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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01. 2022

욕 친구

영우 산악회 환호공원을 다녀가다

고등학교 동기 모임인 '영우 산악회'가 7월 정기 산행을 포항 바닷가에서 갖기로 했다는 산 대장 이 친구의 통보를 받고는 반가운 마음과 함께 우선은 살짝 걱정이 다. 정기 산행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택해서 실시하니 7월 29일 임 분명한, 이날은 바로 여름휴가가 절정으로 치닫는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보경사가 있는 송라 내연산을 잠시 올랐다가 칠포 바닷가에 그늘막을 치고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추억하며 오랜만에 해수욕을 자는데, 우선은 이들을 맞아 포항 KTX 역사(驛舍)로부터 차에 태우고 하루 종일 일정을 함께 해줄 포항 동기들을 수배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산악회 일이라면 다른 일을 젖혀 두고 앞장서는 산 대장 이 친구와, 산악회 행사의 실무를 두루 주관하는 산악회 총무와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며 통화한 끝에 7월 산행은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무엇보다 포항에서 충분한 수의 그늘막을 확보하기가 어려웠고, 특히 여름철 피서객들로 붐비는 해수욕장에서의 지나친 음주가무는 자칫 볼썽사나운 추태로 이어지거나 주위로부터 손가락질받을 일로 번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7월의 정기 산행 장소를 팔공산 자락의 군위군 동산 계곡으로 서둘러 변경했고, 포항에서의 행사는 여름휴가철이 막바지에 이를 8월 말로 연기되었다.


막상 8월 말에 이르고 나니, 한 달 간의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포항 KTX 역사에서 대구 동기들을 맞을 몇몇 동기들에게 피치 못할 개인 사정이 생겨 그만 일이 꼬이고 말았. 결국, 나를 포함해서 단 둘 만이 대구 동기들과 포항에서의 일정을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우선은 역사에서 환호해맞이 공원까지 차로 이동하는 일부터 골칫거리였다. 다만, 산 대장 이 친구, 산악회 홍 총무와 의논해서 8월 행사의 세부 일정을 조율한 끝에 가급적이면 행사 장소와 이동할 거리를 최소화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 일이었다.


여러 차례의 전화를 통해 의논한 끝에 간략하게 정리한 일정은 다음과 같다.

◇ 포항 일정 ◇
10시 39분 포항 KTX 역사 도착(환호해맞이 공원 이동) ㅡ 11시 10분 환호해맞이 공원 도착 후 스페이스 워크 체험(토요일이어서 체험시간이 다소 길어질 수도 있음) ㅡ 12시 前後 환호해맞이공원 둘레길 트레킹 및 점심식사  ㅡ 오후 1시 여남 스카이 워크 체험 ㅡ 오후 2시 영일대 바닷가 체험(당일, 먹장어 축제가 있음) 및 자유시간 ㅡ 오후 2시 반 영일대 주변 '깃대 횟집'에서 식사 ㅡ 오후 5시 前後 행사 종료 후 포항 KTX 역사 도착 ㅡ 오후 5시 30분 동대구 KTX 역사로 출발

9시 40분까지는 죽도시장으로 가서 미리 주문해 둔 문어를 찾아야 했으므로, 느긋하게 일어난 아침시간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공교롭게도, 내일은 집안사람들이 모여 벌초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어서 친구들과의 행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대구 본가로 출발해야 했기에 긴팔 셔츠와 등산바지 등 필요한 물건들을 먼저 챙겨야만 했다. 하필이면 전날 저녁, 미뤄두었던 골프 모임 월례회가 있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지인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과음한 것이 오늘 아침의 이른 기상을 힘들게 했던 것이다.


대구서 친구들이 점심을 각자 알아서 마련해 올 경우 무더운 날씨 속상할 수도 있포항에서 김밥을 일괄 주문하고 안줏거리도 함께 준비하겠다고 일러둔 터라, 이럴  항상 제자인 죽도 시장 회장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주문한 금액보다도 더 웃자란 문어를 삶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일일이 도시락으로 개별 포장을 하고 고동까지 덤으로 넉넉히 챙겨주는 제자에겐 늘 말로만 하는 고마움이 앞설 뿐인데, 체구만큼 넉넉한 제자의 마음은 이 마저도 손사래 치 한사코 사양을 한다. 초장에다 받침접시까지 여분으로 챙기고 나서 KTX 역사출발하려고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를 넘긴 후였다.


포항 KTX 역사 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곳곳에서 막혀있어, 지금쯤 KTX를 타고 안강 근처를 지나 포항으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홍 총무에게 조금 늦을지 모른다고 양해를 구하니, 친구의 말로, 8분 정도 연착이 될 거란다. 오는 길에, 이번 정기 산행에 동행하는 동기회 김 회장과 통화가 되었는데 마침 서울에서 차를 몰고 와 11시 40분 경이면 도착한다고 하니, 얼추 따로 비용을 들여 택시를 호출하지 않고 우리 차량 만으 이동이 가능할 것 같았다. 대구에서의 출발 시간을 잘못 알고 따로 개인 차 빌려 타고 포항으로 오고 있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선 차량들이 빠져나가기를 한참 기다려 KTX 역사 주차장으로 진입을 하니, 이미 도착해서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앞서 도착한 두대의 차로 각각 나누 출발을 하고, 남아있는 나머지 친구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이들 중에는, 오늘 오후에 행사를 마치고 본가가 있는 칠곡으로 갈 때 함께 내 차를 타고 가기로 약속되어 있는 인쇄업 하는 최 사장과 토목업을 하는 이 사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동 차량들이 한자리에 집결하기로 한 곳은 오후 만찬을 가질 '깃대 횟집' 주변 임시 주차로였다. 마지막으로 도착해서 트렁크에 실린 식수와 문어, 고동을 개인 배낭에 나눠주려 하는데, 길 건너 도로변에는 그새 술판이 벌어져서 아무리 불러 모으려 해도무지 꿈적이질 않는다. 입이 건 홍 총무가 기어이 한마디 욕설을 섞자 차가 쌩쌩 오가는 도로를 한 사람씩 미적미적 건너오는데 건너편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오금이 저려왔다.


평상시 주말과는 달리, 사람들이 많기는 해도 스페이스 워크 앞에는 아직 대기열이 길게 늘어서질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입구로 올라서서 좌우 궤도로 나뉘어 둘러보고 있는데, 구조물이 약간 씩 흔들리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래에서 눈대중으로 보기보다는 꽤 높은 곳까지 올라선 곳에서, 이처럼 갑작스러운 흔들림까지 있을 줄 미처 예상하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곳곳에서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제법 앙칼지게 들렸다. 위에서 아래로 영일대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 오르는 둥 마는 둥 아래쪽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던 몇몇 녀석들이 얼른 점심이나 먹자고 성화를 부린다.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산악회의 정기 산행이니 만큼, 내친김에 환호해맞이공원 둘레길 트레킹은  마저 끝내리라 다짐을 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던 하늘이 맑게 자, 햇살이 오히려 더 따가웠다. 바닷가를 끼고 높낮이가 심하지 않은 능선을 오르내리는데 불평 어린 잔소리가 자꾸 뒷덜미를 잡는다. 산사태를 우려해 산꼭대기를 밋밋하게 밀어서 꽤 넓은 잔디 광장으로 가꿔 놓은 곳에 이르자 건너편 능선 위로 우뚝 선 정자가 보였다. 점심을 먹으며 쉬어가기로 미리 점찍어 둔 곳인데, 무더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쪽 등산로를 오가는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각형의 정자가 열일곱 명의 트래커를 품기에는 깔맞춤이었다. 문어와 고동 도시락을 바닥에 풀어놓고 김밥을 하나씩 나누고 있는데, 건설회사 정 사장이 가져온 밸런타인 30년 산을 누군가가 미리 따 버린다. 위스키 한 잔씩을 마중물 삼아 거침없이 이리저리 소주가 돌아가고 취향대로 각자 가져온 막걸리가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나머지 트래킹 일정은 살짝 물 건너 가버리고, 이 시간, 산봉우리 위 우뚝 솟은 정자로는 사방팔방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이쪽저쪽으로 소통하고 있다.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라더니 지금 우리들만 있는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에 다름 아니다. 다만 술이 떨어진 것이 문제인데, 종아리가 보통 사람 허벅지 굵기인 조 친구가 자원해서 소주를 사러 산아래로 내달린다.


사이 시간이 무료해질 틈도 없이 산중 색담(山中 色談)이 이어지는데, 결코 음탕하거나 요사(妖邪)스럽지 않고 오히려 듣기에 즐겁고 유쾌한 것이 고등학생의 마음으로 받아들이어른들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나보다 한 해 먼저 교직에서 명퇴한 Y고 김 선생의 욕설 섞인 Y담(Y談)그중에도 압권(壓卷)이어서 친구들 배꼽을 빠지도록 만드는데, 친구들끼리 격의(隔意) 없이 이어서 서로에게 난무하는 욕의 성찬(盛饌)은 45여 년 전 고등학교 교실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문득,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 모임을 다녀와서 당시 대기업 임원이었던 김 상무가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짜식들이 말이야. 댓바람에 소주를 네댓 병씩 해치우더니, 서로 삿대질하며 욕설을 해대는데 뭔 사단이 날지도 몰라 자리가 끝날 때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하더라고."


그건, 내가 이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심정과도 같은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인신공격과 다름없는 욕설 섞인 말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상대방에게 비수처럼 찔러내는 놈이 있는가 하면, 듣는 놈은 유들유들하게 이를 그냥 생각 없이 흘려듣 것이 아닌가. 옆에서 듣고 있는 내가 민망하고 아슬아슬하기까지 해서 그만하라고 옆구리를 몰래 쿡쿡 찔러대도 아랑곳없던 친구가, 이제 상대방이 표변해서 아귀같이 덤벼들면 돌아서서 그저 헤죽헤죽 웃어넘길 뿐이었다. 맞아! 우리 친구들 사이가 원래 그랬다. 드러내 놓고 말은 않았지만 우리들에겐 켜켜이 쌓인 세월과 이를 빈틈없이 메울만한 슬기로운 연륜이 있었던 것이다.


5백만 원 짜리라고 친구들이 이름 붙인 소주 다섯 병을 들고 조 친구가 정자로 되돌아온 것은 산을 내려간 지 불과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낯선 산길을 마치 날랜 다람쥐처럼 오르내렸던 것이다. 병당 백만 원짜리로 값이 매겨진 소주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마시고 나니 벌써 두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남 스카이 워크를 돌아오자면 빨라도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릴 것이기에, 원래 일정대로 두시 반까지  '깃대 횟집'에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30여 분간 바닷길을 돌아서 산책하는 걸로 나머지 일정을 변경하기로 하고 정자 아래 산길을 내려왔다.


'깃대 횟집' 1층에다 다섯 테이블을 미리 예약해 두었는데, 이는 울산으로 벌초를 하러 간 '영우 산악회' 박 회장과 대구에서 법회(法會)를 마치고 합류할 김 상무, 그리고 포항의  다른 김 친구가 오후 만찬에 자리를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술자리가 이어졌는데, 운전을 해야 했기에 이 모든 상황을 맨 정신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이 모든 상황 하나하나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소주나 맥주가 차려 나오는 족족 금세 비워지고, 그 사이의 틈새를 메꾸는 친구들의 고함과 욕설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들어도 원인과 결과가 거의 해독() 불가였다. 서로의 멱살을 부여잡을 만큼 험한 말이 오가길래 가까이 다가가서 잠시 진정이라도 시켜볼라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저들끼리 돌아서서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이런 나쁜 시키들 같으니라고! 마음속으로 욕을 삼키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는데, 이는 속이 상해서라기보다는 그저 허탈한 마음으로 짓는 웃음이었다.


박 회장이 올 때는 친구들이 하나 씩 가져가라고 울산의 명물인 밤과자와 만주 세트를 스무 세트나 선물로 가져왔다. 그 마음 씀씀이도 고맙지만, 이번 행사를 위해 포항 친구들을 비롯해서 영우 회원들이 두루 도움을 주어 아쉬울 것 없는 넉넉한 여행이 되었다. 이번 행사의 일정을 짜고 안내한 입장에서, 이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진행할 때마다 매 순간 마음이 흐뭇했다. 얼핏 보아도, 식당 안에서만 소주와 맥주를 쉰 병 이상 너끈히 비운 것 같은데, 한 사람도 아무런 탈없이 모두 멀쩡한 것으로 미루어 저마다 건강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뒤늦게 합류한 김 상무와 동기회 김 회장이 포항 KTX 역사로 친구들을 바래다주러 갈 때, 나를 비롯해서 최 사장과 이 사장은 내 차로 칠곡으로 바로 출발했다. 여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화제로 한참 이야기 꽃을 피워가며 청통 휴게소에 이를 즈음, 울산 사는 김 친구가 대구서 2차를 하려고 하니 그곳으로 합류하라고 난리다.  내일 벌초하러 새벽 일찍이 집을 나서야 했고, 이 사장은 마침 전날 어금니 임플란트 시술을 탓에 술은 마실 순 없었지만, 약속된 장소가 늘 궁금해하던 동대구역 인근의 '서울 전집'이어서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카톡 대화방에서 걸핏하면 '서울 전집'이 번개모임 장소거론되곤 하기에 과연 어떤 곳인지, 우리 셋 모두가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최 사장만 그 자리에 계속 남겨두고 이 사장을 칠곡 집에다 태워준 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본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아홉 시가 지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나머지 친구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음악을 연주하는 7080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자정 너머까지 하루를 고스란히 함께 보냈다는데, 모두 대단한 에너지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내가 벌초를 한 일요일을 건너뛴 월요일은 총 동문 골프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영우 산악'의 8월 정기 산행 행사로 포항을 다녀간 동기 여럿을  포함해서 모두 스무일곱 명의 동기가 대회에 참가해서 기수별 최다 참가 기수에게 수여하는 참가상과 부상 30 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것이, 골프를 치는 내내 뒤끝 없는 욕설로 서로를 견제해 가며 일구 일구(一球 一球)를 칠 때마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으리라.


살짝 인생이 저물어가는 시기, 서로 허물없이 터놓고 욕할 수 있는 친구들이 가까이 있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따로, 격식을 차리고 체면 가려가며 행동해야 할 일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한쪽 어깨를 비워두고 동무할 친구를 기다릴 수 있는 우리들이야 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1차 집결지에서 산행도 하기 전에 판을 벌린 친구들
스페이스 워크에서의 단체 사진
 포토존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친구들 1
포토존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친구들 2
환호해맞이공원 둘레길 잔디 광장에서의 단체 사진
정자 안 점심 시간 1
정자 안 점심 시간 2
바닷길 트래킹
깃대  횟집에서의 만찬 건배
대구에서의 하산 행사, 노래방에서 열창하는 정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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