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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Aug 18. 2022

비에 대한 단상(斷想)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유월에 내리는 비가 제일 좋다. 이른 유월은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뜬금없이 비가 내릴 때가 많고, 내리는 빗줄기는 여전히  굵기가 실하게 익어가는 중이다. 우산 없이 길을 나섰다가, 후드득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생각만큼 성가시지도 않다. 내리는 소낙비를 피해 잠시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면, 이리저리 세찬 비바 휩쓸리다 힘을 잃은 빗줄기가 낙숫물로 마지막 기력을 하고, 이내 하늘은 거짓말처럼 해맑은 푸르름으로 다시 분단장(粉丹粧)을 한다.


그런데, 올해는 장마가 길지도 않았다. 마치 유월 소낙비처럼, 때를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두어 시간 변죽만 울리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곤 했다. 비를 예고하는 날은 잦았지만 일단 문밖을 나서기만 하면 마음이 편했는데, 설령 소낙비를 한바탕 뒤집어쓴다 하더라도 감기 따위로 고생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맘때 내리는 비는, 일부러라도 몸을 적시며 걷고 싶을 만큼 몸을 따뜻이 데워주는 온기를 속에 품고 있고, 비를 한바탕 맞고 나서도 더러 남아 있을 냉기로 몸이 불편할 일은 거의 없다.


며칠 전, 장마 끝물 단 하룻만에 엄청나게 쏟아진 비로 말미암아, 수도권을 중심으로 해서 피해를 입은 지역이 속속 생겨났다.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곳으로 복구활동에 나선 여당의 한 국회의원이 정신 나간 말 한마디설화(舌禍)자초(自招)했는데, 그 한마디 말은 수해를 입어 크게 상심(傷心)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할퀴고 말았다. 흔히,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갔다'는 말로 화재로 인한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면, 홍수로 인한 피해는 '수마가 할퀴고 갔다' 표현할 만큼 그 상처는 오래도록 아리고 깊이도 깊다.


방송을 통해 보았듯이, 한꺼번에 닥친 자연재해 앞에서 사람들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사통팔달(四通八達) 교통 요충지인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구나 서초구와 같이 도로가 잘 정비된 지역의 중심 대로에서 온갖 값나가는 차량들이 불어난 물에 휩쓸려 다니고, 주변의 고층 건물과 수십억 대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이 순식간에 흘러내린 빗물로 침수되거나 일부 지하철 운행이 일순간 멈춰 섰다. 우리처럼 지방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히 상상못 할 생경(生硬)한 장면들이 요즘 같은 대명천지(大明天地)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이곳 포항에서도 지금껏 잊히지 않는 물난리가 적지 않았다. 특히, 1991년 8월, 제12호 태풍 글래디스가 동해안을 덮쳤을 때는 형산강이 범람하여 인근의 안강읍 전체가 물에 잠기고, 포항 도심(都心) 곳곳이 침수되어 당시로서는 도시 기능이 일순간에 거의 회복불능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마침, 학교에서는 여름방학 보충수업으로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던 때여서, 전화로 학생들에게 일일이 임시 휴교를 알렸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밤새 쏟아진 비로 학교도 1층까지 완전히 침수되었는데, 무엇보다 1층 행정실에 보관 중이던 졸업생들의 수기(手記) 생활기록부가 유실(遺失)되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급히 달려온 행정실 직원들과 숙직 선생님이 방학 중이었음에도 당시 학교 기숙사에 남아있던 몇몇 학생들과 함께 밤을 새우다시피 고생한 끝에 2층 교무실로 가까스로 생활기록부를 옮긴 일은 졸업생들 사이에 지금도 회자(膾炙)되고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다음 날, 가슴팍까지 차오른 물을 거슬러 학교에 왔을 땐 본관 뒤편 담벼락에 임시로 기대어 놓은 사다리를 통해 2층 교무실로 진입을 하던지, 아니면 흙탕물을 뒤집어쓸 각오를 하고 운동장을 헤엄치듯 가로질러 와서 평상시처럼 본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하지만 멋모르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온 몇몇 선생님들은, 전날 물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하물이 더 이상 불어나는 것을 막느라고 행정실 직원들이 본관 문을 걸어 잠그고 현관문에다 첩첩이 책상으로 괴어놓은 것을 알 턱이 없었다. 결국, 흙탕물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후문 사다리를 타고 교무실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던 몇몇 선생님들은, 불평 섞인 말로 툴툴거리고 다녔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음날, 1층까지 완전히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돌아본 교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불어난 물에 떠다니다 교실 이곳저곳에 뒤섞여 나뒹굴고 있었고, 책상 서랍 속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학생들은 저마다 희색(喜色)만면(滿面)는데, 교실 환경이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는 야간 자율학습이 중단될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난리를 겪고 난 날부터 하루만 걸러 다시 야자(夜自)가 시작되자 학생들의 얼굴에선 아직은 끝나지 않은 비가 한차례 더 쏟아지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철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물에 잠긴 가재도구를 밖에 내다 말리느라 골목길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나 다를 바 없는데, 이는 아랑곳 않고 그저 집에 일찍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바탕 비가 다시 쏟아지기를 바라다니.


학교 가까운 골짜기로부터 쏟아져 내려 산업도로 아래 타고 넘어온 사나운 빗물이 배수로가 막히는 바람에 사나흘 정도 고스란히 학교에 고여 있다 빠지고 나니 운동장은 온통 뻘이었다. 2층에서 수업을 하다가 아래로 내려다보면 흙탕물 사이 무엇인가 빠르게 기어 다니는 것이 보였는데, 쉬는 시간 호기심 충만(充滿)한 아이들이 그새 잡아 온 것을 보면 미꾸라지 아니면 드물게 물뱀도 섞여 있었다. 8월의 농익은 햇살 아래, 가뭄 끝 논 갈라지듯 운동장을 온통 뒤덮은 뻘이 말라 거북 등짝처럼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 삽으로 걷어낸 진흙땅을 아이들을 동원(動員)해 손수레로 날라 운동장 한 귀퉁이에다 모아두곤 했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고역(苦役)인 것은, 배수구가 막혀 생활 오수(汚水)가 학교로 역류(逆流)해 들어온 데다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마저 불어난 빗물과 뒤섞여 고인 물이 빠지고 나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취가 한참 동안 교정 곳곳에 배여 코끝을 괴롭힌 것이다. 더위가 절정(絶頂)으로 치닫고 있어서 교실 창문을 열어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지라, 특히 1층이나 화장실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신관 건물로 이동해서 수업해야 할 때는 시종(始終) 코를 막고 있어야 할 만큼 고역이었다. 교실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요즘과는 달리, 좌우 양쪽 중간 벽에 달린 선풍기 두대로 온 여름을 나야만 했는데, 더구나 당시는 콩나물 교실이라 이를 만큼 산(山) 만한 아이들이 한 교실에만 60명 가까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해 여름이 지나고 이듬해 3월이 되기 전 학교 전체가 신 교사(新 )로 이전하면서 그때부터는 적어도 홍수로 인한 시름은 덜게 되었다. 옛날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새로 짓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상치(相置)해서 지은 새로운 학사(學舍)가 산비탈을 구획(區劃) 정리해 둔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더 이상 건물이 침수할 가능성은 없었다. 부지불식(不知不識) 중에 홍수로 인해 꿀맛 같은 노는 날을 경험했던 아이들 가운데는 이를 미리 아쉬워하며 떠벌리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 공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등교와 과도한 자율학습으로 인해 학생들이 얼마나 부담을 느끼고 지쳐있었을는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로부터 서너 해가 지난 어느 여름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글래디스로 인한 홍수 피해는 역대급 태풍을 동반했기에 불가항력(不可抗力)으로 여겨졌고 사실상 도시 전체가 침수될 만큼 속수무책이었다. 사실은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침수가 예상되는 취약 지역에 수방(水防) 시설을 갖추고 피해를 줄이려 사전 대비를 해야 했지만, 이날은 드물게도 아침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집중호우로 지대(址臺)가 낮은 일부 지역에서는 배수조차 되지 않아 물이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오후 네시쯤 되자 학교 앞 사거리가 차의 통행이 힘들 만큼 완전히 물에 잠기고 말았다.


학생들을 스쿨버스에 태워서 하교를 시킨 다음, 부랴부랴 차를 운전해서 교문을 나서는데 벌써 도로는 이미 물길이 이어지는 강물이 되어 있었다. 바퀴쯤 차오르던 물이 교차로에 이르자 곁눈질해 보았는데사방을 에워싼 물이 창문 턱에 이를 만큼 찰랑대고 있었다. 벌써 눈앞으로는 시동이 꺼져 버려진 차 한 대물살에 뒤뚱거리고 있는데, 퇴근 전 차를 학교에다 두고 걸어서 집으로 가자던 동료 선생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다만, 아직은 차의 시동이 꺼지지 않았기에 엑셀레이터에 발을 올리고 속도를 내어 곧장 교차로를 벗어나고 나니 바로 눈앞의 경사진 산업도로에 이르렀고, 이미 도로 양쪽으로는 교차로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차량들이 더 이상의 주행을 포기하고 저마다 물이 차오르지 않을 지점을 택해 길게 꼬리를 물고 주차하고 있었다.


아직은 비에 젖지 않은 옷차림이었고 다음날 출근이 걱정이 되어, 일단 침수된 곳의 배수가 순조로워져 물이 이내 빠질 것을 기대하며 두어 시간 더 기다려서 차를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비는 여전히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비탈길 아래로 보이는 도로 위쪽으로 슬금슬금 물이 계속 차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날이 컴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학교 근처 안전한 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오라는 아내 말을 한쪽 귀로 흘리고는, 이내 바지를 한껏 위로 걷어 부치고 발아래로 찰랑이는 물속으로 씩씩하게 발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우산까지 쓰고 갔으나 세찬 비바람에 이내 무용지물이 되었고, 물이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우산은 몸을 가누는데 오히려 불편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거의 양손을 놀려 헤엄치듯 해서 집으로 가는 방향의 교차로를 빠져나오니 그때부터는 완만한 비탈길이어서 발아래로 고여 드는 물은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기까지 또 다른 교차로 두 곳을  건너가야 했는데, 가슴팍까지는 아니더라허리춤까지는 흙탕물이 차올라 있었고 이미 날은 어둑해져 한 걸음 한 걸음 발로 대중하 지나가자니 무척 애가 쓰였다. 집에 도착을 해서 거울로 확인한 실상(實狀) 모습다소 겁먹은 표정까지 그야말로 비 맞은 생쥐꼴에 다름 아니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 이른 아침 비가 잦아들자마자 차를 주차해 둔 곳으로 서둘러 걸어가는데, 교차로마다 주변 상가에서 내다 버린 물건들로 어수선했다. 몇 년 전 수해로 입은 참상()이 되풀이되고 만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의 피해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수방 대책에 만전을 기했더라면 지금 같은 단순한 폭우로 인한 피해를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걸어서 집으로 귀가하다 감전사(感電死)한 사람들 가운데는 고등학교 학생도 포함되어 있어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이런 류의 재난은 더도 덜도 아닌 인재(人災)라고 치부(置簿)할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세월은 그 후 여러 차례 돌고 돌아 오늘에 이르렀다. 여전히 나는 세차게 내리는 유월의 비와 그 뒤를 잇는 장맛비를 싫어하진 않는다. 하지만, 비는 누군가에게는 폭우가 되기도 하고 감당조차 할 수 없는 홍수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장맛비가 수많은 수재민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면서 중부지역을 오르내리있다. 호사가(好事家)들은 이번 수해로 침수된 차 가운데 값비싼 외제차가 많았다며, 엉뚱하게도 중고차의 시세(時勢)나 침수차의 구별법에 관한 이야기를   남의 속도 모르고 눈치 없이 떠들어 대고 있다. 피해를 입은 쪽에서야 이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분별없는 이야기로 스스로 설화를 자초한 국회의원과는 달리 반드시 자리를 가려가며 해야 할 말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상습적(常習的)으로 침수가 되풀이되던 대구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해마다 여름철 장마가 시작되면 학교 가기가 부끄러웠다. 조금만 비가 내려도 무릎까지 차오르는 빗물과 재래식 변소에서 역류한 오물들을 피해 가며 가까스로 이른 도로가에서 버스를 오르면, 발아래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바짓단과 혹시 날지도 모를 역한 냄새로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다가 어느 핸가 골목길에 하수구가 놓이고 장마 전에 늘 정비하고 나서부터는 웬만큼 비가 내려도 골목길로 물이 는 법이 없었다. 대구시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혜택을 이제야 누리게 된 것 같아 어린 마음에도 시정(市政)에 대해 깊이 쌓였던 원망 서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위정자()들은 가벼운 어려움이 헤어나기 힘든 현실로 쉽게 변하는 지역부터 보살피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이번 수해(水害)가 닥쳤을 때, 서초동 교차로에서 침수된 제네시스 G80 자차(自車)에 올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물이 빠지기를 느긋이 기다리다 언론에 포착(捕捉)되어 서초동 현자(賢者)로 못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사람보다는, 직접 하수구 맨홀 속으로 손을 넣어 침수가 임박한 도로의 물 빠짐이 쉬워지도록 오물을 하나하나 꺼내던 중에 어쩌다 사람 눈에  그 사람이야 말로 칭송받아 마땅한 사람인 것이다. 아울러, 시장 바닥에 신상품이지만 물에 젖은 내의 등을 말려 정가의 10%에도 미치지 못할 가격으로 내다 팔아야만 하는 상인들의 안타까운 심정도 깊이 있게 헤아려 재기(再起)에 보탬이 되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이제, 길고 길었던 비가 그치고 날이 어두워지자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냉기가 실려있다. 계절을 달리 해 지금부터 내리는 비는 잠시 살갗만 스쳐도 오한(惡寒)을 돋우는 찬비일 것이다. 물론, 깊어가는 가을날의 찬비와는 다를 것이지만 지금 내리는 찬비도 찬비 나름대로의 운치(韻致)가 있어 싫지는 않다. 다만, 가을비는 맨몸으로 맞기보다는 최헌이 부른 '가을비 우산 속'처럼 반드시 우산 아래서만 맞을 일이다. 더욱 깊어진 가을날엔 윤정하가 부른 '찬비'라는 노래를 마음속에 담았다가, 계절의 색깔이 다해가는 겨울의 초입, 떠난 사랑 그리워하며 한 번쯤은 소리 낮춰 불러도 볼 일이다.


무엇이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는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게 하고, 간절한 사람들의 가슴타는 목마름을 해소해 주기도 하지만, 지나친 비는 일순간 마()가 되어 사람의 가슴을 회복불능으로 할퀴어놓기도 한다. 어느 때 비가 내리든 치수(治水)를 제대로 하여, 이미 내린 비가 누구에게재앙(災殃)이 되거나 허투루 되지 않도록 모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가슴을 때리는 비에는 사랑도 있고  빗속에 실린 지난날 그리움도 있겠지만, 바로 눈앞을 어지럽게 적시는 현실 속 슬픔도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가을비 우산 속 by 최헌

https://youtu.be/iQZ60_JAzRk


● 찬비 by 윤정하

https://youtu.be/Uf4afMmBb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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