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하루씩
어떻게 살 것인가.
내 나이 마흔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대책 없는 인간형이었다. 나는 때에 따라 필요를 원동력으로 선택했고, 선택한 것은 집중했다. 수능도 50일을 앞두고서 집중했고, 군대는 선택할 수 있는 곳과 살면서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를 기준으로 다녀왔다. 전역 후에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 전국을 돌며 1년간 막노동을 했고, 막노동을 해서 모은 돈은 그때 지인들에게 빌려주느라 정작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갈 수 없었다. 다시 1년간 더 막노동을 하고자 했을 때, 차라리 토목학과를 다니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복학을 했고 다시는 막노동을 하지 않았다.
복학했을 때, 누나의 산림기사 자격증 활용법을 보고 산림경영학과를 복수전공으로 학부생활을 마쳤다. 관광경영학과는 졸업시험이었는데, 산림경영학과는 졸업논문제도라서 산림생태학 연구실을 기웃거렸고, 그런 나를 교수님이 좋게 보셨는지,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 교수님의 말은 솔깃했고, 나는 대학원을 선택했다.
"나는 평생 나를 위해 살고 있다. 50대 후반인 내 친구들을 보면 평생직장에서 나와 은퇴하고 허탈함에 시달린다. 그러나 나는 학부 4년, 대학원 5년 더 공부한 덕으로 제자를 길러도 내 이름으로, 논문을 써도 내 이름으로, 연구를 해도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다. 너도 석박사 5년만 투자하면 너를 위해 살 수 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삶, 매력적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보니 서른셋이었고, 전공과 직결된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후, 그때가 마흔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직장 내 쉬흔인 실장의 뒷모습, 예순인 부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직감했다. 때에 따라 닥친 삶을 살고 보니 마흔이었는데, 다시 20년을 그렇게 살 수 없었다.
일두들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마침, 내가 있어야 이유가 발생했다.
누나가 주로 머물던 시골 옛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우리 집은 서로 다정하면서도 무심했다. 그래서 가족 그 누구도 내게 옛집이 전소되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우연히 화재 다음날 시골집에 들서 나는 서재에 잠시 누워 있었는데, 웬일인지 그간 왕래가 없던 이웃 할머니들께서 모친에게 계속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괜찮다. 사람은 다 살아진다. 불이 나면 더 잘 산다고 했고,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 더 잘 될 일만 남았다. 괜찮다. 괜찮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생각하면서도 불이 나면 더 잘 산다는 말에 설마, 혹시 하는 마음에 청송 주택 화재를 검색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많이 본 집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589619&ref=A
그리고 주섬주섬 겉 옷을 챙겨 나가니, 할머니들께서 '그래, 걱정돼서 왔나 보지. 얼른 올라가서 봐라. 네가 할 일이 많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주셨다. 네, 건성으로 대답하고 본가에서 멀지 않은 옛 집으로 올라가니 전소된 폐허에 서서 부친이 말없이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건질만한 살림살이가 있는지 돌아보고 있었는데, 그 무엇도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 태워버린 화재였다. 그 옛집은 당신이 젊은 날을 보냈던 곳이었다가 최근에 누나가 돌아와 주로 그림을 그리고 손님을 맞던 작업실이었는데, 전날 손님이 와서 아궁이에 불을 세게 붙였다가 잘못되어 큰 화재로 번진 것이었다. 누나도, 손님도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못했고, 누나는 슬리퍼마저 한 짝이 없었다나.
폐허에서 마른 울음으로 흐느끼는 부친을 보고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확신이 들었다. 내가 버텨야 모두 살 수 있겠다 싶었고, 이제 남은 것은 살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꼴이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당연했고, 다음은 돌아와서 무엇을 할지 정하는 일이었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산림생태학 전공을 살린 것은 박사후연구원을 지낸 9개월이 전부였다. 수목원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이래로 교육실에 잠시 머물렀고, 나머지 6년은 주요 사업 기획과 예산을 전담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성과가 좋았다. 조직의 사람도 돈도 전년 대비 우상향 했고, 역설적으로 일은 손에 익었지만 나는 그게 지겨웠다. 성과는 매년 기록을 경신해도 개인 평가는 출력였는데, 거기에도 염증이 났고, 나는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불이 나기도 했다.
기획. 내 발등을 찧는 도끼가 될 줄이야.
60살에 은퇴하면 청송 고향으로 돌아와 작게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하고 싶었다. 그런데 40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60살에 할 고생을 일찍 당겨 60살에는 그야말로 유유자적할 수 있다고 퇴직 반대를 외치는 가족에게 설명했었다. 어쨌든 농사는 내 땀으로 내 결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었다. 농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젊은 사람의 농사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청년창업농 제도가 좋았고, 나는 청년창업농이면서 임업인으로, 그리고 고부가가치 농림업 실현이라는 포부아래 사업 설계를 구상했다. 정부 정책은 늘 살펴보던 일이었으므로 관련된 지원 정책을 찾아 내 사업계획을 이쁘게 꾸렸다. 이쁘게 꾸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는데, 2년 5개월 전, 나는 조직과 예산으로 일 했던 기관의 업무 습관대로, 조직과 예산이라고는 전무한, 나 혼자서 하는 사업계획을 이쁘게 꾸림으로써 내가 지금의 귀농귀산촌 빚쟁이가 되는 길을 자초했다.
얼개를 짜는 일을 먼저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부딪혀 경험한 뒤, 현실을 반영한 얼개를 짰어야 했는데, 이미 나는 가공시설이며 땅이며 집이며 모두 지었다. 소득은 별로 없는데 재산세를 내야 하는 웃픈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지금 결론 국면이 아니어서, 앞으로 저 예쁜 사업계획을 현실에 맞게 구색을 갖추어야 하는 일이 숙제로 남아있다.
돌아온 지 2년 6개월. 나는 현지인도 외지인도 아니었다. 청춘이라고 하기엔 쑥스럽고 어른이라고 하기엔 미숙했다. 주말이면 처와 아이가 있는 집 충주로 다녔고, 주중에는 경북 청송과 안동을 오가며 지낸다. 농업인이면서도 임업인이기도 하고, 벤처기업 인증받은 회사의 사장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었는데, 나의 지난 20년으로 앞으로의 20년을 꾸려가야 했는데, 나는 그러면서도 내가 살아오면서 겪고 느낀 내 삶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하루에 하루씩.
경계인의 질문과 대답. 어떻게 살 것인가.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