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서지 마라

고향의 배려

by 혁명을 꿈꾸며

(2021년 7월 4일, 일요일)


보통 떠나 있었을 때엔, 거의 대부분 일요일에 일두들에 올라 사진을 담았다. 일요일은 청송에서 다시 충주로, 또는 다시 세종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었고, 한번 다녀가면 다시 몇 주는 건너뛰어야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먼 길 떠나는 여행자가 물병에 물을 채우듯, 나는 일두들 사진을 전화기에 담아 두었다.


그때는 항상 일두들이 목말랐었다.




훌쩍 돌아와서 마주친 내 고향의 표정은 차가웠다. 2023년 2월에 돌아와서 그랬던 것일까. 겨울이 차가운 것은 그 온도와 바람이지, 겨울 계절의 표정은 결코 차갑지 않은데, 내 기억의 2023년 2월 청송은 내게 냉랭했었다.


하긴, 박사 학위를 받고 멀쩡한 정년 보장 직장을 다니다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여기서 농사며 사업이며 해보겠다고 나선 자식과 이웃에게, 그 젊은이에게 호의가 권리처럼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차가운 표정에도 어울릴법한 이유가 있었다.


살던 동네와 읍내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는데, 나만 훌쩍 나이를 먹고 돌아와 있었다. 바깥세상의 세파에 시달린 아저씨 눈에는 변함없이 멈춘 그 세계가 더 낯설었는데 시간이 멈춘 세계가 가장 익숙한 공간이었다는데서, 오며 가며 늘 봐왔던 세계가 그렇게 인식된다는 데서 나는 감각의 인지부조화로 얼마간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봤자 잠깐 이었겠지만.


환경은 그렇다고 치고 고향 사람들은 더 어색했다. 대충 누군지 그 옛날의 인상은 알고 있어서 누군지는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으로 반갑게 인사하기는 어색했고, 그렇다고 모른 척해서 싸가지론으로 구설에 오르기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대부분의 사람을 만날 때, 어떤 표정으로 다가가야 할지 한참을 난감해하며 쭈뼛거렸다.


더욱이 내 말투는 이 세계나 저 세상이나 어디에도 없는 말투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20년간 일상어로 쓰다가 강원도 춘천에서 10년을, 다시 서울과 경북 봉화에서, 세종에서 마지막 5년을 보낸 사람의 말투는 어느 지역의 사투리도, 그렇다고 표준어인 서울 말도 아니어서, 고향 사람은 서울 말 쓴다고 놀렸고 바깥사람들은 단어는 서울말로 억양은 경상도 반 충청도 반이라고 평가해 주었다.


여전히 지금도 동네 형님 동생들은 "니, 서울말 쓰네.", 바깥사람들은 "이제 경상도가 세다."라고 꼬집었다.


그렇게 돌아온 곳에서 이런저런 자리에 불려 다니며 호구조사를 청문회처럼 받을 때, "진짜, 진짜 왜 왔냐?" 그 질문을 가장 많이, 그리고 집요하게 물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어차피 60살에 은퇴하면 돌아올 곳이어서 40살에 일찍 돌아왔고, 어떤 자리를 목적하고 온 것은 더욱 아니며, 그저 농사나 지으며 사업을 일으켜 호의호식할 요량이니 그저 따뜻하게 지켜만 봐주십사, 안절부절못하며 조아렸었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잘 났다고 나서지 말고, 절대 아는 체하지 말고, 네네 하며 고개 숙이고 다니라'라고 여러 사람이 반복적으로 말해주어 경직된 지역 사회의 문화가 어떤 온도이고 표정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게 내 익숙한 고향의 낯선 얼굴이었다.




그간 내 고향과 그 사람들이 나를 지켜봐 온 것처럼, 내가 그 둘 모두를 지켜보며 느낀 흥미로운 것 몇 가지가 있었다.


지역 사람들은 늘 모두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 어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무뚝뚝해서 따로 말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나이대를 불문하고 남자 어른들은 모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어디서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는데, 근래 보기 드문 풍경이었지만 여기서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더불어 실내외 흡연과 함께 커피와 차는 배달이 저렴하고 신속했는데 심지어 맛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비흡연에 직접 커피 배달을 시켜볼 배짱은 생기지 않았지만 매일 봐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가끔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일부러 지역의 흥미로운 풍경을 연출해 선 보여 드리는데, 대부분 과거로 회귀한 듯한 데서 오는 반가움과 신기함, 배달 음료의 고품질에 찬사를 보내고 재방문 이유의 첫 번째를 그 흥미로운 광경을 손에 꼽는다.


내 고향은 조금 느린 시간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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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늘 심각한 표정 / 2. 높은 흡연률 / 3. 커피 배달 서비스


어디든 나설 생각도 없었지만 나설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돌아온 곳에서 꾸린 이쁜 계획들을 하나씩 해내는데도 하루하루가 모자랐다. 먼저 내가 대학에 가면서부터 묵힌 20년 된 길이 끊어진 숲 속의 산간 묵밭을 장비를 들여 버드나무를 모두 뽑아내고 평탄화 작업을 나흘간 해서, 숲 속 자연 재배와 같은 환경을 조성했다. 그해 물엉겅퀴 400평, 들깨 600평을 심어 수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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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묵밭 개간 후 산나물, 들깨 정식(1천평)


본가 부지 내 폐축사 2동 중 1동은 매입하고 1동은 부친께 말없이 양도받아 비용 절감을 위해 갖은 수를 짜내어 슬레이트를 철거하고 고물상을 불러 구조를 제거한 후 집안 할아버지 장비를 이용해 제조시설 조성 부지를 만들었다. 이른 봄에 시작해 늦은 여름에서야 겨우 부지가 마련되었다. 그 사이 지인을 통해 안동 설계사무소에서 공장 2동을 설계하고 인허가를 받는데도 애를 먹었다.


비용 절감을 위해 돈으로 할 일을 몸과 마음으로 했다. 돌아와 일찍 지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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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된 폐축사 철거 후 제조시설 부지 조성(3필지 450평)


장성한 자식, 그리고 조기 귀향한 자식과 평생을 한 자리에 머무른 부모님은 한 집에 살 수 없었다. 원래 한 집안에서 부대끼며 지내왔지만 더 이상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지내는 것은 서로에게 소모적인 일이었다. 말씀과 간섭이 적은 부모님께서도 하고 싶은 말이 그동안 많이 늘었는지, 아니면 내 무모한 도전들이 물가에 내어 놓은 아이와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집이 시급했다. 그리고 이미 폐허가 된 집이 있었다.


이미 농지 및 제조시설 조성으로 벌인 일들이 많았으나, 주택 시공이 우선순위에서 후순위가 될 수 없었다. 봄부터 철거, 집터 앞 석축 시공, 집터 뒤편 보강토 블록 시공 등 모두 공정별 개별 발주로 직접 시공했다. 누님 집, 내 집 2채가 들어설 자리라서 누님의 코치 및 요구사항이 많아 조율해 내기가 노동 강도 보다 더 힘든 기억이 난다.


역시 돈으로 할 일을 모두 몸과 마음으로 했다. 농사, 제조시설 시공, 주택 시공, 예비 사업자 프로그램 이행 등 동시에 실시간으로 진행되었는데, 다행인 것은 모두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으므로 다른 잡생각할 실마리도 찰나도 없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끌고 가서 끝을 봐야 한다는 일념이 강했다.


2023년이 다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 무엇도 완성되지 않은 채, 그리고 모든 것이 동시에 시작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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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된 엣집 철거 후 주택 부지 조성(2채, 200평)




KakaoTalk_20250725_094424539.jpg 2023년 12월 5일 일두마을 하늘

어쩌면, "나서지 마라."는 내 고향이 내게 해 준 배려가 아니었을까.


여러 공정 사진 가운데, 뜬금없이 2023년 12월 5일에 찍힌 하늘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날 왜 오후 2시 51분에 하늘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었을까. 푸른 하늘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일두들의 하늘은 일두들 만큼이나 변함이 없어서 지금 찍어도 저런 풍광은 일상인데, 그날은 아무래도 하늘 한번 쳐다보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가 아니었을는지.


미리 알고서 모든 것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필요에 의해서 시작했지만 시작하고 보니 모두 동시에 병행할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시작한 채 알게 된 것은 그 해의 불운이었다. 이쁜 기획이 선량하게 실행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귀농귀산촌 시집살이의 매운맛을 경험했다.


돌아온 해, 그렇게 나를 알뜰하게 소비했다.


하루에 하루씩. 무리했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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