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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Sep 29. 2022

삶과 음식,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편식에 대하여

지금이야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지만, 어릴 적 나는 편식이 무척 심했다. 중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난생처음으로 버스 통학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구 경계 서쪽 끝에서 남쪽 끝에 이를 만큼 길이 먼 장거리 통학이었다.  무렵의 대구 중학교 평준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명문중학교란 그늘이 도시 전반에 드리워져 있었다. 다시 말해, 학생들을 주소지와 가까운 중학교로 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이전까지 명문 중학교의 반열(班列)올라있던 경북중학교(평준화가 된 후 경운중학교로 개칭)와 대구중학교, 경북사대 부속중학교는 대부분의 학생이나 학부형들이 선호하는 공통 학군으로 묶어서, 살고 있는 주소지에 상관없이 학생들을 무작위로 추첨해서 배정을 했던 것이다. 대구에선 1969년에 처음으로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를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4년 뒤 1973년 실시된 추첨에서 운이 좋게도 나는 대구의 명문 공립중학교인 대구중학교로 배정을 받게 된다.


매일 느긋이 걸어서 집 근처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1시간 가까이 콩나물시루와 다를 바 없는 노선버스를 타고 멀리 있는 중학교로 통학을 하게 되었다. 지각을 하지 않으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등교를 서둘러야만 했다. 아침 밥상은 고봉으로 담은 밥과 국이 계란 프라이와 네댓 개의 반찬과 함께 차려 나오는데, 어떤 날은 허겁지겁 급하게 밥을 먹느라 뜨거운 국에 그만 입속을 데는 일도 있었다. 요즘과는 달리, 노선버스의 배차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버스를 기다려야만 안심이 되었는데, 손님들로 만원이 되면 버스가 그냥 정류장을 지나쳐버리는 일도 있었다. 닭 쫓던 개의 심정으로 매캐한 연기를 폴폴 뿜으면서 멀어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눈앞에 닥쳐올 학교 선도부와의 불편한 해후(邂逅)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등교를 무조건 서두를 수밖에 없던 것이다.


본래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해 국물이 있는 탕이나 찌개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아침마다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손길을 마다하며 국을 밥상 한쪽으로 내몰기는 더욱 고역이었다. 어머니는 혹시라도 먹다가 체할까 봐 꼭 국물 있는 아침상을 차려냈지만, 느긋하게 숟가락 놀리며 음식 맛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손이 자주 가는 반찬은 따로 있었다. 일단, 더운밥을 식히려고 찬물에다 밥을 말고는, 고추장으로 데쳐 버무린 오뎅 조림과 오징어 채 무침을 반찬 삼아서, 물로 휘저은 밥을 식은 국물 마시듯 후루룩 목구멍으로 삼켜버리곤 했었다.


결국, 등굣길의 아침상은 찬물로 만 밥과 몇 가지 조림 반찬이나 건오징어 채 무침, 오이무침 등으로 단출해졌는데, 어느 날부터 빈혈 증세가 한 번씩 나타나더니 얼굴로 마른버짐이 번지기 시작했다. 성징(性徵)도 무척 빠른 편으로, 6학년부터 웃자란 키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 키 순으로 매긴 출석번호가 66명 중에서 61번이었다. 나보다 뒷번호로 야구부원 둘과 펜싱 부원 한 명이 더 있었지만, 출석 관리를 위해 작은 키임에 뒷번호로 선 배정했을 테니, 사실상 난 학급에서 키가 가장 큰 축에 속했던 것이다. 한참 성장할 시기에 거의 물만 먹다시피 하고 학교로 등교를 했으니, 영양부족으로 인한 폐기(弊氣)가 온 얼굴로 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몰랐다.


키가 크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딱 중학교까지 만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키순으로 조정된 출석번호가 62명 가운데 30번대 후반이었고, 고 3 때 출석번호는 32번이었으니 키순으 중간이었고, 내 나이 전체로 보아도 고만고만한 키로 밖에 볼 수 없는 170cm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발육이 왕성했을 십 대 초반에 편식함으로써 성장이 지체되었을는지 모르지만, 당시 등굣길에 내 입맛을 사로잡았던 오뎅 조림이나 건오징어 채 무침은 예순의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내가 최애하는 반찬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서너 해전부터 명절 다음날 여동생들이 집에 올 때는, 막내 여동생이 오빠가 좋아하는 반찬이라며 꼭 건오징어 채 무침을 해 온다. 그런데, 흔히 보는 오징어 진미를 그저 채 무침한 것이 아니라 건오징어를 살짝 물에 불려 불 위에서 슬쩍 구운 후 잘게 손으로 찢어, 간장과 참기름, 고춧가루와 게 썬 청양고추를 다진 마늘과 함께 버무린 것이다. 어머니는, 물에 불리지 않고 마른오징어를 그대로 쓰거나 불에 살짝 구워 오징어 특유의 맛과 씹는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데 반해, 막내 여동생은 물에 불린 오징어의 부드러운 식감과 특유의 구수맛을 살리는데 더 치중을 한다. 어쨌거나, 오빠를 위한 명절 음식으로 건오징어 채 무침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만들어 오니 정성 만으로도 우선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올해 설날부터는 납작 만두와 메밀묵을  새로운 명절 음식 메뉴에 포함을 시켰다. 출향(出鄕)한 대구 사람들이 고향의 으뜸가는 먹거리로 가운데 하나로 꼽는 것이 납작 만두인데, 이젠 어디서 살든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마트에서도 쉽게 살 수가 있다. 결국, 혀끝을 속일 수 없는 익숙한 맛이 문제인데, 납작 만두로 소문난 서문 시장이나 명맥(命脈)고 있는 몇몇 전문 분식점에서도 먹어보면 우리가 익히 알던 그 맛이 아니다.


납작 만두는 속을 당면과 부추로 채워 얇은 만두피로 싼 것인데, 열 개를 하나로 낱낱으로 겹쳐 놓은 만두를 식용유를 흥건하게 두른 철판 위에다 놓고, 부침 주걱으로 위를 지그시 눌러 기름이 자글자글 밖으로 배어나도록 굽는다. 축축하게 제대로 익어서 구워진 만두를 주걱 끝으로 모로 눌러 반으로 자른 만두 속에다, 파를 다져 넣은 간장에 식초를 약간 섞어 고춧가루를 풀어 묽게 만든 간장 소스를 안으로 촉촉이 배여 들도록 만들면 정말 먹음직한 납작 만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입맛이 바뀐 탓인지는 몰라도 어릴 적 골목길 어디서나 군것질 삼아 먹었던 그 납작 만두를 이젠 좀처럼 맛볼 수 없었는데, 마침 여동생이 직장 근처의 납작 만두집에서 옛날 우리가 먹었던 그 맛과 비견할 만한 맛을 찾아냈던 것이다.


과연, 올해 추석도 납작 만두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추석 차례를 지내진 않지만, 문어숙회를 포함해서, 함께 먹을 갖가지 명절 음식들을 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납작 만두로 서로 경쟁하듯 젓가락이 오갔는데, 막내 여동생이 혹시 싶어서 따로 한 팩을 여분으로 더 포장해왔지만 옛맛에 허기진 사람들 입 속으로 마치 게눈 감추듯 금세 사라졌다. 새로운 메뉴로 준비한 메밀묵은 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는데, 다이어트를 위한 건강식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를 비롯해 주로 여자들이 묵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중학시절부터 시작된 어릴 적 오랜 편식에서 벗어난 것은 포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면서부터였다. 물론, 대학시절에도 술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의 애주가이면서 말술이었지만, 기름진 안주와 함께 자주 술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주머니 속이 넉넉하진 못했다.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생맥주집이나 학교 주변 막걸리 집에서 마신고 난 피쳐나 주전자 수를 헤아려 가며 야무지게 술을 들이켜긴 했어도 그저 안주삼아 먹는 건 마른 멸치나 단무지뿐이었다. 종종, 소주를 맥소롱이나 써니텐에 섞어 마실 때나 깡소주를 대폿잔이나 병 채 마실 때, 속이나 편하도록 고갈비와 닭꼬치를 안주 삼아 속을 든든히 채울 때가 그나마 술을 마시며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그래도 여전히 입은 짧아, 각종 채소나 젓갈류, 돼지고기나 버섯이 들어간 음식은, 막 유행이 시작되던 막창과 함께 입맛에 맞을 거라며 주위에서 아무리 권해도 좀처럼 입에 대질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하숙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음식을 가리지 않게 되었고, 결혼하기 전까지 예전보다 더욱 잦아진 술자리와 비례해 체중이 마구 불어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멀리했던 음식들은 어른이 되고 나니 이전에 몰랐던 입맛이 돋아나도록 오히려 기름칠을 했는데, 산 낙지나 곱창, 명란이나 창난젓 등이 바로 그런 음식들이다.


다시, 지난 추석을 떠올려 보자. 무엇이든 어울려 먹는 음식 속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함께 먹은 것은 음식이지만, 골고루 스며들어 우리들의 마음을 살 찌운 것은 음식 속에 깃든 이야기이다. 그 속엔 고향 마을이 있고, 학창 시절이 있고, 부모형제와 친구, 혹은 지난(至難)하게 흘러온 세월이 있다. 결국 잊지 못하는 것은 음식의 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지난 세월의 갖가지 추억인 것이다. 그래서 삶은 그 맛이 달기도 하지만 쓸 때가 있고, 매울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맛이 싱겁고 실 때도 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처한 상황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마다 약간씩 달라질 뿐인 것이다.


추석 전날, 어머니를 모시고 삼대(三代)가 집 근처 막창집을 찾았다. 명절 전날엔 살아생전의 아버지를 모시고 자주 찾던 곳이다. 열명 가까이 가족끼리 둘러앉은 자리에서, 아직도 아버지의 빈자리가 허전했던지 연신 어머니는 아버지의 늘그막 식탐(食貪)을 떠올리며 또 울먹거린다. 아버지 생전에 못 다해 준 음식이 그만 눈에 밟혔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 이 자리,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막창 속에는 기쁘 일이든 슬픈 일이든 맛나게 익어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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