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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Oct 11. 2022

여주 가는 길

서울 사는 고등학교 친구들 몇몇이 오래전부터 이어온 모임이 있다. '털레모'라 하여, 털레털레 둘레길을 걷다가 뜻이 맞아 만든 모임이란 뜻이다. 몇 년 전부터 이 모임의 멤버몇몇SNS로 소통하다가 이전부터 친분이 두텁던 세명의 친구가 먼저 지난해 10월 포항을 다녀갔다. 고등학교 동기라지만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서로 알고 지냈던 친구도 있고, 졸업 이후 동기 모임을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친구도 있다. 나중에는 이들을 통해 이름만 겨우 아는 친구들생겨났다. 우리들 나이의 남자 고등학교 동기란 게 다른 세대와는 유별나게 달라, 한번 이름이 귀에 익고 나면 그냥 오래된 친구다를 바 없는 친근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트는 것이다.


털레인 셋과 함께 지난 2월의 안동 여행길에 동참하고 나서, 이들의 추천에 따라 카카오톡에 초대되어 자연스럽게 나도 털레인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예전처럼 자주 모이진 못하지만, 멤버들 중 서넛이라도 모여 서울 주변의 이름난 둘레길을 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부러움 앞섰지만 먼 길을 선뜻 나서기엔 아직까지는 마음속이 저어했다. 포항 촌놈이 망설임 없이 길을 떠나기에 서울은 여전히 낯설고 여러모로 서툰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약속된 장소로 찾아갈 때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하철을 다 하더라도 '환승(換乘)'이란 벽을 넘어서기가 만만찮았고,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 알 수 있는 을 약속 장소로 택한다 할지라도 이는 타국(他國)의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 도시의 유명한 랜드마크를 찾아 나서라는  진배없는 것이다.


한 달 여전 여주에서의 모임이 성사(成事)되고 나니, 하도 오랜만에 갖는 모임이라 대부분의 털레인들이 리를 함께 하겠다고 뜻이 모여졌다. 그 무렵, 10 여일의 부부동반 그리스 여행을 마치고 입국하게 될 장로(長老)까지 참여 의사를 밝히고 나나로서는 여러모로 고민이 되었다. 이번 여주 모임은, 카카오톡 대화방을 통해 아직은 이름만 익숙한 몇몇 친구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니와, 지난번 안동 여행길에 내 차에 고 내린 강 변호사의 지갑까지 이참에 돌려줄 수 있었때문이었다. 마침,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러 막내가 서울로 올라간다 하기에, 여주역까지는 내차로 갔다가 각자 볼 일을 보고 다음날 다시 여주역에서 만나 함께 돌아오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운을 띄우니 내 생각에 흔쾌히 동의 주었다. 마침내 오매불망(寤寐不忘), 마음속으로만 벼르고 별렀던 여주행이 현실로 이뤄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 달이란 기간마냥 기다리기에는 만만치 은 시간이었는지 몰라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속속 생겨났다. 털레모의 수장(首長) 격인 이 이사(理事)가 가벼운 수술 끝에 거동이 불편해져 참석이 어려웠고, 하필이면 모임 전날에는 강 변호사가 집안 장형(長兄)이 별세하여 멀리 부산까지 문상(問喪)가야 해서 참석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오랜만의 바깥나들이라 설렘 속에 짐을 챙기는 손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지난 며칠 사이에는 날씨까지 제법 쌀쌀해져 바람막이와 긴팔 셔츠를 여러 벌 꺼내놓고는 무엇을 입고 갈까 도무지 갈피조차 잡지를 못했다. 첫날은 남한강에서 배를 탈 계획이라니, 여벌로 내의도 두어 벌 넉넉히 챙겨 넣고 철 지난 샌들까지 신장에서 꺼내 차에다 실었다. 도자기의 고향 여주에 뿌리를 내린 조 작가(作家)가 여가활동 삼아 카약을 탄다더니 모임 첫날 친구들의 여흥(餘興) 거리로 뱃놀이를 주선(周旋)해 놓았는데, 전체적인 여행의 밑그림이 처음부터 이를 전제로 그려졌던 것이다.


여주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마음이 내켜서 가기에는 힘든 곳이다. 여주라 하면 이천과 함께 남한강 유역(流域)을 따라 널따랗게 펼쳐진 평야에서 나는 질 좋은 쌀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은 남한강을 따라 경관(景觀)이 뛰어난 곳에 새로 지은 별장과 펜션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릿속에 든 그 정도 상식으로 인터넷에서 여주를 검색해 보니,  보다는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에 관한 글이 먼저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 신륵사이다. 마침 다음날이 한글날이어서, 기막히게 이곳으로 여행 날자를 잡았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옆 좌석에 앉은 막내는 관심 없다는 듯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지만, 모처만에 긴 시간을 아들과 동행(同行)하고 있는 데다, 얼마 안 있으면 친구들을 만난 게 된다는 생각으로 장거리 운전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여주 역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친구들이 서울서 출발했으니, 조 작가와 내가 역으로 마중을 가서 친구들을 각자의 차로 실어 이틀 간의 여정(旅程)책임져야 했기에 밤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게 살짝 아쉬울 따름이었다.


여주와 가까운 고속도로 교차로에서 막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길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다음 차로(車路)에서 내려 30 여분 간 길을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 사이 친구들이 먼저 역 가까운 곳에 식당을 정해 점심을 먹고 있으면 그곳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사실, 막내를 그냥 보낼 수 없어서 괴산 휴게소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기에 웬만하면 점심은 건너뛸 요량으로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내가 옆자리에서 식당 이름을 검색해 보더니 오리불고기 전문집이라 일러주는데, 오리는 어떤 요리든 즐겨 먹지는 않지만 이 근처에서는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라기에 그 맛이 어떨까 살짝 궁금해지기는 했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건넌방 덧문 밖으로 귀에 익은 말소리가 들린다. 친구들끼리 모이목소리가 커지고 심해지는 것이 경상도 사투리라는데, 조곤조곤하면서도 구수하게 들리는 것이 더 들어보나 마나 문경 사투리이다. 이 말소리의 주인공은 한 원장이 분명하고, 뭔가를 설명하는데 열중하고 있는 탁음(濁音)의 소유자는 등지고 앉아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목소리가 작가임이 틀림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마지막으로 본 지 수년이 흘렀어도 돌아보는  작가 얼굴이 여전해 보여 반갑고도 고맙다. 자리를 비워 놓아 그 자리를 찾아 앉는데, 바로 옆 자리에는 SNS로 이미 얼굴이 익은 배 사장(社長)이 앉아 있고, 왼쪽 건너편 자리에서 빙긋이 웃고 있는 체구 당당한 이가 김 소장(所長)이다. 자영업과 현장 소장을  한 전력(前歷)을 고려해서 각각 따 온 호칭(呼稱)이기에, 우리끼리 있을 땐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서로 편해도 글로 나타낼 때는 이게 더 거리낌이 없을 것 같다. 배 사장과 김 소장은 나와는 반(班)과 계열이 서로 달라, 어떻게 보면 이번 우리들 모임이 고교 졸업 후 무려 45 년 만에 성사된 만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맞은편, 맨 오른쪽 끝자리에는, 아직은 서로 대면 대면하게 인사 나누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안 장로실실 웃고 다.


소장이 천안의 현장 사무실 뒷산에서 채취(採取)해서 술로 익힌 야관문 담근 주와 막걸리로 반주(飯酒) 삼아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서, 조 작가의 안내를 따라 바로 이동한 곳이 세종대왕릉과 바로 그 위쪽에 자리 잡은 효종대왕릉이다. 오늘이 한글날로 계속 이어지는 연휴여서인지는 몰라도, 세종대왕릉 주위로는 제법 많은 인파(人波)는데, 내일 이곳에서 있을 기념식과 음악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세찬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여주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조 작가는, S대 공대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던 중 도자기 공방을 차려서 전업 도예가로 활약했던 전력이 있는데, 지금은 작품 활동을 잠시 쉬고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릉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과학기구를 설명할 때, 조 작가의 해박(該博)하면서도 과학적 이론을 접목(椄木)논리 정연한 말솜씨에정말이지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그저 잘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실측 기구들을 쓰임새 별로 시간과 방위에 따라 측량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설명하는 모습에서, 왕년에 아동용 과학도서를 집필(執筆)한 저자의 포스(force) 풀풀 풍겨 나왔다.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언어학적인 소양도 뛰어나 동서고금(東西古今) 문물을 공히 지칭(指稱)하는 언어의 공통점을 나라별로 사례(事例)를 들어가며 하나하나 설명할 때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예를 들어, 흑해(黑, Black Sea)를 터키어로는 'Karadeniz'인데 '카라'는 '검은'을 뜻하고,  몽골어로도  '검은'을 '카라'라 하며, 일본어는 'くろ(쿠로)'이니 이처럼 소리의 상호 연관성을 음성학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식이었다. 효종대왕릉을 보고 내려와서는, 왕릉 앞 안내도에서 풍수설에 따른 묘택()의 입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는데, 이 또한 막힘 없이 청산유수(靑山流水)다. 표지판에 적어놓은 능 첨지(Tomb Keeper)란 명칭을 보고서는 설명이 한참 길어졌는데, 현재의 우리말로는 '묘지기' 정도로 옮겨지는  직책(職責)이 당대(當代)에는 그 신분이 만만치 않은 벼슬아치였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긴, 현재 이 왕릉을 지키는 책임자도 고위 공직자 군에 속할 것이므로, 신분 상의 위치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거라는 귀띔이 이어졌다.


안내도의 설명을 듣느라 정신이 팔린 것은 우리들만이 아니었다. 족히 여든은 어 보이는 어르신 한 분이 옆에 서서 조 작가의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얼핏 봐도 무척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 여주의 터줏대감으로, 평소 왕릉이나 고궁을 순례(巡禮)하는 모임의 소속 회원으로 오랫동안 활동을 해 왔고 아직도 오전, 오후로 하루 번씩 왕릉 주변으로 산책을 나온다고 했다. 두 사람이 왕릉 주변의 유물을 하나하나 고증(考證)하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른바 '티키타카'를 하는데, 이를 듣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였다. 효종 왕릉의 지세(地勢)가 공작 수미형(孔雀首尾形)이어서 주봉(主峰)이 묘택 아래쪽이고 종봉(從峰)이 묘택의 위쪽이라는 친구의 설명에는 어르신도 처음 들었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 장로가 교회 행사와 관련된 개인적 볼일로 먼저 서울로 떠나고, 강 변호사의 합류 가능성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어쨌든 처음 계획한 대로, 카약을 타기로 한 장소인 여주 수상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가는 길에 문득 오른 생각이, 오늘 일정은 아무래도 하루를 여기서 묵는 것이 아닐 것만 같았다. 마침 강 변호사와 통화가 이뤄졌는데, 대구를 둘러서 서울에 도착하는 시간이 여섯 시 반은 지나야 할 것 같아서, 서초구에 있는 '신라 스테이'란 곳으로 일행 모두가 자리를 옮기어떻겠냐고 속마음을 전해왔다. 일단,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수상센터에 도착하니 출입문이 잠겨 있었다. 전날, 조 작가가 수상 센터로 토요일 오후에도 시설 사용이 가능한지 여부를 전화로 미리 확인해 터여서 황당하기  없었다. 얼마 안 있어 건장하게 생긴 직원이 나와 출입문 건너편에서 전하는 말이, 지난번 폭우로 자동차에 탄 채 남한강 상류에서 실종된 노부부를 인근에서 찾느라 잠정적으로 시설을 폐쇄했다고 한다. 낭패스러워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문을 열고 잠시 체험이나 하고 가라며 2인승 카약을 내어 주었다. 조 작가와 배를 타고 말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김 소장이 루어(lure) 낚싯대를 몰래 챙겨 들고 기어이 배를 띄웠다. 뒤뚱뒤뚱 패들링(paddling)을 하며 선착장을 벗어난 카약이 강심(江心) 가까이까지 오가며 20여분을 헤매더니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두 사람 다 엉덩이 아래쪽이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배의 아래쪽 공간이 공학적으로 살짝 비어있도록 설계되어 물이 넘실댈 때마다 그 속으로 물이 차고 들어와 엉덩이를 적셨던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한번 타보라는 권유에, 모두 질겁하며 손을 내젓자 오늘의 물놀이는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이다음 행선지는 남한강 강변에 자리 잡은 신륵사였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創建)사찰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고, 고려 시대의 승려 나옹과 관련한 여러 가지 기이(奇異)한 일들이 사찰의 유구(悠久)한 역사와 함께 켜켜이 쌓이면서 고찰(古刹)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境內)의 동쪽 언덕에는 벽돌로 높이 쌓은 다층 전탑(塼塔)이 있어 신륵사가 한때 벽사(璧寺)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전탑은 후일 보물 제225호로 지정되었고,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거룻배의 이정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신륵사에는 이 탑 말고도 대리석으로 만든 보물 제225호인 단층 석탑이 있고,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 석종(石鐘)과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石鐘碑), 보물 제231호인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石燈)이 있어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과 함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유구함을 더 하고 있다.


신륵사 방문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여주 일정을 마감하고, 조 작가를 여주에 남겨둔 채 내 차로 옮겨 탄 일행은 이제 나를 포함해서 한 원장과 배 사장, 김 소장까지 넷 뿐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오늘이 하필이면 한강 불꽃축제가 3년 만에 열리는 날이어서 도로 여기저기에서 교통체증에 시달려 가서초동 '신라 스테이'에 도착하니 벌써 7시를 넘어서 있었는데, 강 변호사도 타고 있던 버스가 밀렸는지 주문한 술과 음식이 막 나올 무렵에 맞춰 카페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 변호사와는 중 3 때 같은 반이기도 해서 서로가 애틋한 마음을 가져서인지, 부득불 오늘 같은 상황에서도 허겁지겁 달려 나를 맞아준 것이었다. 오는 길 내내, 여동생이 살고 있는 광명에다 거처를 마련해 두었으니 부담 갖지 말라해도 친구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술은 권하며 대리운전을 하던지, 아니면 이곳에다 숙소를 잡는다. 사실,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야 굴뚝같았지만 기왕에 참았던 것 끝가지 버텨보리라 마음을 먹고 나서 동생 집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나니,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참, 학창 시절을 안주 삼아 대화가 무르익어 때쯤 낯 선 여자 분이 찾아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강 변호사가 이곳으로 청해서 온 모양인데, 대부분의 털레인과는 이전부터 교분이 있어 마침 근처에 왔다연락이 닿아 자리를 합치게 된 것이다. 동향인 데다 알고 보니 나이가 동갑으로, Y대 음대를 나와 아직도 실내 앙상블의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엘리트 연주자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와 아주 친한 중고등학교 친구와는 같은 국민학교 출신으로 내 친구의 어릴 적 단짝 친구란 점이었다. 게다가, 국민학교 시절 바이올린을 배워 연주회를 한 적도 있는 강 변호사가 현재 사사(師事)하고 있는 바이올린 스승이기도 해서, 어려울 수 있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된 친구를 모처럼 만난 것처럼, 학창 시절 공히 알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크림빵이나 팥빵을 앞에 두고 사이다로 홀짝홀짝 입술을 축여가며 치를 보다가 어느 한쪽 말문이 고 나면 연이어서 말문이 터지곤 했던 그 나이 또래의 중고등학생들처럼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야깃거리가 줄을 이었다.


결국, 10시를 훌쩍 넘기고 안 장로가 다시 합석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후 모임의 향배(向背)가 결정이 다. 11시가 넘어 카페가 영업을 마치면 어쩔 수 없이 각자 집으로 귀가해야 했으므로, 안 장로가 날 위해 '신라 스테이'에 방을 따로 잡으는 것을 한사코 마다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계산만 해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배려해 주려친구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고마웠다. 서울 친구들은, 여태껏 하루를 묵어가며 서울 근교 둘레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오늘 행사를 당연한 당일치기로 받아들였으나, 포항과 안동에서 이들과 1박 2일로 두 차례나 밤을 보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오늘도 당연히 하루를 함께 묵으며 뱃놀이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문상을 하느라 전날 부산서부터 강행군을 한 강 변호사를 필두(筆頭)로, 이 선생님을 분당까지 에스코트해 줄 김 소장이 먼저 자리를 뜨고, 서울 근교에 사는 한 원장과 배 사장이 출발한 뒤 나와 안 장로가 마지막까지 남아 오늘 하루의 일정을 갈무리했다. 안 장로 집이 카페 바로  서초 그랑자이 아파트여서 까지 남아 나를 배웅해 주었는데, 광명으로 어머니를 뵈러 운전해 가는 내내, 친구들이 오늘 하루 내게 보여준 환대(歡待)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면서 모처럼 만의 외유(外遊)에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올해 6월, 포항 동기들과의 성주 여행길에서 세종대왕자 태실(胎室)을 둘러보고, 올 10월엔 세종대왕릉까지 다녀왔다. 마치 한 인생의 시작과 끝이 이어진 공간 속을 시간 여행한 느낌이다. 공교롭게도 두 번의 여행 모두 구성원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여행길이었다. 사실, 요즘에는 어딜 가나 고등학교 친구들이 자랑스럽다. 모두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눈앞에 두고는 있지만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나와는 달리 세상을 살아감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실제로 말을 그렇게 던져 놓오기도 했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보다 남은 게 넉넉하지 않을 시간이지만 기회가 닿는다가능한 한 이들과 자주 시간을 고 싶다. 11월에는 털레모의 상주 모임이 있고, 이곳 포항 동기들도 자녀 혼사를 비롯해서 연말을 함께 보낼 또 다른 모임이 약속될 것이다. 그래서 이 겨울을 나고 나면, 다가올 따뜻한 봄날에 이곳 포항에서도 털레인 맞고 싶다. 걷는 길이 남쪽 연오랑세오녀 길이든 북쪽 블루로드든 간에 털레털레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봄의 정령들이 내뿜는 새봄의 생기를 마음껏 들이키고 싶다. 올해가 가고 따뜻한 새해 봄날이 오는 그날을 맞아서.


여주 세종대왕릉 앞
세종대왕 동상
한글날을 맞아 '훈민정음'과 만해의 '님이 침묵',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미당의 '국화 옆에서' 등이 한글 흘림체로 광목 위에 써서 광장 주변에 전시되어 있다.
'규표'는 해의 그림자를 재어 24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천문 관측 기기이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 '규표'의 눈금이 오늘이 한로(寒露)임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조 작가
제4대 세종대왕릉, 소헌황후가 합장되어 있고 영릉(英陵)이라고 불린다.
제17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릉, 이 또한 영릉(寧陵)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한자가 다르다.
효종대왕릉 재실 안 회양목, 천연기념물 제459호이다.
카약을 타고 있는 조 작가와 김 소장, 위태롭게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다.
신륵사 보물 제225호인 단층 석탑
신륵사 보물 제226호인 단층 전탑, 벽탑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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