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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Oct 01. 2022

익숙한 것들

아침일기 5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집 밖 나들이를 했다. 굳이 나들이란 말로 못을 박은 이유는, 처음 집을 나설 때부터 전혀 어떤 목적을 머릿속에 두고 있지 않아서이다. 해마다 장마가 시작되는 유월말에 이르면 연초부터 잘 정돈되어 오던 삶의 질서가 일순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따로, 운동기구나 운동시설에 몸뚱이를 의탁하지 않고, 그저 바닷길을 걷거나 운동 삼아 집 근처 야트막한 산길을 트래킹 하다 보니 바깥 날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장마철처럼 일기 불순한 계절이 오면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이 차츰차츰 불규칙해지면서 어느덧 게으름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 돌이켜보니, 여름이 가고 가을의 문턱으로 들어선 지가 엊그제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 속엔 어느새 계절 특유의 서늘함이 묻어 나온다. 지난밤, 홑이불 만으로 몸의 온기(溫氣) 갈무리하기에는 약간 모자람이 있었는지 몰라도, 자다 깬 몸 위로 슬쩍 소름이 돋더니 그새 잠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두 차례 연이은 태풍으로 제대로 바다가 뒤집혀서인지 바닷길로 이어지는 가까운 바다의 물색은 아직도 황톳빛 섞인 옅은 잿빛이지만, 바닷가 모래톱까지 태연스럽게 밀려드는 잔 물결은 이와는 다르게 하도 해맑아서 밉상스럽기까지 하다. 겉으로 보이는  다가 아닌 것이, 수마(水魔)모질게 할퀴고 간 흔적들은 여전히 포항 구석구석에 상처로 남아, 이른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를 복구하느라 너나 할 것 없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대구 사는  명의 고등학교 동창생 녀석들 이곳까지 봉사를 자원(自願) 와서, 뻘이 공장 안까지 흘러들어 엉망이 된 포스코의 공장 내부 정리를 위해 연신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데, 친구 사이떠나 한 사람 포항시민의 입장에 볼 때도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바닷길로 이어지는 큰길을 따라 관광버스 한 대가 스쳐 지나가는데, 돌아보니 멀리 삼거리에서 신호를 대기했다 따라 오버스가 다섯 대나 더 있다. 버스 앞 차창 유리에는 '장락초'라고 인쇄된 A4 용지붙어있고 버스 번호가 충북으로 시작되는 번호판인 것을 보니 이른 아침부터 길을 오느라 서둘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길게 대열을 지어 서행하고 있는 버스들을 바라보자니, 서랍 정리를 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먼 기억 속 사진이 눈에 들어온  익숙한 장면 속에서 색다른 생각문득 들었다. '그래, 나도 한  학생들을 인솔해서 수학여행을 떠나온 적이 있었지.' 학년 부장을 여러 번 해 본 경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앞서 간 버스들이 길게 대열(隊列)을 이루고 주차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틀림없이 스페이스 워크를 체험할 목적으로  것일 텐데, 이곳에 주차를 하고 원 안 목적지까지 인솔해서 가려면 초등학생 발걸음으로 족히 10 여 분 이상 되는 길을 더 걸어가야 한다. 버스는 멈춰 있는데도 아이들이 아직 내리지 않는 것을 보니, 사전 답사를 충분히  않았던지, 아니면 버스기사들 역시 이곳이 아마 초행(初行) 길성싶다.


버스 한 대가 주차를 머뭇거리다 굽이진 공원길을 지나서 돌아나갈 때, 미리 와서 주차를 가지런히 마무리한 버스 대열 가까이 이르렀다. 운전기사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이 서 있는 틈으로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있는 사람보자 그만 오지랖이 발동하고 말았다. 인솔자로 보이는 젊은 담임 선생님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공원 입구까지 자세한 길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버스 대수로 추정하건대, 여섯 학급이나 되는 만만찮은 수의 초등학생들이 안전하게 스페이스 워크를 체험하도록 하자면, 돌아와서 다시 승차하기 까지 서둘러도 두 시간 이상족히 걸릴 텐데 개장 시간인 10시를 이미 넘기있었다.  더 가까이, 공원 입구 임시 주차선을 그어놓은 곳까지 이동해서 주차하라고 안내를 해주고는 잰걸음으로 버스 뒤를 쫓았다.


공원 입구에 이르니, 먼저 간 1호차 앞으로 6호차까지 도로 한쪽 노면을 따라 길게 버스가 주차되어 있고, 벌써 아이들은 줄을 지어 열심히 공원 비탈길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슬쩍 운전기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체험 예정시간으로 1시간밖에 잡혀있지 않다고 한다. 아마, 이곳을 잠시 둘러보고 점심시간에 맞춰 곧장 경주로 가서 오후 일정을 소화하고, 하룻밤을 묵고 나서 다음날 오전에 경주를 두루 관광한 후 귀가할 요량으로 보이는데, 일정에 차질 없이 끝까지 안전한 여행길이 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수학여행은 학생들 뿐 아니라 인솔하는 선생님 마음까지 설레도록 만든다. 교직에 임용되어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날 때가 더욱 그러했다. 옛날 월요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전체 조회를 하고 있을 때 포항 시내를 막 벗어나서 7번 국도 끝자락 내리막 사거리에는, 수학여행단을 실은 관광버스들이 길게 대열 이루고 신호대기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교장선생님의 훈화에도 아랑곳없이 학생이나 선생님들의 눈길이 도로 쪽으로 쏠리곤 했는데, 열린 버스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내지르는 노랫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거나, 남학생들이 운동장에 줄지어 서있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버스에 탄 여학생들이 비명에 가까운 쇳소리를  때 특히 심했다. 해 뒤 학교가 도로가 보이지 않는 산속으로 옮겨가고, 아침 조회를 강당에서 하게 되면서부터 월요일 아침에 누릴 수 있었던 특별한 즐거움 하나가 사라진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못내 아쉬운 일이다.


수학여행단을 뒤로하고 다시 바닷가 쪽으로 눈을 돌리며 걷고 있자니, 산책로 아래 데트라포트 안 쪽 제방 가까이로 황어인지 숭어인지는 몰라도 물고기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다. 처음 포항에 와서 낯설었던 바다 풍경은, 여름철 해수욕장에서 낚시꾼들이 추와 낚싯바늘이 여럿 달린 낚싯줄을 힘 자라는 대로 바다 쪽으로 투척(投擲)한 후 이리저리 휘저으며 훌치기낚시를 하는 광경이었다. 낚싯줄을 멀리 던지고 난 후 한 번씩 훌쳐낼 때마다 낚싯대는 마치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물고기처럼 퍼덕퍼덕 아래 위로 휘청거렸다. 팽팽하게 버티는 낚싯줄을 힘껏 물 밖으로 끌어내면 낚싯바늘에 팔뚝만 한 황어 서너 마 아가미나 지느러미 쪽 몸통이 코 꿰인 듯 걸려 다. 그러데, 이 황어란 놈은 별맛이 없는지 횟감이나 매운탕으로는 인기가 없고, 그저 꾼들이 손맛이나 느끼려고 훌치기낚시를 한다고 했다. 당시, 별생각 없이 보았던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오늘 바로 눈앞 바닷물 속을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스러웠다.


줄곧, 바닷가를 따라 걷고 있는데 멀리 바닷가를 에워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귀에 익숙한 차임벨 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11시가 가까워진 것을 보니 2교시 마침 종임에 분명하다. 소리의 세기나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해보니 도로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의 벨소리가 아니고, 시내 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자리 남자 중학교에서 울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뜻밖의 장소에서, 이전엔 한 번도 들어 본 이 없귀에 익숙한 소리가 갑자기 들려와 흠칫해서 둘러보니 근처를 오가는 사람들 표정 모두가 하나같이 무덤덤하기만 하다. 아마 이들은 나와는 달리, 처음부터 의미 있는 소리로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관심이 없어서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래, 선생으로 40년 가까운 세월을 학교에서 근무를 했으니 벨소리에 익숙하고 민감한 건 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


결국, 사람 사는 누구에게나 똑같다. 익히 알고 있는  이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무관심한 일을 두고,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서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쉬는 시간을 가늠한 것이 벨소리가 아니라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다 각기 다른 깃발을 걸어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시간과 시간 사이의 물리적 간격을 가늠하는 감각과 깃발의 색상에 대해 남보다 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서로 다른 벨 소리나 소리의 길이, 타종(打鐘) 간격에 차이를 두고 가늠하도록 했다면 오늘 이 소리를 듣고 솔깃했던 사람들은 바로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는 각각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누구에게든 저마다 익숙한 삶의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가던 길의 반환점과 가까워지니 모자 쓴 귀밑머리 아래로는 송골송골 땀이 배이땀으로 젖어  볼품없이 길어진 귀밑머리가 거슬려서 돌아가는 길에 이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전 10여 년 살던 곳 가까이에 프랜차이즈 헤어커트 전문점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서 바닷 건너, 아파트 단지 사잇길로 빠져나오는데 한 골목 앞서 오래된 동네 이발소가 보인다. 머리를 커트하는 이발비가 칠천 원임을 알리광고가 창문에 코팅되어 있어, 요즘 현으 옮기자면 착하기 이를 데 없는 가격인지라, 얼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나이 지긋한 이발사  곱게 차려입은 주인아주머니가 손님을 기다리고 다. 먼저 온 사람이발을 마치나가는데도 나보다 앞서 온 손님이 전화를 받느라고 기꺼이 순서를 양보해준다. 보기 드문 동네 이발소의 넉넉한 인심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발소 안 곳곳에 절어 있는 싸한 박하향 스킨로션과 면도 거품 냄새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금세 숨쉬기에 편해졌는데, 곧 머리를 만져줄 이발사의 이발 솜씨도 잔뜩 기대가 된다.


십여 년 전 학교 구내 이발소가 없어진 이후로 머리에 바리캉을 대고 밀어서 깎는 이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땀으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훔쳐서 말릴 때, 얼굴 위를 분주히 오가는 이발사의 따뜻한 손길과 손에 배인 익숙한 살 냄새로 인해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들숨 들이켰다. 미용실에서 가위로만 커트한 머리와는 달리, 남성적 스타일두피(頭皮)를 따라 단정하게 간추려지고 있머리선을 지켜보면서 거울 속 얼굴이 만족스럽다는 듯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발을 마치고 나서, 팁을 포함해서 만원을 기분 좋게 던져주고 나오려다 혹시나 해서 이발 값을 물어보니 머리 감는 비용 포함해서 팔천 원이란다. 마침, 휴대폰 케이스에 반으로 접어 끼어둔 천 원짜리가 있어 이발비로 주고 나오는데, 절약해서 남은 이천 원은 가성비 좋은 동네 이발소를 찾는 수고비로 나 자신에게 주는 팁이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집에 도착해서 확인한 걸음수가 거의 만 사천보에 가까웠다. 땀 흘린 운동을 하고 난 후에는 의욕과 열정의 행복 물질, 도파민이 뇌의 신경세포에서 분비가 된다고 한다. 오늘 흘린 땀에서 느낀 행복감으로 인해, 그동안 게을러졌던 몸은 예전처럼 다시 부지런해질 것이다. 오늘의 몸은 내일 해야 할 일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미리 생각한 내일도 오늘처럼 당연히 행복한 하루가 될 것이다.


공원 맞은편 주차로에 주차하고 있는 수학여행단 버스
산책로 제방 아래를 무리지어 유영(游泳)하고 있는 물고기들
동네 이발소
이발소 안 풍경
아파트에서 바라 본 황혼녘의 스페이스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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