼 내내 부어 있었다. 이후로도, 근 일 년 가까이 애를 먹이던 오른쪽 발등의 부기는 어느 날 아침부터 거짓말처럼 감쪽 같이 사라졌다. 퇴직한 후로 이전보다는 아무래도 생활이 불규칙해지면서, 한참 몸을 쓸 때와 빈둥거리며 지낼 때마다 체중이 각각 줄었다 늘었다를 되풀이했다. 그럴 때는 발등의 부기도 슬그머니 되살아날 때가 있었지만, 무시해도 될 만큼 그저 도드라져 보일 정도였다.


결국은 불어난 체중이 문제였다. 몸의 밸런스가 한번 무너지고 나니, 10년 이상 나름대로 공 들였던 몸 관리가 덧없어졌는데, 예전의 곱절만큼 걷고 오르고 자전거 바퀴를 굴려봐 다시 늘어난 뱃살은 좀체 줄어들질 않았다. 상체의 하중이 무릎을 거쳐 종아리 아래쪽의 발등으로 그대로 전달되고 있으니 체중을 확연하게 줄이지 않는 이상은 지독한 병증을 경험한 다리가 완전히 제 기능을 찾기까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신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진 것이,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체중이 불어나면서 몸의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어 오다 봉와직염에 의해 특정 부위의 면역 체계가 일거에 무너진 탓이었다면, 심리적인 밸런스가 한 번씩 무너지는 것은 주로 날씨와 같이 일상생활의 패턴에 변화를 주는 요인이 있을 때 흔히 나타난다. 이는 변곡점을 두고 위아래로 일정하게 되풀이되는 주기율과 같은 것이어서, 심리적인 변화에 따라서는 얼마간의 안정기를 거쳐 위아래로 감정의 기복을 경험토록 만들기까지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리 먼 거리를 오랜 시간 걸어도 발등의 부기는 재발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좀처럼 빠지지 않던 체중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더니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Homecoming 행사도 기분 좋게 끝나고, 사이사이에 의미가 담긴 사적인 모임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끝났는가 싶었던 여름 장마가 뒤늦게 폭우를 동반하여 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되더니 이내 그 범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당연히 바깥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밖으로 나들이를 못하게 되자 왠지 모를 조바심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날은 또 얼마나 무더운지, 날이 개이기를 기다렸다가 잠시 바깥나들이라도 할라 하면 습한 날씨 속에 금방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장맛비가 되풀이된 일주일 사이에, 기울어진 저울추가 다시 제자리를 찾듯 몸무게는 이내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발이 욱신거려  습관적으로 발아래로 눈길을 주니, 찜 틀 위에 놓인 찐빵처럼 보풀보풀 발등이 이쁘게도 부풀어 올라 있었다. 평소 우려했던 몸의 신체적 밸런스가, 심리적인 밸런스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나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멋모르고 과신했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자 지난날의 무절제나 몸을 방임한 대가에 어쩔 수없이 고개가 숙여지듯, 온갖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그토록 견고하다고 믿었던 심리 상태도 나이가 들수록 균열이 잦아들고 있다. 흔히, 노년의 갱년기라 치부하고 생각 없이 덮어버릴 수도 있는 이 같은 심리 상태는 일단 한번 무너지고 나면 밸런스를 되찾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주기율의 경사가 완만하면서 회복의 속도가 더욱 느려지는 것이다. 여기에다 신체적인 밸런스까지 함께 무너져 내린다면?


해마다 추석을 보름 가까이 앞두고 할아버지 제사가 있다. 이날을 기준으로 바로 다가오는 일요일을 택해 해마다 집안 벌초를 하니, 올해는 28일이 바로 그날에 해당된다. 그래서, 어제는 칠곡 본가로 일찌감치 올라와서 어머니와 함께 머물고 있다. 사실, 어머니는 나를 오랜만에 만날 때마다 오른쪽 발등의 부기부터 먼저 확인하곤 하시는데, 그동안 전화 상으로 알렸던 안부와는 다른 실상을 그만 된 통으로 들키고야 말았다. 안타까운 손길로 부어오른 발등을 삭혀주려고 꾹꾹 눌러보는데, 그 누른 깊이만큼 내 마음속은 아래로 쑥쑥 짓물러 들었다.


오늘, 이른 점심을 먹자마자 언제 칠곡 재래시장 5일장이 서는지를 물으신다. 1, 6으로 시작하는 5일장인데 오늘이 마침 21일이어서 서둘러 칠곡 장터를 둘러보기로 했다. 어제, 매천동 수산물 센터에서 제사상에 놓을 건어물과 음식으로 차려낼 해산물을 대충 사두었기에, 오늘은 손질해서 전으로 부칠 몇 가지 채소나 사둘 요량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달 전쯤 낙상으로 인해 오른쪽 복숭아뼈에 실금이 가고 인대까지 늘어나 반깁스 상태로 고생하셨던 어머니의 상처 부위 부기가 오늘은 거의 눈에 뜨이질 않았고 , 내 발등의 부기도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엄마 손이 약손이라더니, 어젯밤만 하더라도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몇 번이고 발등을 주물러주셨는데, 아마 자식을 염려하는 지극한 마음이 닿았는지 몰라도 발가락을 위로 굽혀 힘을 주니 발가락으로 향하는 뼈가 오른발 왼발 가릴 것 없이 줄기줄기 오롯이 돋아나는 것이 보기에도 참 좋았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아래로 가라앉았던 마음의 굴곡이 다시 평평하게 펴지면서, 뭔가 모르게 막혀있던 체증마저 아래로 쑥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저래 모자지간의 부기로 아픈 다리가 모두 나은 듯 보이자, 칠곡 장터로 가는 걸음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대목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칠곡 장터는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붐비질 않았다. 재래시장 앞이나 건물 옆으로 지나갈 틈도 없이 사이사이 자리 잡고 있던 난전들도 오늘은 눈에 띌 만큼 듬성듬성 들어서 있었다. 밭에서 막 따온 듯 흙이 그대로 묻은 오이나 가지, 박이나 호박, 고추나 실파 등을 한 무더기 씩 따로 떼내어 넉넉한 시골 인심과 함께 내놓고 파는 모습이 예전의 정겨운 시골 장터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다만, 무더기로 나눠 팔던 낱개로 하나씩 팔던, 예전에는 1, 2천 원이면 넉넉하던 것을 지금은 적어도 3천 원은 주어야만 살 수 있다고 하니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장바구니 물가에 혀가 저절로 내둘러질 정도였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돈을 건네자마자 넉넉한 손으로 따로 한 움큼씩 봉지 속으로 넣어주던 인심은 오간데 없고, 청양고추 몇 개를 우수리로 더 넣어달라고 하자 바로 면전에서 야멸차게 거절을 한다. 하긴, 바로 눈으로 개수를 헤아려도 될 만큼 얼마 되지 않은 양으로 매겨놓은 가격이니 여기에 몇 개를 더 우수리로 얹어 달라고 하기에는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라있다. 그래도, 어머니가 속으로는 무척 섭섭하셨는지, 오이나 가지의 가격을 물어보고는 그곳에서 사지를 않고 다른 난전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자 줄곧 우리 뒤를 쫓는 할매의 눈길이 심상찮았다.


몇 군데를 더 오가며 나머지 채소를 사고 나서 미리 손질해 두라고 주문을 넣었던 생닭까지 찾고 나니 벌써 오후 두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이런 무더위에 땀을 흘리며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다 보면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한 번쯤은 부아가 돋을 만도 한데 오늘은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두발로 몸 성하게 걸으시면서, 지갑 속에서 거슬러 받은 꼬깃꼬깃한 돈을 천 원, 이천 원 헤아려가며 물건을 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뒷전에서 보고 있자니, 지금 장을 본 봉지를 양손에 나눠 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아버지 모습으로 오버랩되었다. 나도 모르게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두워져 있던 마음이 물러나자 마음속으로는 다시 기백이 넘치고,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밤늦은 시간에도 여전히 몸과 마음이 가뿐하다. 몸도 마음도 다시 무너졌던 밸런스를 찾은 것이다.


오후부터, 한동안 비워두었던 집 청소를 여념이 없던 어머니는 고단하신지 아들 옆에서 편안히 코를 골며 주무시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혼자 지내시기가 적적할까 봐 큰 여동생이 광명으로 오시도록 해서 줄곳 그곳에서  머무르셨다. 맏이의 입장에서 복잡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보살피는 두 여동생의 마음 씀씀이가 늘 고맙기만 하다.


오늘, 어머니 옆에 오랜만에 슬그머니 누운 잠자리는 너무나도 넉넉하고 또 편하기만 하다.


칠곡시장 입간판
칠곡시장 안 모습
파도를 밀어내는 이 기백으로!!!
4월 한 때는 거의 매일 이 만한 실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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