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ygraphy Oct 27. 2024

ep.02 34살 낭만찾아 수동 킥보드 타고 제주 일주

천국과 지옥 그사이

2024.10.05 AM06:56

어젯밤 혹시나 못 일어날까 걱정돼서 7시에 알람을 맞춰놓았는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눈이 떠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도 의심이 많았다. 무리를 해서 오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을까? 너무 피곤해서 눈을 뜨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의심이 있었지만 눈도 잘 떠졌고, 생각보다 아니 어제보다도 컨디션이 좋았다. 어제 숙소를 들어올 때는 칠흑 같은 어둠이어서 주변 풍경을 못 봤었는데, 따스한 창밖 너머에는 성산일출봉과 파란 하늘 속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들이 보였다. 어제의 숙소 앞은 공포가 가득했던 곳인데, 오늘은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없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숙소 앞 전망

혹시 몰라 컨디션 체크를 위해 밖으로 나와 간단하게 조깅을 한 후 숙소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꽤나 오래 샤워를 했다. 오늘도 순탄하지만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첫날만 거리가 길고 2일 차부터는 하루 이동거리가 대폭 줄거라 생각했지만, 어제 흑돼지를 먹으면서 다음 숙소까지 네비를 검색해 보았는데, 60KM로 첫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지' 하며 일찍 잠에 들었었다.




AM08:30

첫날 묵은 숙소는 성산일출봉 주변에 있는 '플레이스 캠프 제주'라는 곳으로 1인 여행자나 워케이션을 오는 곳으로 유명한 숙소다. 그래서 특별한 베네핏이 있는데 저녁엔 펍에서 맥주 한 잔이, 아침엔 숙소 내에 있는 카페 도렐에서 베이글과 커피가 무료로 제공이 된다. 아침 일찍 출발을 했어도 됐지만, 베이글과 커피는 못 참겠어서 느긋하게 스트레칭도 하고 모든 출발 준비를 한 뒤 카페에서 맛있고 여유롭게 조식을 즐겼다. 다음에 또 오고 싶은 숙소다. 뷰도 좋고!


 

출발 직후 만난 강아지, 그늘에서 여유를 즐기는 모습 부러워...

AM08:46

드디어 제주 일주 2일 차가 시작되었다. 특이하게도 성산 주변은 인도가 현무암 재질로 된 보도블록으로 되어있는데, 킥보드를 타기 너무 적합했다. 그래서 시작을 너무 행복하게 할 수 있었다. 출발 한지 얼마 안돼서 그늘에 앉아 있는 강아지를 만났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괜히 부럽고 심술 나서 사진을 찍었다. 2일 차는 바람이 정말 시원했다. 적당히 하늘을 채우고 있는 구름과 함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다.


오늘의 여정은 성산일출봉에서 서귀포 시내까지 약 60KM 되는 구간이다.



AM 09:07

출발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골목에 서핑샵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해안도로가 시작되었다. 코앞에 있던 성산일출봉이 멀어지는 풍경을 보며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어제는 영상도 많이 못 찍었는데, 그냥 계속 기분이 좋아서 멈춰 서서 영상도 많이 찍으면서 이동을 했다. 중간에 편의점도 들러서 영양 보충을 하면서 계속 나아갔다. 지금 달리는 구간은 어제에 비하면 여유롭고, 순탄한 구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AM10:35 

킥보드로 여행하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을 맘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살면서 제주를 수십 번 방문했지만, 항상 렌트카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네비를 보고 달려갔던 것 같다. 킥보드를 타다 좋은 풍경이 나오면 달리던 길을 멈추고 가방을 내려놓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 멍하니 바라보기 일쑤였다. 혼잣말로 '이게 낭만이지' 라며 말이다. 아쉬웠던 건 이 좋은 풍경, 좋은 순간을 누구와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결국엔 '꼭 다음엔 아내와 함께 와야지' 하며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AM11:55 이동거리 20KM

출발한 지 약 3시간 만에 20KM를 달려 표선에 있는 '제주할망밥상'에 도착했다. 아침을 베이글만 먹은 상태여서 체력보충을 위해 제주 한식 한상을 먹으러 왔다. 사람이 많아 웨이팅을 해야 했지만, 1인도 가능해서 조금 기다린 뒤에 정말 한상 가득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제육과 파전에 갓 잡은 생선도 세 마리나! 오늘도 아직 40KM를 달려해서 조그만 먹어야 했지만, 맛있어서 참을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접시를 싹싹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사장님께 정말 정말 잘 먹고 간다고 인사를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섰다.


PM01:13 이동거리 26KM

밥을 먹고 나서 꽤나 고생을 했다. 배는 가득 찼고, 해는 너무 강해 눈이 따가울 정도였고, 땀샘은 모두 열려 사우나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식당을 나선 지 한 시간도 더 지났지만 아직 6KM밖에 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정자에 앉아서 한숨 푹푹 쉬며 아까 먹다 남은 리찌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그래도 가야지.... 휴 

조금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조금만 가면 '위미리'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서 몇 해 전부터 제주에 오면 숙소는 꼭 위미에 잡았었다. 아내와의 추억이 많은 곳이니 그곳에 가면 힘이 날 것이라 생각을 하며 달리고 달렸다.

 

PM02:43 이동거리 40KM

안 그래도 덥고 힘든데 길을 잘못 들어 킥보드를 끌고 오르막을 오르다가 고개를 돌리니 귀여운 오두막 같은 가게가 눈에 띄었다. 뭐에 씌었는지 가게에 들어갔고,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취해 햄버거 세트를 하나 주문 했다. 분명 점심은 먹었었는데 말이지.. 너무 힘들고 땀 흘렸으니깐 먹어도 된다고 합리화하며 맛있게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허허 이번여행이 끝나도 살은 하나도 안 빠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 꽤나 잘 먹는 듯. 

이제 6KM만 지나면 기다리던 위미에 도착 예정! 힘을 내서 달려봅니다.

 


PM 04:21 이동거리 46KM

위미에 도착은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걱정되던 부분 중 하나였는데, 킥보드 바퀴에 문제가 생겼다. 여행을 오기 전 데카트론에서 성인용 20만 원짜리 킥보드를 구매할까 고민을 하다 그냥 오랫동안 타던 킥보드를 갖고 여행을 하기로 정했는데, 갖고 있던 킥보드 최대하중이 70KG이어서 걱정이 됐었다. 내 체중이 85KG에 가방이 약 15KG 정도 되니깐 최대하중 대비 30KG이나 과적인 것이다. 위미는 내리막길인데, 내리막길에서 바퀴 내부가 터져 덜덜 거리면서 어찌저찌 내려왔다. 일단 멘탈을 잡기 위해 제주 올 때마다 들리는 오뚜기빵집에서 사장님과 스몰토크도 나누고 좋아하는 빵을 사들고 나왔다. 작년에 아내와 함께 좋은 시간 보냈던 가가호호도 보이고, 조금 더 지나 위미초등학교 한켠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꼭 영화 한 장면 같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내 멘탈은 바사삭 다 깨져버렸다. 공구는 가지고 있어 바퀴만 구하면 수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한참을 앉아 핸드폰으로 여러 방면으로 검색을 해봤다. 당근마켓도 찾아보고 쿠팡도 찾아봤지만 방법이 딱히 없었다. 한참 고민 끝에 일단 오늘은 계속 나아가고 숙소가 있는 서귀포 시내에 가서 마트와 자전거 매장에 문의를 해보기로 결정을 한다. 


PM05:41 이동거리 53KM 

학교에서 덜덜 거리는 킥보드를 타고 5KM 정도 왔을까 쇠소깍 주차장 정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바퀴가 완전히 부러져 버려 더 이상 굴러가지 않게 되었다. 한숨을 푹 쉬며 '이거 조졌네...'라고 하며 그냥 들고 걸어갈까 하다 일단 빨리 숙소 체크인을 하고 시내에서 해결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까지 8KM, 한 시간만 더 가면 2일 차를 완전히 완주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PM07:19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하염없이 핸드폰만 바라보다 일단 마트에 가보기로 하고 나와 친구가 추천해 준 식당에서 오삼불고기에 맥주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무슨 맛인지, 어떻게 먹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불안한 상태로 마트로 바로 향했다. 내가 간 곳은 홈플러스였는데, 이 지점에는 킥보드 자체가 없었다. 오는 길에 자전거 매장에도 물어봤지만 킥보드는 취급을 안 하셨고, 서귀포 이마트에도 킥보드를 팔지 않는다는 것을 검색을 통해 알게 되고 어디 버려진 킥보드는 없는지 살피며 다시 숙소에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서 정말 멘탈이 부서졌다. 쿠팡은 이틀뒤에나 도착한다고 하고, 당근은 키워드 등록을 해놓았지만 매물이 있지 않아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비행기 일정 변경을 하기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내는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오면 평생 후회로 남을 수 있으니깐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을 해줬고, 그 말에 일단 포기는 미뤄두고 내일 시내에 있는 어린이 용품 매장에 가보기로 해보며 잠을 자기로 한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아내가 아니었으면 이번 여행은 여기서 끝이 났을 수 도 있었다. 다시 한번 여행을 이어갈 수 있게 용기를 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총 소요시간 7시간 57분

총 이동거리 53.8KM



작가의 이전글 ep.01 34살 낭만찾아 수동 킥보드 타고 제주 일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