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야지 어쩌겠어.
그렇게 10월 4일이 되었고, 공항에 왔다.
수동 킥보드를 갖고 여행 다니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아 기내 반입이 되는지 몰라 크기가 알맞은 가방을 찾아 가져왔다. 다행히도 킥보드는 아무 문제 없이 기내반입에 성공했다.갑작스럽게 오게 된 여행을 준비하느라 잠도 푹 자지 못하고 새벽 5시에 나와서 그런지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에 들었고, 중간에 승무원이 권한 오렌지 주스 한잔 마셨던 것 이외에는 자느라 기억이 없다. 비몽사몽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공항에서 킥보드를 꺼내고 여행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느낀 게 몇 가지 있는데, 생각보다 무거운 가방과 생각보다 더웠던 날씨였다. 출발 전날 서울은 극심한 일교차로 꽤나 추웠던 날씨인지라 겉옷과 긴팔, 긴바지도 들고 왔는데 그게 꽤나 무게가 나갔었다. 아니나 다를까 킥보드를 타고 출발을 한지 5분도 안되어서 등이 땀에 다 젖어 겉옷을 벗게 되었다. 이미 가방에는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어 매달고 여행을 계속 이어 나갔다.
4박 5일 중 첫날인 오늘의 목표는 65km, 제주공항에서 동쪽에 위치한 성산일출봉까지다. 첫날이 가장 날씨가 좋고 체력적으로 좋을 것 같아서 65km로 목표를 설정하였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킥보드 타는 유튜버를 봤었는데 하루 종일 최대 100km까지 이동한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절반에 가까운 65km를 목표로 잡고 호텔을 예약하였는데, 그건 좋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여행 중 첫 날인 오늘이 날씨가 가장 좋았다는 것이다. 제주시내를 벗어나기 전 용꽈배기에서 꽈배기와 도넛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 해안도로에 다다를 수 있었다. 드디어 여행의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풍경이 너무 예뻐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목적지까지 거리를 좁혀나갔다.
첫 휴식지는 공항으로부터 11km 떨어져 있는 호우코우라는 카페였다. 통창으로 되어있는 창너머 바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핑을 하고 있었다. 출발 시간은 10시였는데, 이곳에 도착하지 이미 2시간이 지난 12시였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팔과 얼굴을 시원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보니 가방끈이 있는 자리와 등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카페에서 통창 너머로 바다를 구경하며 달달한 라테 한잔을 먹으니 다시 출발할 용기가 생겼다.
그다음 목적지는 점심을 해결한 곳, 카페로부터 동쪽으로 15km 구좌에 위치한 동복해녀해산물 직판장. 커피를 마시고 용기가 생겼지만, 그 용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구좌로 넘어가는 길은 오르막길이 많았고, 오르막길에 오르면 당연히 내리막길이 있을 것이라 희망했지만 번번이 내리막길이 없는 곳들이 많았다. 오르막길 끝에는 또 다른 오르막길이 등장해서 내 의지를 꺾어 놓곤 했다. 수동 킥보드는 오르막길엔 쥐약이다. 차체가 가벼워서 가방을 앞에 다 걸고 이동할 경우에 발을 발판에 올려놓지 않으면 쉽게 고꾸라지게 되어있다. 혼자 걸어서 오르막길 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킥보드가 넘어지지 않게 힘을 주고 걸어야 한다는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식당에 다다르기 전 런던베이글뮤지엄이 있어 구경할까 잠깐 망설였지만, 이미 배가 너무 고프고 힘들어 식당을 향해 전진 또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2시 20분, 카페에서 출발한 지 2시간이 되어서야 식당에 도착하게 되었다. 동복해녀해산물직판장은 바다 바로 앞에 포장마차형태의 식당인데 바다 바로 앞에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다. 영화 '낙원의 밤'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에서 마음 같아선 회에 소주 먹고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첫날부터 중도하차를 할 순 없어 전복비빔밥과 콜라 한 병을 시켜 시퍼런 파도 위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오늘의 첫끼를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일어나기가 무서웠다. 이미 체력을 다 쓴 것 같은데, 지도에는 내가 지금까지 온 거리보다 남은 거리가 더 많이 남았다고 나와있었다. 지금까지 온 거리는 약 30km, 하지만 숙소까지 남은 거리는 35km였다. 힘들어서 천천히 식사를 하고 나오니 시간은 3시가 다 되어가는데, 10월에는 5-6시면 해가 지기 때문에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5시간을 달려 30km를 왔는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3~4시간이라고 하니 정말 절망 그 자체였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가야지.
마음 같아선 가방을 집어던지고 갈까, 아니 그냥 편하게 택시 타고 갈까, 고민이 되었지만, 이것마저 해내지 못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갔을 때 더 큰 번아웃이 찾아올 것만 같아 다시 마음을 잡기로 한다. 다행하게도 식당에서 성산으로 가는 코스는 개인적으로 평소에도 좋아하는 구간이었다. 아내랑 매년 여름이 되면 스노쿨링을 하러 제주에 오는데 가장 좋아하던 포인트가 지금 카멜 제주가 생긴 코난비치였다. 그곳에 가면 커피 한잔 마시며 바다 볼 생각에 힘이 조금 생겼다.
오후 4시 10분, 놀랍게도 식당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10km를 달려 월정리를 지나 카멜 제주에 도착했다. 한 번 더 재정비를 위해 달달한 크림라떼를 마시며 아내와 자주 오던 코난해변을 바라보며 힘을 얻었다. 그래도 곧 해가 질까 두려워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시 킥보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후 6시 00분, 해가 구름 뒤로 숨으며 핑크빛 노을이 주변 밭을 가득 채웠다.
세화와 하도를 지나 지미봉으로 유명한 종달리를 지날 때쯤이었다. 시간 단축을 하려 해안도로가 아닌 길로 오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도로에는 인도도 없고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저 이름 모를 식물 밭과 핑크빛 노을뿐. 이곳에는 나밖에 없다. 주변을 돌아보곤 괜히 웃음이 났다. 오늘 하루가 왜 이렇게 긴가 생각하게 되고, 내가 왜 굳이 이렇게 힘든 여행을 택했는가 생각이 되다가도,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에 괜히 웃음만 나고 혼자 실실 웃으며 아무도 없는 농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오후 6시 40분, 핑크빛 노을은 사라지고 산너머로 보이는 서서히 사라지는 황금빛노을 외에는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10분 정도 지나자 가로등이 없는 해안도로는 암흑 그 자체였다. 핸드폰엔 배터리가 부족해 라이트도 켤 수 없고, 그저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남은 거리는 6km 하지만 루트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안전하게 숙소에 갈 수 있지만 15분 정도 더 돌아가야 하는 길과 길은 안전하지 않지만 15분 정도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길. 잠깐 고민이 되긴 했지만,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성산일출봉 앞까지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오후 7시 20분, 정말 암흑을 뚫고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지막 숙소를 향해 달리며, 이 고난의 여행 첫날을 요령을 피우지 않고 꿋꿋하게 달려왔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엄청난 성취감과 안도감이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줬다. 칠흑 같은 어둠에 힘들고, 무서웠지만 해냈다는 것 하나만으로 너무 행복했다. 하루의 고생이 행복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오늘 묶을 숙소는 플레이스 제주, 체크인을 빠르게 마치고 따뜻한 물로 아쉬움 없이 샤워를 하고, 바로 앞에 있는 흑돼지 식당으로 향했다. 흑돼지 2인분에 맥주 한 병. 나의 행복은 더할 나위 없었다. 내일이 무섭긴 했지만 행복하게 잠에 들었다.
1일차 결과.
총 거리 59.6km
총 소요시간 9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