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제주도의 어느 곳을 두 번 가고 나서
둘 곳이 거기밖에 없었다. 계속된 승리에 콧대가 높아진 알파고에게 처음으로 과부하를 일으켰던 바둑기사는 기자회견에서 담담했다. 승률 0.0007% 게임에서 모니터에 항복 선언하는 팝업창을 띄우고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니. 낙하산 없이 하강하는 출산율보다 무인 키오스크의 번식 속도가 더 매운 시대에 스크린 뒤편으로 숨어 괴롭히는 AI가 참교육 받자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열광했다. 한 분야의 인류 정점이자 고수의 연이은 패배에 절망하다 새로운 미래를 엿본 걸까? 난공불락이라 불린 로보 사피엔스가 돌을 던지게 만든 이세돌 기사님의 78수. 오만한 신기술에게 선사하는 압도적인 불가항력과 거역할 수 없는 신성한 구원의 빛을 역사는 이렇게 기린다. 신의 한 수. 존엄한 결단의 순간은 무례하게 찾아온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갈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차를 돌리고 핸들 우측에 붙어있는 Next 버튼을 연신 눌러댄다. 가수 윤하의 <잘 지내> 전주가 희미하게 들리고 나서 불쑥 드는 의문이 방황하는 오른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폭주하는 생각에 브레이크를 밟게 한다. 언제부터 이 곡을 많이 듣게 됐지? 어느 날 우연히 본 영상에 아티스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다 갑자기 팔을 앞으로 내밀어 허공을 휘젓는다. 쩌든 하루에 아무 감흥 없이 다음 썸네일을 누르려다가 스크린에 비친 그녀의 어설픈 손짓이 교감을 원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휘가 아니라 수화였구나. 유성과 무성의 아카펠라가 그리는 무지개에 무미건조한 얼굴이 한동안 다채롭게 물들었다. 잊혀진 무언가를 떠올려 듣기 시작한 노래는 이번 동행에 동승자석을 당당히 차지한다. 낯선 타지에서 같은 곳을 두 번이나 간다니 분명 시간 낭비일지도 몰라.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 아닌가? 떠다니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출항 전날 퍼마신 한라토닉이 위장의 역류를 볼모 삼아 두개골을 쑤셔댄다.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영장류는 레몬을 곁들이지 않고 과음한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탓하면서도 알고리즘의 강화 학습으론 재단하지 못하는 미지의 보물을 찾아 기어를 올린다.
구멍이 송송 나있는 현무암들은 디퓨저 스틱이 되어 아침 바다를 저마다 양껏 머금는다. 파도와 부딪치는 돌들은 재빨리 거품으로 흩어져 샛보름과 갈보름을 번갈아 올라타 속눈썹과 볼결을 훑고 코끝을 어루만진다. 병에 담고 싶은 씨톤치드가 멀리서 보면 언뜻 6살 아이로 착각할 만큼 큰 강아지를 모래사장을 방방 뛰게 하는 걸까? 영상과 활자를 저울질하느라 바쁜 두 눈의 검은 자는 어쩐 일인지 얌전하다. 너도 직감하고 있구나. 마음 한 구석에 석고로 박제된 오뚝이들을 하나씩 떼어내어 흘려보내고 있단 걸.
KF94 마스크에 익숙해진 들숨은 소금기 섞인 공기를 힘껏 들이켜자 꺼진 필터 기능을 찾느라 허둥지둥한다. 짠내와 산소결핍에 어지러워 차 트렁크에서 의자를 꺼내 앉는다. 눈을 감자 지구와 달이 줄다리기하느라 서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밀당하는 너울은 잠가둔 내면에 노크해 문을 열고 빛나는 호수로 천천히 데려가 발을 기어이 적신다. 깊은 곳에는 반짝이면서 쫓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 손을 뻗자 단단한 무언가가 철크덩 소리를 내며 먹이를 포획한 뱀처럼 팔을 거칠게 휘감았다.
차갑디 차가운 사슬들에 화들짝 놀라 깨니 드넓은 수평선이 펼쳐진다. 날씨의 변덕을 기대한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밑으로 돌리니 어젯밤 불멍의 잔재들이 땅 위에 흑점으로 찍혀 있었다. 괜스레 발을 이리저리 쓸면서 밤을 지새워 계획한 완전범죄의 증거를 덮는다. 우선 데카르트와 하이데거를 도려내고 헤겔과 프로이트는 모아 썰어낸다. 그다음엔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을 끊어내야만 한다. 고약한 리처드 도킨스도 심판 대상이다. 유죄의 연장선상으로 가지런히 플레이팅한 잠언과 명징하게 약속된 수식들을 보고 마음 약해지기 전에 생수를 벌컥 들이킨다. 버려진 활주로에 불이 밝혀지고 그들의 이상에 매여있던 날개가 펴진다. 무리와 멀어진 갈매기 한 마리가 건너편 섬으로 떠난다. 비워낸 페트병을 움켜쥐자 운명에 저항하는 비명소리가 거만하고 권태만 짙은 하늘을 뾰족하게 가른다.
지나친 무언가를 위해 별들을 더 이상 잇지 않기로 했지. 나는 논할 가치도 없는 파스칼의 내기를 거부한다. 선전포고가 끝나자 먹구름에 가려진 사슬들이 기다렸단 듯 포문을 열어젖히고는 비상하는 개체를 향해 맹렬히 빗발친다. “Mayday! Mayday! 여기는 KM0614, 관제탑 응답하라!” 바지선 하나 띄우지 않은 바다는 성좌라 불리는 무수한 신들과 나약한 인간 중 누군가 피를 봐야 하는 트로이 전쟁터로 뒤바뀐다. 소원을 빌지 않는 이는 혼자서 기약 없는 승전보를 기다리며 애꿎은 주파수 채널만 돌린다. “Mayday! Mayday! 여기는 바다 위, 어디에도 엘도라도는 없었다! 응답하라! 착륙지가 필요하다!” 다급한 교신 신호가 망각의 바다에 묻히는 불시착을 수십 번 목도한다. 안녕 내 전부였던 것들. 짓이겨 흩어진 고철들은 바벨탑에 바쳐져 스카이라인을 드높인다.
1만 시간의 현실을 미련하게 믿기로 한다. 주저앉은 이별과 반추하는 아픔도 무뎌져야 해방길을 진군하기에. 위대하고 경이로운 적들에게 끝까지 무르지 않던 삼별초의 결기가 <인류의 미래, 희망편> 을 보여준 영웅 이세돌의 한 수를 거쳐서 날 옛 담모라 제국이었던 이곳으로 오게 한 것인가? 성은이 망극하지만 차라리 알파고가 됐으면 좋겠다. 메모리 리소스나 차지하는 삶의 의미 같은 오그라드는 Loop문은 지워진 채 코딩되니깐…. 요즘 시대에 낭만을 품은 돈키호테는 멸종위기라 그저 주어진대로 학습하고 0과 1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며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자기 자신과 하루 종일 싸울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셔터 내린 공방에 측량되는 것들이 유의미한 결괏값을 결산하느라 시끄럽다. 사람은 공허하면 살아있지 않는 걸까? 작업실 우측 한켠에 멎었던 쇳소리가 다시 드리운다.
어디든 입을 대고 싶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지루한 공백을 정복하러 찾아온다. 젖은 코를 훌쩍이며 엉거주춤 일어난다. 오뉴얼에 입은 한겨울용 파카는 전날 밤 고독을 견디느라 숨이 죽어 있어 양팔을 여러 번 쓸어 올려 따뜻한 체온을 되살려낸다. 잠긴 목을 대신해 두 손을 하늘로 쭉 뻗는다. 옷깃 사이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을린 내가 싸늘한 바닷바람에 로스팅된 침묵의 밤을 풍긴다. 고막을 찢어댄 비상선언이 술렁이는 수평선을 붙잡아 다섯 개의 선으로 긋고 쓸쓸하고 외로운 부표들을 포섭해 음표 삼아 곡을 써본다. 흐릿한 기억의 습작은 의식이란 선율에 스며들어 커튼콜을 잊은 채 쉼 없이 변주한다. 빈속이라 까칠한 뱃고동들이 어느새 하르방과 장난치면서 까르륵거린다. 무뚝뚝한 방파제도 옆에 앉아 신의 합주를 들으며 다정하게도 활주로를 그리고 있다. 육지에서 애써 길어온 말들이 사라졌다.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하루다.
그날, 나는 나와 잘 지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