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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Nov 13. 2022

가을과 지난봄, 그리고 공원

늦가을, 환호 해맞이 공원에서

시간에 음표(音標)를 그려 넣으면 어떤 소리로 들릴까?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고, 낙엽이 떨어지는가 하면, 바닷가로 파도가 밀려오겠지.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저 마다 가진 고운 음색(音色)으로 화음(和音)을 섞으면 세상은 결국 하나의 웅장(雄壯) 교향곡(交響曲)될 것이다.


집 앞, 환호 해맞이 공원을 산책하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계절은 이미 깊을 대로 깊어져, 공원의 풍경은 마치 시간을 도둑맞은 듯 벌써 늦가을이다. 하긴, 집을 떠나 있은지 스무여 날을 훌쩍 넘었으니 그새 공원 안은 이미 단풍으로 물색(物色)이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공원 주차장으로 관광버스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성큼성큼 눈앞을 스쳐간다. 공원 안 스페이스 워크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재미 삼아 이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니, 말의 어절(語節) 사이가 슬쩍슬쩍 늘어지는 것으로 보아 충청도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오랜만의 나들이어서, 오늘은 공원 안팎의 경계(境界)를 잇는 둘레길을 먼저 걸어보기로 했다. 공원 안 포항시립 미술관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데, 새벽녘에 한차례 비가 내려서인지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날이 차가워질 것으로 예보(豫報)되어 넥 워머까지 단단히 목에 둘렀으나,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려는데 벌써 몸안이 훈훈했다. 잔기침이 잇따라 몸이 약간 불편해졌으나, 양손을 뒤로 젖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니 이내 기침이 잦아들었다. 포항시립 미술관 조각 공원을 돌아보고 둘레길의 내리막을 걷고 있는데, 주변 조경수(造景樹)의 단풍이 절정(絶頂) 이루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補償) 받는 심정으로 이를 배경 삼아 열심히 셀카를 찍고 있자니 슬쩍 옆으로 중년의 여성 셋이 다가선다. 이들이 보기에도 단풍이 무척 고와 보였던 다. 약간은 무안했던지, 옆으로 비켜서 있는 나를 보고 잠시 깔깔대더니만 서로 머리를 한 곳으로 모으고 셀카를 찍었다.


공원 광장을 벗어나 놀이공원과 동물원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변에, 가볍게 운동할 수 있도록 체육시설도 갖추고 있어 평소 주부들과 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길 양쪽으로 비록 끝물이긴 하나 단풍이 절정은 이루고 있었는데, 지난봄 이 길을 따라 오르던 순간이 문득 생각났다. 그땐 사잇길을 따라 벚꽃이 한창이었는데, 온갖 자태(姿態)로 화려함을 자랑하던 벚나무들이 그새 단풍이 든 것이다.


지난봄, 시간이 빚어낸 소리는 어떠했을까? 그때도 변함없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서 풋풋한 잎사귀마다 생기가 돌고, 바닷가로는 거침없이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겠지. 온갖 살아 있는 것들도 봄의 약동(躍動)하는 기운을 받아 저마다 서로 다른 박자로 음률(音律)을 맞추면서 화려한 봄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땐 어떤 생각으로 공원을 돌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처럼, 공원 둘레길을 걸으며 지난봄의 기억을 되돌아보듯 다가올 가을의 풍경을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나 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과거 지향적인 사람인 것 같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또 가을로 두 번의 계절이 바뀔 동안 내 머릿속으로 지금 눈앞의 가을 풍경을 미리 그려본 적이 없다. 다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익숙해진 가을 풍경이, 마치 빛바랜 사진 속의 그것과 같이 기억 속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배경만 비슷할 뿐, 시간이 빚어내는 운율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지난 한 달 가까이 혹독(酷毒)한 시간을 병마와 씨름하며 보냈다. 과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적지 않은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펼쳐진 가을 풍경을 보며 지난봄이 빚어낸 시간의 소리에 홀려있다.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 음률은 이 가을까지 이어져, 잠시 절망(絶望)했던 마음에 약동하는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래서, 다가올 겨울이 이젠 낯설거나 두렵지 않다. 아니, 겨울이 빚어낼 시간의 소리에도 미리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난 더 이상 과거에 매몰(埋沒)되어 있고 싶지 않다. 아직은 종종 숨이 가쁠 때도 있지만, 마무리 운동삼아 체육시설의 기구운동을 각각 두 세트나 하고 돌아서는데도 걸음걸이가 가뿐했다.


베란다 창 아래로 보이는 환호 해맞이 공원의 저녁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아파트 뷰가 이만한 곳도 드물다는 생각에 이르자, 내 집의 소중함이 마음속에서 더욱 커진다. 내일은 좀 더 속속들이 공원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막바지 기침을 가슴속 울분 토하듯 길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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