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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독일기 Sep 28. 2022

승리를 부르는 하이볼

에세이 |  흐릿한 연애의 베팅

 



살다 보면 승부를 봐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불확실한 미래에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서 이기는 짜릿함은 끊기가 힘들다. 텍사스 홀덤 포커는 평등해서 매력적인 게임이다. 손에 쥔 2장의 패와 보드에 깔린 모두가 공유하는 5장의 커뮤니티 카드로 서로의 우열은 가린다. 사회적 권위도, 나이도, 지위도 이 판에선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게임에는 상대와 나, 카드 그리고 칩뿐이다. 딜러가 던져주는 카드를 두 손으로 포개어 조심히 들쳐본다. Ace, King이다.  



 정말 흔하지 않게 좋은 패가 갑자기 들어와 흥분해버려 들킬까 조마조마하다. 여기 보드 카페 사장님이 포스터까지 직접 만들어 밀고 있는 '승리를 부르는 하이볼'  모금 들이킨다. 크으.. 쓰다 . 바텐더는 사장에게 앙심을 품은  분명해. 고작 8 원짜리 저렴한 하이볼에는 달달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산토리 위스키가 왕창 때려 넣어져 있거든. 차디찬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니 어질어질한 배율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얼굴에 쓰라린 찡그림만 남긴다. . 이래서 승리를 부르는 하이볼인가? 오고 가는 베팅에 칩을 만지작거리며 냉철한 척하느라 목이 타들어가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빈털터리  정신 차려야 ! 하이볼  모금 들이키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첫 베팅은 나쁘지 않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동그란 얼굴에 귀여운 목소리를 갖고 있어 내 취향이었다.  "뭐 하시는 분이에요?" 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칩을 테이블 앞으로 건다. "글쎄요." "몇 살이세요?" "그게 왜 궁금하세요?" 서로가 돋은 가시에 찔릴지 않게 조금은 거리 두자는 암묵적인 룰로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생각해도 뚝딱뚝딱 뚝딱이니 상대는 내 패를 알아차리고 여유 있게 받아친다.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판세에 잠시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다. 그녀와 게임을 계속 오래 하려면 세련된 방식으로 접근하자. 장고 끝에 악수를 두니 늦게 전에 빨리 주도권을 가져와야 한다. 어느덧 새벽 1시, 손을 높이 든다. 판을 흔들려면 역시 술이 필요했다.  



 이미 1차, 2차를 거쳐서 알콜에 찌든 간을 위해 하이볼 두 잔 주문한다. 그다음엔 별로 기억나지도 않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잡담을 주고받았다. 연거푸 무려 8잔을 시킬 때쯤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 초조해진다. 알쓰인 나와 다르게 멀쩡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며 아직 빈틈을 찾지 못해 머리를 굴려 봐도 다음 스테이지 각이 안 나와 절망한다. 그녀가 바라는 게 뭘까? 엄지손가락을 깨물며 고민한들 상대 패는 보여주지 않을 거고, 나는 원하는 게 확실하니 여기서 꽁무니를 내뺄 순 없었다. 그래, 올인이다. 잽만 어설프게 날리는 탐색전은 관두고 승부수를 과감히 던져 선을 확 넘는다. 취했다는 구실로 이성을 포기한 손은 눈보다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는다. 계산보다 빠른 본성에 상대방 반응이 어떨지 불안했지만 그녀는 그저 가만히 내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싫진 않은 표정이다. 승리를 부르는 하이볼, 만세!






 30분 안에 호구를 찾지 못하면 내가 호구다. 테이블에 있는 불문율은 나와 관련이 없을 거라 오만했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시작했던 그녀와의 게임은 잔잔한 마음에 불을 질러 계속해서 혼을 빼놓아 흔들러 댄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말다툼, 사랑을 구걸하는 구차함,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억지로 계산하려 드는 아둔함이 나를 점점 지치게 한다. 그날 밤, 그녀와 가까워졌다고 자신했었다. 내가 이겼다고 여긴 판에 난 내 모든 패를 깠지만 게임을 이어하려는 그녀의 몰아치는 기싸움에 아파만 갔다. 함께 있을 때면 짜릿해 언젠가 미워하는 사이로 바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쫓아간다. 나를 접고 이어간 관계에 어느새 자존감이 바닥을 긁는다. 누가 카드 게임이 공정하다고 했던가?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은 말했지. "세상이 아름답고 평등하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뭐 먹고 사니?” 애초부터 그녀가 처음 테이블에 다가왔을 때 이미 꾀임은 시작됐다.



 그녀는 연애라는 게임에서 갑을관계를 빠르게 확립하고 승자독식이라는 이 바닥 생리를 영리하게 이용했다. 한판은 이겼지만 그 이후는 가면 쓴(어쩌면 내가 씌운) 타짜에게 완벽히 말려들었다. 그녀에게 내 생명력이 빨려 들어간다는 걸 알아차리자 서로 베팅한 칩을 그만 Chop(반/반)하자는 내 제안에 그녀는 나의 '없음'을 알아차리고 카드를 심장 쪽으로 날카롭게 던진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타입인가 봐? 아.. 테이블을 떠나겠다는 걸 직감한다. 빠르고도 일방적인 통보에 질척이며 잡을 의지조차 깔끔하게 썰린다. 칩도 마음도 탈탈 털리고 나서야 광기 어린 질주는 누군가는, 아니 내 손이 카드에 베어야 멈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사랑 앞에 이성의 잣대를 어설프게 들이댄 오만의 대가는 시아시도 안된 맥주처럼 쓰디썼다. 똥멍청이 같은 베팅에 머리로는 반성을 되뇌지만 마음 한켠의 다른 자아는 슬프고 씁쓸하고 허탈하다. 고통을 빨리 벗어나려면 역시 남 탓이 최고다. 나쁜 X. 애초에 함께 할 생각이 없던 거야! 패잔병은 합리화란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절뚝절뚝 거리며 다시 테이블로 향한다. 가진 패가 없다한들 살다 보면 한 번쯤 승부를 봐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불확실한 미래에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서 이기는 짜릿함은 끊기가 힘들다. 설사 그게 신기루라도… 손을 다시 뻗는다.





“여기 빌어먹을 하이볼 한잔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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