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꿈꾸며

언제나 꿈꾸는 자

by 혁명을 꿈꾸며

나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모범생도 문제아도 아니었다. 학년별로 한 반이 전부였고, 한 반에도 고작 33명뿐인 작은 학교에 다녔는데, 그래서 겪은 장점과 단점은 극단적이었다.


중학교는 그래도 반이 2반이었는데, 고등학교 진학 시 성적 상위 20%는 인근 도시지역 안동, 포항시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하위 30%는 실업계 학교에 진학했고 가운데 중위권 성적의 친구들 대부분이 지역 고등학교에 머물렀다.


나는 당시 어린 마음에 구미전자공고에 가려고 마음먹었다가, 부친과 부친의 친구분께서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하며 인문계 고교에 진학할 것을 강권했고, 결과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시 교감선생님께서 지역고등학교에 와서 성적 상위권이면 교대나 사대에 갈 수 있으니 와 보라는 말씀도 솔깃했다.


주체적 의식 보다 주위의 솔깃한 말에 순응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지역의 작은 학교가 내심 부끄러웠다.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인근 중소도시로 유학을 갔는데, 유학을 떠난 친구들이 주말에 들어오면 그들을 만나 어울렸고, 나는 지역 작은 학교에 머무른 것이 부끄러워 고등학교 3년 내내 소풍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춘기 아닌 사춘기를 고등학교에다 쏟아냈다. 작은 학교의 생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전교생 조회라는 것을 주초나 월초에 즐겨했었고, 나는 그 학년별로 도열해 서있는 것이 싫었다. 방송반이 되면 애국가 송출, 마이크 및 단상 설치로 열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에 가자마자 방송반이 되었다. 나름 군 단위지역의 읍내학교라 체육행사나 체육관 임차 행사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방송 지원을 이유로 수업 열외를 즐겼다.


그 새파란 나이에 열외를 즐겨하다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와 듣기 싫은 수업도 다양한 이유로 교실을 이탈했었다. 지금 보면 매우 비열한 행위였으나 그때는 특히 갓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온 젊은 여선생님의 일본어, 과학 등의 수업을 자주 이탈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들께 미움보다는 관심과 애정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그 선생님들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였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탈이 매우 안타까워 선생님들께서 따로 회의도 하셨다는데, 당시 고3 때 담임을 맡으셨던 수학선생님께서 길들여지지 않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해 들은 기억이 난다.


"그냥 지켜봅시다. 저 녀석 팔자려니 하고, 두고 봅시다."

국어 선생님의 졸업선물

그 당시 싫어서 기피했던 수업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나 국어 교과목은 선호했고, 특히 국어와 관련된 문학, 작문 등의 수업을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 국어선생님을 잘 따랐는데, 그 선생님과는 지금도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낸다.


그 선생님께서 어느 날 체게바라 평전을 읽던 나를 보고 내 휴대폰 메인 화면 인사말에 "혁명을 꿈꾸며"를 써주고 지나셨다.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해주신 말씀이지만 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도 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별명이나 애칭을 적으라고 하면 '혁명을 꿈꾸며'를 줄곧 사용해 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 생전에 '혁명'이라는 것이 존재하거나 실현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발동을 보고, 참 사는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맞는구나 실감했다.


2년 6개월 전, 나는 그때 떠났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20년 만의 귀환이었는데, 나는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다시 싫어하는 것을 기피하기 위해 길 아닌 길로 들어섰는데, 이것도 그 옛날 선생님들께서 지켜보신 나의 팔자인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어떤 주술이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선생님의 졸업선물에 쓰인 글귀는 내가 알게 모르게 내 삶의 주홍글씨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꿈꾸는 자'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고등학교 시절은 살아가는 내내 나의 부끄러움이었다. 당시 수능 시험 대비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으면서 수능 시험 성적이 부끄러워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주제 모르고 웃기는 말이지만 그 당시 학교 후배나 선생님들께 미안했다. 왜냐면 적당히 공부 못하는 학교라고 할지라도 나름 그 학교의 가장 좋은 대학 진학 간판은 적어도 경북대는 되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못한 자책이 있었다.


졸업식이 끝난 얼마 뒤, 읍내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친구들과 술 마실 생각에 들떠 거리를 배회하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 내 등짝을 후려치며 말했다. "야! 황광모~ 왜 졸업식에 안 왔어? 선생님들이 네 선물 사두고 기다렸는데. 이놈의 자식~ 이제 끝났다 이거야." 아마도 그런 일갈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반갑고 고맙고 죄송한 복잡한 마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5분의 선생님께서 선물을 준비해 졸업을 축하하려고 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참석하지 않은 졸업식. 어리고 유치한 마음에 여물지 못한 나의 한 때가 그렇게 지나버렸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이 곱씹어진다. 나의 고등학교 3년은 나를 어떻게 만들어 버린 것인지, 내 수줍은 촌놈병이 나를 너무 옹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지금도 얼굴 붉힐 기억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간 대학이라고 평탄했을 리 만무하고, 나는 계속 꿈꾸는 사람이었다. '혁명'은 시원찮은 고등학생 치고는 박사학위 받는 것으로 나름의 상전벽해할 만큼의 개인 사정 변경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바람 잘 날 없었고 마음 편할 날도 없었다. 결국 박사 학위가 없어도 전혀 거리낄 게 없는 시골로 돌아왔으니, 나의 '혁명'은 일단은 무위로 돌아갔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루에 하루씩.

다시, 언제나 꿈꾸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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