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형 인간류
오늘 오후 언젠가 내 차량 주행거리는 30만 km를 찍게 된다. 그 차를 딜러로부터 인수받은 날은 2020년 1월 17일이었다.
'20년 1월 17일로부터 오늘 '25년 12월 12일은 2,156일째 되는 날이었고, 차량 이동 거리는 6년간 1일 139.1km 이동한 것으로 계산된다. 연간으로 따지면 연평균 5만 km 이동한 셈이고, 우리나라 승용차 평균 1만 2천 km의 4배쯤 된다.
평소 운수업에 종사한 것도 아닌데, 나는 왜 4배나 더 많이 이동하며 살게 되었을까.
다니던 직장을 퇴직한 '23년 2월 17일 전까지는 기관 예산 담당자로 당시 회사는 경북 봉화에 있었고, 난 주로 주무부처였던 산림청과 기재부를 출입하느라 봉화에서 대전과 세종을 주로 다녔다.
세종으로 사무처가 옮겨온 후, 예산 다음 담당했던 업무는 그 회사의 신규기관 조성을 감당하느라, 전남 담양의 국립한국정원문화원, 세종의 K-포레스트관, 강원도 춘천의 국립정원소재센터를 준비ㆍ계획하느라 전국을 누빈 셈이었다. 간간히 강원 평창의 국립자생식물원 개원 준비를 기획했고, 경남 거제의 한아세안정원은 부지 선정까지 마치고 퇴사하였다.
퇴직 후에는 청송과 안동에 사업장이 있었고 내가 꾸린 가족은 여전히 충주에 있어서 늘 거리에 쏟아부은 시간이 많았다. 특히 창업지원사업을 병행한 '24년과 '25년에는 대구, 구미, 김천, 포항 등 경북 북부권을 수시로 다녀야 했기 때문에 늘 일상생활 권역은 특정 지역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더불어 청송 본가와 사업장은 군 단위 지역의 리 단위 마을이었고, 가까운 편의점도 4km, 읍내까지는 8km에 있어 늘 차량을 이용하는 생활권에서 살아왔다.
4배 더 많은 이동거리에는 내가 선택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회사 소속 시절에는 관용차량을 이용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회사가 공공기관이라 관용차량을 독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출ㆍ퇴근 반납, 차량기록일지 작성 등의 번거로움으로 자차를 주로 이용한 것은 개인 취향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 이후 삶에서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일상의 안락함 보다는 길 위의 삶을 선택한 고집 덕으로 늘 이동하며 살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살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없을 수 있을까. 짧게는 매일 반성과 한탄에 괜히 하늘 쳐다보기가 일상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덜 이동하고 더 오래 머물 수 있을까.
역시 그럴 수 없었다. 청송과 안동 사업장 거리가 52.5km, 충주가 172km, '26년부터 새롭게 관여하는 회사가 경기도 이천인데, 이천은 204km였다.
길 위에서 오래 지내면서 운전하며 듣는 유튜브는 일상이었고, 유선 전화 업무 소통도 능숙해졌다.
전공으로 한 산림생태학은 계절의 풍경을 완성하는 숲 속 수종을 가늠하는 취미쯤 되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일정 물러나 있는 셈이었다. 어디에도 진득이 머물 수 없었다. 내가 꾸린 가족은 주로 주말에만 조우했고, 내가 태어난 원천 가족으로부터는 일상 업무나 주말 독립 생계 가족의 이유로 수시 격리되기 일쑤였다.
벌인 일들은 농업ㆍ임업ㆍ제조업ㆍ학술연구용역ㆍ컨설팅 등이 복합적으로 구성ㆍ조직된 터라 1차 원재료 생산은 주로 하고, 제조업은 영업 업무를, 연구용역은 대표 역할만, 컨설팅은 직접 수행하느라 어디에도 무엇도 매몰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하나도 온전한 체, 그러나 무엇도 누락한 체 나아갈 수 없었지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 새해에는 경중과 방향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적용될 예정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도리지 밭의 잡초가 될지, 잡초밭의 도라지가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내 젊은 날의 한때는 이렇게 일상의 거리가 서로 멀게 얼룩지고 있었다.
50대는 더 나은 일상의 거리가 주어질까. 지금은 내가 깔아놓은 선로 위에서 멍에를 이고 전진할 수밖에 없지만 누구나 시간 위에 흘러가듯이 나 역시도 그 시간에 그만큼만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루에 하루씩. 길 위에서, 일상의 거리를 돌아봤다.
모두 선자리마다 건 안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