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마다 주실령
나의 20대는 춘천의 대학교 캠퍼스에서 꽃 피웠고 30대는 사회에서 저물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조기에 이탈한 패잔병에 머물렀다. 어떤 조직이든 먼저 이탈하는 사람이 루저였기에 개인적 감상을 소거하면 객관적으로는 그런 평가가 적절해 보인다.
낙오의 이유야 천 갈래 만 갈래 사연이 있지만 낙오는 끝이면서도 시작이었기에, 나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화려하게 시작했다. 맨 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는데, 화려한 것은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했고 나는 내용을 알뜰히 채우는 데는 허술했다. 그 업보를 창업 3년 차인 지금 처절하게 겪고 있지만 꽃 길 걷겠다고 나선 행보가 아니어서 맵고 짠맛 가릴 것 없이 고배를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타이슨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현실은 매서웠고, 나는 다시 낯선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저 일두들을 언제나 거닐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대가로 지불한 비용이 투자가 될 수 있도록 나는 궁리를, 원하는 대답이 찾아질 때까지 고심해야 했다.
내 20대의 정점은 백두대간을 오른 것이었다. 석박사 학위 논문 모두 백두대간을 대상으로 쓰였고, 나는 내 또래 중에서 총 4년 동안 백두대간 21개 대상지에 올랐으므로 자타공인 '백두대간의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향로봉에서 지리산까지 주요 산을 모두 조사했는데 그 풍광들이 잊히지 않는다.
설악산과 지리산은 품이 큰 산이어서 규모 면에서 압도하는 바가 있었고, 향로봉은 군사지역 안이었으므로 사람 발 길 없는 곳의 원시성과 전후 피해 복구지의 복원성을 동시에 가늠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의 가장 낮은 구간인 상주, 보은, 김천 일대의 속리산, 백학산, 황악산에서는 상대적은 낮은 해발고를 나타내지만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 보여주는 산맥들의 역동성이 인간 주거지와 함께 조망되어 나름의 감상을 전해주었다.
"저 뼈대가 우리 생활사를 좌우로 나뉘었을지도."
'백두대간의 남자'. 말하고도 쑥스러은 맛이 짙었는데, 실은 현실에서 입 밖으로 뱉어낸 적이 있었다. 2017년 국립산람괴학원 박사후연구원 생활 당시 계약직 처우가 비위 상해 그 해 개원하는 백두대간수목원에 입사했는데 면접 당시 자기소개를 '백두대간의 남자'라고 열변한 적이 있다.
백두대간수목원은 백두대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설명한 방식이었는데, 최종적으로 합격했으니 그 20대의 백두대간이 30대 초반에는 쓰임새가 각별했던 것은 분명했다. 요즘 흔한 말로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구했다고도.
백두대간. 오히려 백두대간 수목원에 입사 후에는 백두대간에서의 경험은 어디에서도 쓸 데가 없었다. 백두대간수목원에서 백두대간을 잊고 살다가 2023년 퇴직 후 백두대간을 다시 바라본 계기가 있었다. 청송에서 충주로 상경하는 길은 안동, 예천, 문경, 충주 순으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문경 백화산 근처를 지나면 이어지는 산맥 가운데 저 문경새재의 주흘산이 떡하니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창업 교육 과정 중 어떤 선배의 발표 속에서 들은 이야기다. 전국의 모든 산이 임금이 있는 한양 쪽을 향하고 있는데 유독 문경 주흘산만이 돌아앉았다는 전설이다. 돌아앉게 된 이유는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 전국의 산들이 새 도읍지의 주산이 되기를 바랐는데 소식을 늦게 들은 주흘산이 급히 달려가다가 문경에서 고개를 쭉 빼 들고 북쪽을 바라보니 이미 삼각산(북한산)이 떡하니 주산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라 그만 낙심하여 삼각산 보기 싫다며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저 전설의 탄생 배경을 옛날 과거급제가가 있던 시절 경상도 땅에서 한양으로 가던 영남 선비들이 도보로 이동할 때, 문경새재에 당도해 저 주흘산을 보면서 느끼는 절망감, 압도감, 좌절감 등이 지어낸 이야기로 이해하고 싶었다. 신경림 시인의 '새재' 시구처럼 '저 고개를 넘으면 새 세상이 있다는데..'와 같이 나도 매일 내 마음속의 주흘산을 바라보며 좌절과 위로를 곱씹으며 현실에 서성이며 굽이치는 길을 오르고 있었다.
개인 사업자가 되고 나서 다양한 정부 지원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여러 자리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추구하는 이상은 부지런한 농부가 되어 땀 흘리는 대가만큼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이었지만 주위의 기대와 눈초리, 그리고 이미 몸속 깊숙이 베어버린 씀씀이 때문에 소박하고 담백한 현실을 일상에 담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세상을 관계망으로 이해하면 작용, 반작용 그리고 상호작용이 있는데, 사회에서의 낙오에 대한 반발로 개인 사업을 시작했으니 잘하고 흥 해야 한다는 강박에 따른 결과로 내가 나를 더욱더 마음속의 주실령 앞으로 나를 이끌었는지도.
주 생활 동선 가운데 저 주실령이 있어 더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두대간이 동고서저 지형으로 날씨와 기후에만 형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백두대간이 자리 잡은 대로 길이 난 모양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겪는 많은 것들에서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퇴직 후 이용한 정부 지원제도 가운데, 청년창업농과 청년창업사관학교가 있었다. 중앙 정부 정책상 청년의 나이는 40세까지였고, 퇴직 이듬해가 마지막으로 1984년이 청년이 될 수 있었던 해였다. 그래서 지금 나는 청년이 아니었고, 내 청춘도 거기서 끝나 버린 것 같았다.
늘 마음은 '언제나 꿈꾸는 자'에 머물렀음에도 시간은 야속하게 내 빈 구석이 속속들이 채워질 때까지 나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부족하고 허술한 체로 다시 낯선 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그 길목마다 작고 큰 주실령이 내 앞에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허물어지고 추스르기를 반복해서 지금 현상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매월 나가는 비용이 수익보다 컸으므로 나는 계속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데, 매일 내일의 가능성에 기대어 그 옛날 백두대간을 올랐던 것처럼 작은 조각과 편린을 모아 안정적 사업 안착기를 꿈 꾸고 있다.
내 청춘의 흥망성쇠.
하루에 하루씩. 주실령이 모퉁이마다 있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