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을 읽을 결심(1)

콩깍지의 폭력

by 김우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은 한국은 물론 세계 영화의 역사에 남을 만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나에게 재미를 넘어서 어떤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언젠가 관련하여 글을 끄적여보고 싶었다.

아래에서는 이 작품을 시퀀스 별로 나누어서 그 의미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해보려고 한다(시퀀스의 구분은 자의적이다. 그리고 혹시 아직 영화를 안 본 분이라면 우선 영화부터 보시기를 권한다).



#1 주인공 장해준과 후배 오수완



영화는 몇 발의 총소리, 그리고 "살인사건이 뜸하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라는 형사 장해준의 푸념이 들려오면서 시작된다. 이는 그가 형사이면서도 폭력과 살인을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임을 암시한다.


이어서 정확히 반으로 분할된 화면이 잡히고 왼편에는 해준이, 오른편에는 그의 후배인 오수완이 보인다.

둘은 사격연습을 막 마친 상황이다. 해준의 사격지에는 탄착이 가운데로 가지런하게 모여있고, 수완의 사격지에는 탄착이 이리저리 흩어져있다. 두 사람의 사격실력 차이는 해준의 강박적인 성격과 수완의 느긋한 성격을 의미한다. 둘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복장을 보아도 넥타이를 멘 해준에 비해 수완은 티셔츠를 입고 있다. 해준은 영화 내내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 차림이다(그렇지 않은 장면도 있는데, 그 의미는 그때 살펴보자).


해준은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질곡동 살인사건을 언급하며 수완에게 함께 조사할 것을 권유한다. 이때 해준은 후배인 수완의 자켓을 직접 가져와서 그에게 입혀준다. 이미 3년이나 지난 살인사건을 추적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 수완을 억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수완은 칼에 찔리게 된다. 해준의 욕망에 이용당한 결과다.


해준은 제보를 받고 PC방을 찾는다. 알바생과 대화하는 해준은 무표정하지만 강한 눈매로 상대를 바라본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다. 대상을 강하게 바라보는 해준의 눈은 이 영화의 주요한 포인트다. 그리고 알바생의 대사에서 해준이 이미 용의자의 사진을 제공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보는 것'이다. 그것은 듣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진에서 무언의 목소리를 듣거나 어떤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해준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진에서 어떤 정보를 얻으려면 나의 두 눈으로 먼저 사진을 보아야 한다. 해준은 눈을 강하게 치켜뜨고 무언가를 보는 행위를 중시한다. 그는 형사로서 세상을 정확하고 똑바로 볼 수 있다고, 나아가 그렇게 보아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다음 장면에서 수완은 주말에 잠복 근무를 하는 자신을 두고 부인이 있는 집에 내려가는 해준에게 불만을 내비친다. 해준은 안개가 자욱한 밤거리에서 졸음운전을 하고 있다. 안개는 시야를 제한한다. 보는 것에 집착하는 해준은 불면증에 시달리는데, 안개는 그를 잠재운다. 그는 안개 속에서 시야에 대한 강박이 감소되어야만 잠에 들 수 있다. 그렇지만 해준은 이번에도 눈을 부릅뜨고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안개에 저항한다.


해준의 부인은 '이포'라는 가상의 도시에 산다. 이포는 항상 안개에 둘러싸여있다는 설정이고, 원자력 발전소가 존재한다. 게다가 이포에는 살인사건도 없다. 세상을 선명히 보아야 하는 해준에게, 그리고 살인사건을 다루는 형사인 해준에게 이포는 도통 정이 들지 않는 도시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는 우리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한편, 절망과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역설적인 존재다. 해준에게 가정은 모처럼 쉴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만큼 불안과 초조를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2 해준의 부인 안정안



해준의 부인 안정안은 이포 원자력 발전소의 과장이자 최초의 여성 원자로 조종감독자이다. 그녀의 직업은 원자력이라는 거대한 힘을 제어하여 '안정'되게 다루는 일이다. 자신에 대한 신문기사를 액자로 걸어놓을 만큼 스스로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엄마 원전 완전 안전"이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녀는 이름도 '안정안'이다. 하지만 폭력과 살인사건이 삶의 원천인 해준에게 '안정'은 도리어 그를 옭아매는 구속에 불과하다. 그래서 해준은 언제나 안정을 지향하는 안정안과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다른 액자들은 아들의 사진과 상장 등이며, 해준에 관한 것은 없다.


안경을 끼고 아이패드로 물리학 논문 같은 것을 읽으며 등장하는 정안은 자신과 같은 '이과'인 중학생 아들의 교육에 열심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 공간을 '이과'스럽게 꾸며놓았다. 아마 같은 작가의 것으로 보이는 비슷한 미술작품들이 벽에 걸려 있는데, 이는 그녀의 결벽증적인 취향을 보여준다. 그녀는 하나의 질서와 틀을 가지고 가정을 구성한다.


정안은 초밥을 사먹길 원했으나 해준은 아무 초밥이나 먹기는 싫다며 집에서 따뜻한 국물 요리를 한다. 이포로 전근을 오라는 정안의 제안에 해준은 씩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정안은 미묘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본다. 자신이 구축한 안정된 질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해준에게 정안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가 살짝 드러나는 장면이다.


정안은 자기 옆자리의 이주임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꺼내더니 주말부부 10쌍 중 6쌍은 이혼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섹스리스 부부의 55%가 이혼한다는데 당신은 괜찮냐며 받아쳤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주말부부의 이혼률이 60%로 더 높다는 점이다. '이과'인 정안이 이 말을 괜히 했을리가 없다. 해준 역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이럴 땐 웃음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어색한 실소를 터트리는 해준을 정안이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새하얀 바탕에 '헤어질 결심'이라는 글자가 뜨고, 영화를 상징하는 푸른 색과 붉은 색이 점멸하다가 다음 시퀀스로 넘어간다. 어쩌면 정안과 해준은 이때 헤어질 결심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3 기도수의 시체



장면은 기도수 살인사건 현장으로 이어진다. 화면의 전체적인 색감은 푸른 색이다. 해준은 시체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산봉우리에서 떨어져 죽은 기도수의 궤적을 굳이 고생을 해가며 반대로 올라간다. 이는 죽음의 순간을 오롯이 자신의 감각과 신체 안에 새겨넣으려는 일종의 의례다. 해준은 기도수의 소지품마다 이니셜이 적혀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소유욕을 지적한다.


이어서 산봉우리 위에서 기도수의 시체를 내려다본다. 항상 눈을 부릅뜨기에 해준의 눈은 자주 피곤하다. 그래서 해준은 영화 내내 안약을 넣는다. 그런 해준이 내려다보는 장면과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시체의 눈이 산봉우리 위의 해준을 올려다본다. 시체의 눈은 흐릿하며 개미가 기어다녀서 시야를 방해한다. 죽음이 해준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산봉우리는 마치 남성의 성기처럼 보이는데, 해준은 그 성기 위에 우뚝 서 있다. 이는 해준이 남성적 질서의 세계, 즉 모든 것이 깨끗하게 분할되고 선명하게 이해되는 세계를 지향함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여성적 질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죽음이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의 설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반대로 나의 시야의 대상인 그 무엇이 곧 나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살인사건을 즐기는 해준은 눈에 안약까지 넣어가며 죽음을 열심히 바라보지만, 이는 곧 그 죽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응시에 해준이 사로잡혀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죽음으로부터의 응시야말로 해준에게는 최고의 쾌락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는 천으로 덮인 채 눈을 감은 기도수의 모습이 나온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이렇게 시체라는 불가해한 타자(그것과 더 이상 대화하거나 생각을 나눌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내뿜는 공포스러운 아우라를 항상 덮어 왔다. 그것이 문명이 유지되고 살아온 방식이다. 죽은 자들은 침묵해야 한다. 산 자들의 세계를 혼돈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들이 이곳으로 침범하지 않도록 제사를 지내거나 굿을 하여 그들의 영혼을 달랜다. 유령의 출몰을 막고 죽음의 응시를 이 세계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햄릿에서 알 수 있듯이, 유령이 등장하면 왕국의 질서는 자신의 거짓됨을 폭로당한다.



#4 송서래의 등장



이 시퀀스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선 죽은 기도수의 스마트폰이 켜지자 부인 송서래와 함께 찍은 대기화면이 보인다. 해준은 잠금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패턴을 입력해보지만 열리지 않는다. 화면의 색감은 여전히 푸른 색이다. 해준과 수완은 서래가 기도수의 딸이라 생각했는데, 시체를 확인하러 온 서래는 자신이 그의 부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때 서래를 바라보는 해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서래의 모습은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서래의 첫 등장이 '오해' 속에서 이루어지며, 또한 '목소리', 그것도 외국인이 하는 어색한 한국어로만 알려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보통 여자 주인공이 처음 등장하면 카메라는 그녀의 전신을 아래에서 위로 훑거나, 혹은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이는 서래가 보는 것, 그리고 확실하고 정확한 것에 집착하는 해준의 인식을 뒤흔드는 타자적 존재라는 점을 상징하는듯 하다. 형사로서의 해준은 종합적인 판단을 위해 사건을 '보고', 용의자나 목격자의 구체적인 진술을 '듣는' 것이 일이다. 그런데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색한 언어만 들려오는 서래의 첫 등장은 그녀가 해준의 인식 체계로는 포획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을 '부족'이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등장하는데, 이는 서래가 그 자체로 결여와 공백임을 뜻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해준은 서래의 손등에 붙은 밴드, 그리고 약지의 결혼반지를 사진으로 찍는다. 이것은 서래의 정체성 그 자체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여자다. 해준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그녀의 전부를 사진으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해준에게 서래는 공백의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서래가 '마침내' 남편이 죽을까봐 걱정했다는 어색한 문장을 구사하자 해준은 그녀에게 패턴을 좀 알고 싶다고 한다.


마침내 남편이 죽을까봐 걱정했다는 표현은 한국인에게는 어색하게 들린다. 여기서 해준 뿐만 아니라 관객 역시 혼란을 느끼게 된다. 외국인인 서래는 단지 한국어가 '부족'해서 어색한 표현을 쓴 것인가, 아니면 남편이 '마침내' 죽기를 바랬던 것인가? 여기서 의미의 명확한 경계는 사라지고,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으로 판단하기 힘든 모호한 영역이 등장한다. 마치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고용주의 명령에 대해 "I would prefer not to", 즉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라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하는 바틀비처럼 말이다. 만약 바틀비가 "I would not prefer to"라고 답했다면 이는 명확한 부정을 뜻한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해 고용주는 화를 내거나 반론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바틀비의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기에, 고용주는 혼란에 빠진다. 하겠다는 건지, 하지 않겠다는 건지가 명확하지 않다.


서래의 '부족'한 한국어는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진술에 대해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형사 해준에게 서래는 기묘한 혼란을 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이 '부족'에 기인하는 혼란이야말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항상 혼란 속에서 시작된다. 아니 사랑은 혼란 그 자체다. 드라마의 흔한 설정을 보라. 잘 생긴데다 능력 좋고 젊은 재벌 후계자 남성이 어느날 갑자기 가난하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성, 혹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미혼모와 사랑에 빠진다. 평소에 안경을 쓰던 그녀가 우연히 안경을 떨어트리면, 화면이 슬로우로 바뀌고 꽃가루와 음악이 흘러나오며 넋 나간 표정의 남성을 비추는 클리셰도 익숙하다.


사랑에 빠진 남성에게 그의 어머니는 항상 화를 내며 소리친다. "너 미쳤니?" 왜냐하면 그녀와의 사랑은 남성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 일반적으로 재벌 후계자가 말단 직원이나 미혼모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친 사랑을 보고 싶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랑은 없다. 미친다는 것은 내가 걸어온 기존의 삶의 질서나 방향, 그리고 주위의 모두가 강조하는 루트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친구에게 상담하면 주로 이런 말을 듣는다. "정신 차려." 하지만 정신 차린 채로 사랑은 시작되지 않는다. 다음 달에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 지금은 연애를 할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 아무리 부정해도 그 사람 생각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 곧 콩깍지가 씌어버려서 거부할 수 없는 상태가 사랑이다. 손익이나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주체적인 계획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나를 찾아와 사로잡아 버린다. 콩깍지는 사랑이 찾아오기 전까지 나를 지배했던 모든 루틴과 목적을 일순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지금은 연애를 할 때가 아니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가족이나 친구가 아무리 말려도, 한번 찾아온 사랑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폭력과 살인은 혼란이다. 차분하고 질서잡힌 상황에서는 폭력과 살인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 역시 폭력, 살인과 유사한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파괴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부인에게 잡혀 살고, 살인사건도 뜸한 날들을 보내던 해준에게 서래라는 사랑의 폭력이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흥분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서래의 목소리는 해준이 아무리 강박적인 눈으로 바라보아도 파악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와 인식의 저편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반적인 정의와는 달리 이해와 인식을 자신의 속성으로 가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상대방을 나의 세계 속에 집어넣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사랑은 상대방이 궁금해서,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미칠 것 같을 때, 즉 상대방을 소유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 그래서 해준은 서래의 패턴이 궁금하다.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내고 만 해준은 금방 그 패턴이 스마트폰의 패턴이라고 얼버무린다. 남편이 죽었는데 멀쩡해보이는 서래에 대해 수완은 미심쩍어 한다. 해준은 우리 와이프도 그럴 것이라며 서래를 감싼다.


(나머지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에. 근데 영화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