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VS 정신분석학적 변증법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합니다. 그리고 네 명의 자식을 낳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행위를 정작 오이디푸스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벌였다는 겁니다. 오이디푸스는 어느날 우연히 거리에서 시비가 붙고, 다툼 끝에 한 남자를 죽입니다. 그가 죽인 남자는 바로 테베의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였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남자가 테베의 왕이라는 것은 물론,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이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영웅이 된 오이디푸스는 과부가 된 테베의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함으로써 새로운 왕이 됩니다. 그렇지만 집안은 콩가루가 됐습니다. 아들이 남편이 되었고, 어머니가 부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자식에게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동시에 형이자 오빠이기도 하다는, 사회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이런 천인공노할 행위에 신도 노했는지 테베에는 역병이 돕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이 테베에 있는 한 역병이 멈추지 않으리라는 신탁을 듣고는, 호기롭게 살해범을 찾아서 두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런,,,탐정(아니 예언가)을 고용하여 범인을 찾았는데, 그게 글쎄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던 겁니다. 미스테리한 사건의 범인을 쫓는 여정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범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합니다. 서로 대립해야 할 살인범과 추적자가 겹쳐진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일반적인 변증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변증법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겁니다. A(테제)가 자신과 대립하는 B(안티테제)와 갈등을 벌이다가 C(진테제)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대화나 토의를 통해 합리적이고 종합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을 말하죠.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짬짜면을 주문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A와 B의 대립은 '지양'되고, 보다 보편적인 C의 단계에 이릅니다.
우리가 보는 영화나 드라마,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은 종종 변증법의 구조를 취합니다. 과거 최불암 배우가 주연을 맡았던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형사(A)는 자신과 대립하는 범인(B)을 쫓고 사건의 해결(C)에 도달합니다. 셜록 홈즈도 마찬가지지요. 홈즈(A)는 조수 왓슨과 함께 미궁에 빠진 사건(B)을 조사하고 마지막에는 실체적 진실(C)을 제시합니다.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은 이 구도를 정확히 따릅니다. 이 고등학생 탐정들(A)은 놀라운 추리 솜씨를 발휘하여 살인범(B)을 찾아내고 "언제나 진실은 하나"(C)라고 외칩니다.
장르를 바꿔 볼까요? 얼마 전에 작고한 도리야마 아키라의 명작 <드래곤볼>도 구도는 똑같습니다. 손오공(A)이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B)과 사투를 벌이고 결국 인류를 위기에서 구해냅니다(C). 이 과정에서 손오공은 더욱 강해지고 그때마다 친구가 하나씩 늘어갑니다. 적대하던 적들이 친구가 되는 것이죠. 변증법은 테제가 안티테제를 거쳐 진테제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원래의 테제에게 많은 것을 남겨줍니다. 한마디로 남는 장사입니다. 벌써 30년 가까이 연재 중인 <원피스>는 주인공 루피(A)가 해적이 되어 세계를 모험하는 과정에서 많은 적과 세계의 비밀(B)을 만나는 과정이 스토리의 주요한 뼈대입니다. 이미 루피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아마 여행의 끝에서 무언가 더 큰 것(C)을 얻을 겁니다. 그것이 동료와의 우정이건, 세계의 진실이건, 아름다운 추억이건, 물질적 보상이건 말입니다. 변증법적 과정은 우리에게 김국환 씨의 노래 <타타타>의 가사처럼 적어도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를 약속해줍니다.
이런 클리셰는 인류의 역사 초기부터 존재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 불리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볼까요? 악행을 일삼던 주인공 길가메시(A)는 친구 엔키두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훔바바, 하늘의 황소 같은 괴물들(B)과 싸웁니다. 길가메시는 그 과정에서 소중한 친구인 엔키두를 잃음으로써 중요한 깨달음(C)을 얻습니다. 여기서 상실은 보상으로 기능합니다. 이제 여행에서 돌아온 길가메시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훌륭한 왕이 됩니다. 망나니가 여행을 통해 성군이 되는 변증법적 과정인 겁니다. <오디세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위해 집을 떠난 오디세우스(A)가 온갖 고초(B)를 겪다가 나중에는 배에 보물(C)을 한가득 싣고 돌아오지요.
그러면 이런 변증법적 과정이 다양한 장르에서 계속 변주되어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이것이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찬 우리의 삶에 목적과 방향, 나아가 의미를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변증법적으로 삽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 힘든 공부를 견뎌내는 것은 좋은 대학과 인생의 성공이라는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입니다. 지금 참고 공부하면 밝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것이지요. 가끔은 미래의 남편이나 부인의 외모가 보상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테제가 안티테제를 극복하고 진테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대학에서 학점을 따기 위해 고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 들어가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주말에 다시 학원에 나가는 것도 그렇구요.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식이나 코인, 부동산 투자 등도 마찬가지로 변증법의 논리에 기반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책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것이지요. 이처럼 변증법의 유혹은 미래의 결실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고달프고 힘든 삶을 견딜 수 있는 동력을 부여합니다.
이런 변증법적 삶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은 이와 다른 구조를 가집니다. 변증법이 혼란을 제거한다면,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은 혼란에 머무릅니다. 여기에서는 A가 B를 극복하고 C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겹쳐집니다. 살인범(B)을 쫓던 오이디푸스(A)가 사건을 해결하여 왕국의 평화(C)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A)=살인범(B)'이라는 사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면서 살인범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한 사람이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아버지이자 형, 오빠가 되는 이상한 상황이 초래되죠. 그 결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일까요?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에는 보상은 없고 상실만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오이디푸스는 분명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진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두 눈을 상실했지만, 그대신 이제 진리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은 안이한 보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와 달리 운명과 진리의 가혹함에 진정으로 눈을 뜨게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처지에 놓입니다. 보상을 위한 노력이라는 단선적 인과성의 욕망에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것들에서 튕겨져 나갈 때, 다시 말해 혼란에 머무를 때 우리는 자유와 처음으로 대면합니다. 자유는 감추고 싶었던, 혹은 무의식적으로 배제했던 진리와 마주하는 순간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때 근원적인 고통을 내장한 불가능한 선택이라는 것이 강제됩니다.
<메멘토>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A)이 아내를 살해한 범인(B)을 찾아다니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아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보들을 자기 몸에 문신으로 새겨넣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주인공은 범인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범인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즉 A와 B가 겹쳐지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실은 자신이 범인이었다는 진실과 마주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도 비슷한 구조를 가집니다. 어느날 주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밀실에 갇혀서 15년을 보냅니다. 불쌍하게도 그동안 군만두만 먹지요. 밀실에서 풀려난 주인공(A)은 온갖 고생 끝에 자신을 괴롭힌 범인(B)을 기어코 찾아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자신이 밀실에 갇힌 원인을 제공한 것은 과거의 자신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볍게 내뱉었던 말이 돌고 돌아 그의 비극을 가져온 것이지요. 열심히 범인을 쫓았는데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는 역설. 대립하던 타자가 실은 내 안에 있다는 역설.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는 역설. <수사반장>이나 셜록 홈즈 등에서는 결코 다루어지지 않는 역설입니다. 이 역설의 진실은 너무나 무겁습니다. 그래서 <메멘토>의 주인공은 다시 눈을 감고, <올드보이>의 주인공은 스스로의 혀를 자릅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도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의 구도를 따르는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시골형사와 서울형사는 열심히 연쇄살인범을 추적합니다. 시골형사의 '감', 서울형사의 '과학수사'가 총동원되지요. 하지만 이들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합니다. 왜 못 잡았을까요?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실제로 벌어진 미제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진범이 밝혀집니다만, 영화 개봉 당시에는 아직 미제사건이었죠. 그러면 봉준호 감독은 실제 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영화에서도 범인을 잡지 못하는 걸로 결말을 낸 걸까요?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이 말하고자 한 것은 아마 범인을 쫓던 형사가 실은 범인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즉 'A=B'라는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인 것이지요. 형사는 수사과정에서 용의자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죽게 만들기도 합니다.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모는 이들의 횡포가 영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비교적 합리적인 서울형사조차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용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가 범인이 아님이 밝혀졌는데도 총을 쏩니다. 여성들을 무참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도록 내버려둔 것은 실은 형사들이기도 한 겁니다.
나아가 범인은 현대 한국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이기도 합니다. 영화에는 계속하여 전두환을 비롯한 군사독재의 풍경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산업개발이나 국가주의를 풍자하는 장면들도 자주 나옵니다. 굳이 없어도 영화의 진행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 장면들은 왜 삽입된 걸까요? 이 영화는 80년대 한국사회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입니다. 한국에서 벌어진 이 살인사건의 범인은, 즉 그녀들을 죽인 것은 바로 한국사회 그 자체라는 겁니다. 그녀들은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권력이 행한 무시무시한 폭력의 피해자들을 상징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가난한 시골형사가 아닌 사업으로 한몫 단단히 챙긴 중산층으로 나옵니다. 그는 강압적인 아버지이기도 하죠.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 아닌가요? 가난한 시절을 거쳐 이제 중산층이 된 우리.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
기사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거만한 자세로 사업 이야기를 하던 주인공은 과거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장소로 갑니다. 이곳은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곳이기도 합니다. 수미쌍관의 구조입니다. 그리고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유명한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범인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모두라는 뜻 아닐까요?
그녀들을 죽인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군사독재 시절 추진한 산업화 정책의 경제적 혜택을 보고 있지만, 그 와중에 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안락한 삶은 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벌인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임에 응답할 때만 자유가 발생합니다. 저는 봉준호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수사반장>을 보며 변증법적 범인 체포에 혈안을 올렸던 시골형사는 이제 자신이 범인이었음을 깨닫고,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자신들이 국가폭력의 피로 물든 결실을 향유하고 있는 범인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기서도 'A=B'가 됩니다.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인 것이지요.
이 진실과 마주하고 진정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이디푸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눈을 파낼 수 있을까요? 정신분석학적 변증법은 이렇게 우리에게 무거운 물음을 던집니다. 저는 일반적인 변증법의 구조에 기반한 영화보다는 이런 영화들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가령 <에이리언>에서 괴물은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능가하는 타자입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우리를 습격하는 단순한 안티테제로서의 적이 아닙니다. 에이리언은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에이리언은 인간(A)과 괴물(B)의 싸움을 그린 흔한 영화가 아닙니다. '인간(A)=괴물(B)'을 그린 작품입니다. <무간도>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형사와 마피아가 뒤섞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누가 형사이고 누가 마피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 <다크나이트>의 배트맨과 조커 등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그저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A와 B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겹쳐져 있습니다. 딱 달라붙어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관객에게 엄청난 긴장감을 가져옵니다. 나중에 또 기회가 나면 이런 영화들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 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