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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Oct 06. 2022

꽃을 사는 사람

영일대(迎日臺) 해수욕장 둘레길을 휴일이나 주말에 다 보면 두무치 공용주차장 길목에서 꽃을 파는 노점(露店)종종 마주치게 된다. 두무치, 혹은 설머리로 불리는 이 일대(一帶)는, 환호공원 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 해수욕장까지 줄곧 이어진 곳을 이르는데, 길가로는 많은 횟집과 근사한 커피숍이 늘어서 있어 입소문을  몰려든 외지 사람들로 늘 붐비고 다. 집을 나서 이곳까지 이르려면 재바르게 걸어도 족히 사십여분 걸리는데, 그때쯤이면 모자 쓴 이마엔 살짝 땀이 맺히고, 이런저런 생각으 정신도 약간 혼미(昏迷)스러워진다. '맞아!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갈 때까지는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늘 이 길을 지나쳐 가곤 했었어.' 느닷없이 머릿속을 파고든 생각이었다.


지난 주말에도 이 길 앞을 정신없이 걷고 있다가 꽃을 든 네댓 살 어린애와 그만 부딪힐뻔했다. 보라색이었는지 하얀색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안개꽃처럼 꽃망울이 꽃을 다발로 묶은 었는데, 고사리 손으로 치켜든 꽃다발은 그리 커 보이진 않았지만 마스크 쓴 아이의 작은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었다. 가던 발걸음을 가까스로 피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이는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꽃을 들어 보인다. 아마 눈앞 예쁜 꽃을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었으리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노점 주변을 둘러보니, 막 셈을 치른 듯한 할머니가 아이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데 얼굴로는 박꽃 같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아이의 할머니가 분명하지만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귀밑 머리만 조금 흴 뿐 웃음 띈 얼굴에는 잔주름 하나 없어 보였다. 슬쩍 아이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가 얼굴을 드는데 그만 눈이 서로 마주치고 말았다. 가벼운 웃음으로 먼저 목례(目禮)하니, 웃음의 의미를 금세 알아차린 듯 바로 되돌려 웃어주는 곱게 휜 눈매가 아이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나(刹那) 같은 순간이었긴 해도, 잠깐 있다가 그 자리를 벗어나고부터는 그만 생각이 길어지고 말았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무심하게 지나쳤던 여러 광경들이 계절과 장소를 달리하머릿속으로 펼쳐지는데, 꽃을 사는 사람들 속에는 어린 학생이 있었고, 젊은 연인들이 있었으며, 나이 지긋한 부부와 심지어는 군인도 있었다. 을 든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환했으며 그런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자 마음도 슬그머니 밝아졌다. 그리고는, '꽃을 사는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인지 이들의 속마음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물론, 꽃을 사는 사람들은 꽃을 품 안에 안을 사람들 기쁨을 듬뿍 누릴 수 있도록 기꺼운 마음으로 꽃을 샀을 것이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좀 전, 노점 꽃바구니마다 한 움큼씩 꽂혀 있는 형형색색(形形色色) 꽃들의 기색(氣色), 곧 품 안에 안길 주인을 기다리고 있 듯 저마다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꽃을 사는 사람들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을 모으려 할 때 드는 위화감(違和感)은, 지나간 일을 아무리 떠올려기쁜 마음으로 꽃을 산 기억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아서인 듯하. 아니, 지난날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있긴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할 때와 같이 의례적으로 꽃을 사들고 가야 할 순간도 있었을 테니. 그런 점에서 자면, 내가 마음이 내켜서 꽃을 사고자 했을 때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기쁨보다는 슬픔이다.


지난 추석을 맞아, 하루 미리 아버지를 찾았을 때 공원묘지 앞 노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밝고 화려한 색깔의 조화(造花)들이 슈퍼 앞 가판대(街販臺)가지런히 진열되어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공원 앞 마지막 꽃집'이란 푯말이 마음을 이것은 아니었지만, 지난번에 꽃을 산 슈퍼 앞이 주차할 공간이 넓어 이곳에 다시 차를 세웠다. 공원으로 꺾어 들어가길목에 노점이 하나 더 있었던 기억이 주책없이 떠올랐지만, 어머니의 성화를 이겨낼 순 없었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安息)을 찾은 후, 이내 이 노점 어머니의 단골이 되었던 것이다.


난 원래 색상이 화려한 꽃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 영전(靈前)에 올릴 꽃은 화려한 것을 고르고 싶었다. 제단(祭壇) 양쪽의 화병(花甁)에 꽂을 꽃으로 붉고 노란 장미를 골라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니 썩 만족스러워하셨다. 아버지를 모셔 둔 평장(平葬) 묘에 이르니, 가지런히 구획(區劃)해 놓은 묘지 사이로 주인 잃은 꽃다발이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어, 처음엔 성묘객(省墓客)들이 꽃을 교환하고 나서 아무렇게나 버린 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난번 태풍이 닥쳤을 때 계곡 속으로 몰아친 바람을 못 이겨 제단의 화병 속에서 빠져나온 이었다. 대충, 꽃이 나뒹굴고 있는 자리를 가늠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원래 있던 자리를 짐작해 화병 속에다 다시 꽂아고는 가벼운 례로서 망자(亡者)위로했다.


성묘 후, 잠시 자리를 물러나서 살펴보니 수수한 색상보다는 화려한 색깔의 조화를 골라 온 게 썩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 국화는 제철이어서 보기에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이미 이전에 꽃아 둔 국화가 모진 비바람으로 때가 타 몹시 지저분했지만, 화려한 색깔의 조화는 염색술(染色術)이 뛰어나서인지 철이 여러 번 바뀌어도 탈색(脫色)되지 않고 여전히 화사한 색상 그대로였다. 오래된 조화 대신  꽃으로 다시 치장을 하고 나니 다시 묘지 주변이 환해졌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쓸쓸함이 깃들면서  못 할 미안스러움 솟구쳤다. 큰 여동생 생각불현듯 머릿속으로 떠오른 때문이었다.


동생은 멀리 창원 공원묘원에서 안식에 들었는데, 기일(忌日)이 추석 바로 이틀 전이다. 말하자면, 어제저녁이 동생의 기일이었던 것이다. 큰 여동생은  내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꽃처럼 예쁜 아이였다. 묘지석(墓地石)비문(碑文), '늘 우리 가족에게 천사였던 어머니, 당신은 항상 마음속 꽃이었습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소서'라고 새겨두어 늘 우리들 마음속 꽃으로 남아있는데, 안타깝게도 명절눈앞에 두고 유명(幽明)달리 한 이후론 추석이 가족들을 한 자리로 불러들이는 즐거운 시간이면서도 동생의 빈자리가 못내 허전한 그런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눈앞에서 바람에 살포시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 꽃같이 예쁜 동생 얼굴 다시 생각났고, 아버지 살아생전에 어머니와 함께 동생이 잠든 곳을 찾아 동생의 환한 웃음을 화병 속으로 나눠  일이 떠올라 그만 마음속 깊이 억눌러 두었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날이 희미해져 가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도, 살아생전 큰 여동생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예뻐했던 아버지가 잠드신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다.


이처럼, 내가 꽃을 사면서 드는 마음이 슬픔으로 치우칠 때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헌화(獻花) 꽃을 살 때이다. 망자에게 바치는 꽃. 생전에 한 번도 이들에게 꽃을 안긴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매번 꽃을 올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짙은 아쉬움과 깊은 슬픔이 덧칠 수밖에 없다. 요란스러운 웃음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주변을 살피니 어느새 사람들이 봄비는 영일대 앞이었다. 나도 모르게 빠져 들었던 상념(想念)에서 벗어나자 오가는 길이 덩달아 다시 환해졌다.


영일대 앞 광장에는, 지난봄 경북도민 체전을 기념해서 세운 조형물(造形物)이 여전히 꽃단장을  채 고운 자태(姿態)로 서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장미화원(薔薇花園)을 끼고 옆길로 돌아서 영일대 해상 누각에 오르니, 젊은 여자 몇 명이 누각의 모퉁이에 서서 포스코를 배경으로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꽃다발한 아름 안고 있는 여자를 중심으로 네댓 명이 머리를 맞대고 셀카를 찍고 있는데, 얼굴 만면에 띤 생기발랄한 표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마음이 밝아졌다. 꽃 같은 젊음이 한아름의 꽃다발과 함께 저마다 예쁜 꽃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를 위해 꽃을  때의 즐거운 마음이 이를 지켜보는 사람에게까지도 전해지고, 잠시 우울했던 마음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끔 했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무심코 길을 다가, 아니면 누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불같은 마음으로 달려 나가 누군가의 가슴속을 행복으로 따뜻하게 달궈줄 마음이 생겨나면 좋겠다. 이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꽃을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모로 무심하기 짝이 없던 한 남자의 푸념에, 지는 노을은 꽃처럼 붉기만 하다.


영일대 앞 조형물
저물어 가는 오후, 햇살 드리운 영일대
주말이면 표지판 주변에 꽃 노점이 들어선다.
영일대를 찾은 관광객들
노을이 붉은 어스름녘의 환호 공원과 스페이스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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