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Dear. k
어떤 우울은 태생적인 것이다. 또 어떤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가장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아름다웠고, 유일하게 순결한 사람이었다.
그가 남기고 간 슬픔이 있다. 그중에는 그의 잉태부터 함께 했던 것도 있고, 세상이 그에게 묻힌 것도 있고, 그를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그의 가슴에 박아 넣은 것도 있다.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신이 그에게 준 축복이었지만, 사랑은 그에게 버거운 것이었다.
사랑은 때로 안쓰러움, 연민, 동경, 성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 모든 사랑은 그를 긁어 댔다. 살점이 남지 않고 뼈가 갈릴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점점 더 숨으려 했고, 외로움 속에 파묻혔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우울은 그에게 독이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도망칠 곳이었다. 그 우울함 옆에서만 그는 재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쩌면 그 선택은 최선이자,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그의 수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십칠 년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더 솔직할 수 있었고, 의미 없는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와 함께 숨 쉬던 시간을 가졌음에 감사한다. 그 시간 덕분에 온전히 슬퍼할 수 있었다. 그처럼 순결한 마음을 잠시 가질 수 있었다. 신성한 순간들이었다. 그를 사랑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해서 내가 준 사랑에 대한 그의 복수도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 part 1
- his point of view -
늦은 오후에 눈을 떴다. 커피 포트에 물을 받고 전원을 켠다. 달궈진 쇠와 물이 만나는 소리가 들린다. 물이 끓는 동안 간단한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로션을 바른다. 너의 작은 얼굴은 몇 번이면 충분했다. 컵에 티 백을 넣고 물을 붓는다. 꿀을 살짝 더한 카라반 티. 그것을 시리얼과 함께 먹는다. 시리얼은 우유에 한 줌 씩 넣어가며 다섯 번, 혹은 여섯 번에 나눠 먹는다. 그래야 눅눅해지지 않으니까.
시리얼을 씹으며 노래를 튼다. 노래는 라나 델 레이, 혹은 쳇 베이커. 어제 읽던 책을 펼친다. 중간중간 밑줄을 쳐가며 읽는다. 너는 속옷만 입었지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커튼 친 집안은 아직도 어둡다. 차분한 표정과 화난 표정이 비슷한 너지만, 지금은 차분한 순간이라는 것을 안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너에게로 가서 안기고, 너는 그것을 쓰다듬는다. 그 부드러운 느낌에 숨을 한번 고른다. 그것이 나를 대신하길 바란다. 다 먹은 시리얼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 두고 티 백을 하나 더 꺼내 물을 붓는다. 그것을 들고 방으로 돌아간다. 침대 옆 선반에 컵을 놔두고 다시 누운 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답답함 속에서 크게 호흡한다. 차의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다시 이불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천장을 바라본다. 그때쯤 너는 나를 한번 떠올린다. 흰 천장에는 무엇이든 조금은 쉽게 그려질까.
핸드폰에는 몇 개의 알림이 있지만 읽지 않는다. 멍하니 배경화면만 쳐다보다 내려놓는다. 눈을 감은 너는 침대가 너무나도 커서 여기서 벗어나려면 한참을 뛰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움에 옆으로 살짝 구르자 조금 더 딱딱하고 차가운 침대의 가장자리가 느껴진다. 마음이 놓인다. 사실은, 그 약간의 차가움이 이렇게나 서러워서 조금 울었다.
더 이상 자고 싶지 않아서, 다시 일어난 너는 커튼을 치고 밖을 쳐다본다. 파랬던 잔디가 듬성듬성 갈색으로 변하였다. 하늘은 진하게 파랗고 얇은 몇 개의 구름이 간혹 해를 지나간다. 의자에 걸어 두었던 옷을 덮듯이 입는다. 옷 역시도 너에게는 조금 차갑고 많이 거칠다. 마지막으로 볼캡을 푹 눌러쓰고 햇빛에 눈을 찌푸리며 집에서 나온다.
햇빛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인 너는 천천히 걷는다. 집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고 중간에 난 샛길을 지나고 일렬로 지어진 스물한 개의 주택들을 지나고, 신호등 없는 도로를 하나 지나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서 쉰두 개의 가로수를 지나 쭉 걷는다. 그렇게 도착한 정류장 모퉁이엔 거미 없는 거미줄이 쳐져 있다. 오분 정도 기다리다 도착한 버스에 타고 뒤에서 네 번째 줄 왼쪽 자리에 앉는다. 십오 분 주기 버스를 삼십 분 기다렸다.
버스는 보태닉 가든을 지난다. 돗자리를 깔고 와인을 자주 마시던. 월리 테이크 공원도 지났다.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산책 코스. 너는 포티튜드 벨리에서 내린다. 나는 처음 와보는 곳이었고 너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내리지 않았다. 이곳부터는 나와는 관련되지 않은 세상이며, 너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싶었다. 네가 이곳에서 내린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짐작할 권리란 나에게 없다. 어쩌면 너는 나와 함께 있던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나. 새로운 곳의 바람과 햇볕은 어떠한가.
그렇게 버스는 한 바퀴를 돌고 난 다시 보태닉 가든에 내렸다. 어두운 초록색의 잔디와 나뭇잎들이 조금은 스산하지만 우리는 이곳의 평화를 좋아했다. 눈앞에는 끝없는 잔디밭과 빌딩보다 높은 나무들이 있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만큼은 이 큰 땅이 우리의 집처럼 느껴졌고, 가만히 누워 바람과 새, 들쥐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죽어서 땅의 일부가 되는 것을 동경하게 했다. 우리는 가져온 와인을 마시며 하루 종일 하늘을 보았고, 시를 썼고, 섹스도 했다.
이곳에 혼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해가 뉘엿이 지고 있었고, 진한 붉은빛이 나뭇잎에 부딪혀 노랗게 반사되었다.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잔디가 내 맨발을 간지럽힌다. 가만히 서 있던 자리의 흙이 짓눌려 축축한 느낌이 진물처럼 든다. 그 진물은 내가 만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겠거니 한다.
일 년 전, 싸라기 눈이 내리는 늦겨울이었다. 나는 등 떠밀렸고 선택해야만 했다. 무의미함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계속할 것인지. 온전히 무를 받아들이고 의미를 남긴 채 사라질 것인지. 그것은 라테와 플랫 화이트만큼 나에겐 다른 것이다. 그 벼랑에서 나는 영원한 추락을 선택했다. 나는 그것이 온전한 비행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것의 가치가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도 되지 못한다. 심지어 어떤 가치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민다. 자신이 맛있다는 가치는 소에겐 가장 두렵고 역겨운 단점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결국에 나에게서 충분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별 가치 없이, 이만하면 질리도록 오래 살았다.
현관문 도어록의 비밀번호 입력 소리. 너일까. 마지막 아홉 번째 기계음과 동시에 나는 무사히 사라졌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에 돌아온 너는 조금 피곤해 보인다. 가방과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이어폰을 빼며 두리번거린다. 책상에는 내가 쓰던 글이 지저분히 펼쳐져 있고, 온더락 잔에는 반도 마시지 않은 위스키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잔에 맺힌 물이 아래 깔린 종이를 조금 적셨다. 너는 내 이름을 부른다. 아무 대답이 없어서, 방에 들어가 본다. 이불은 얌전히 개어져 있지만,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높이 흔든다. 너는 다시 화장실과 뒷마당을 둘러본다. 이쯤에서 너는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하며 담배를 하나 문다.
불을 붙이며 나에게 전화를 한다. 슈베르트의 행진곡이 집 안에서 들린다. 너는 다시 들어와 내 핸드폰을 본다. 잠금이 걸려 있지 않은 나의 핸드폰에는 네가 방금 걸은 부재중 전화 외에 아무런 알람도 없다. 최근 통화 기록에는 너, 너의 어머니 그리고 출판 업체 직원만 찍혀 있다. 한참을 내려도 그랬다. 너는 그것을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내가 미리 만들어서 포장까지 해 둔 샌드위치를 꺼내 데운다. 그것이 철판 사이에서 구워지는 것을 보며,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어젯밤 일을 떠올린다.
우리는 집에서 스테이크를 구워 와인과 함께 먹었고, 디저트로 조각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케이크를 먹다가 촛불 키는 걸 뒤늦게 떠올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우리는 몇 입 먹은 케이크에 초를 꽂고, 그녀가 노래를 불러줬다. 나는 소원을 비는 척 연기했다. 마땅한 소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후 불어 초를 끄자, 네가 물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나는 대답했다. “그런 건 말하면 안 이뤄진데.” 너는 살짝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떨 거 같아?” 내가 물었다. “글쎄, 생일에 그런 걸 묻는 건... 조금 안타깝지만, 일단 찾아야지. 근데 왜 사라진 건데?” 너는 아마 ‘사라진다’는 것에 이별과 실종의 의미가 모두 포함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냥,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졌어. 아무 흔적도 없이. 굳이 현실적인 조건을 더한다면, 외계인에게 납치된 거지.” 이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을 해주는 것은 너뿐일 것이다. “그러면 뭐, 받아들여야지. 싸워보지도 못할걸? 외계인은 싸움 같은 건 모를 거야. 우리랑은 완전히 다른 사고를 가졌을 테니까” 너는 내가 사라진다는 것보다 외계인 쪽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내가 사라지면 왠지 너도, 이 세상도 사라질 것 같아” 너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런 걱정은 마. 나는 분명히 이곳에 있어. 너와 나는 이곳에, 이만큼 씩 떨어져서 존재하고 있잖아. 너와 내가 서로 진짜로 있다고 믿는 것을 보면 이 세상도 존재할 거야.” 너는 입을 한번 꾹 다물었다가 다시 얘기한다. “이 세상도 조금은 바뀌겠지. 나 그리고 우리 엄마 또 몇몇 너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그날 저녁 할 일을 제쳐 두고 너의 장례식을 가야 할 테니까. 그 뒤에는 뭐. 나와 몇몇 사람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만 가끔 널 떠올리겠지.”
나는 조금 서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랑 같은 나이에 죽은 커트 코베인은 죽은 지 몇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기억해 줘.”
“ 아직도 록스타에 대한 꿈을 못 버린 거야?”
“꿈을 어떻게 버려.”
그녀가 안쓰러워하며 대답한다. “그렇지만, 난 네가 오래도록 살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내가 전에 말한, 많은 록스타들이 스물일곱 즈음에 생을 마감했고, 나 역시 그럴 것이라는 말을 염두에 둔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경찰서까지 가는 동안 그녀는 네 번 정도 넘어질 뻔했다. 오전 내내 내린 눈이 녹았다 얼었기를 반복해서 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따라간다. 그래도 그녀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고 숨을 헐떡이며 경찰서로 들어갔다.
그 뒤로 경찰은 내 지인들을 인터뷰하고, 실종자 명단에 나를 넣고, 내 못난 얼굴이 그려진 전단지를 길거리에 붙였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머니는 내 소식을 들은 뒤로 그녀와 함께 내가 갈 만한 곳을 모두 뒤졌다. 생각을 정리할 때 가던 공원, 나의 전 직장,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출하고 하룻밤을 보낸 다리 밑, 중학교 2학년 때 가족여행으로 갔던 해변. 그녀와 첫날밤을 보낸 산장까지. 그녀에게 언젠가 말했던 곳들을 그녀는 모두 기억해 냈고 전부 가봤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이미 그들의 얼굴에선 어떠한 기대도 찾을 수 없었다.
네 번의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 경찰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이미 한참 전에 이 사건을 포기한 듯했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도 더 이상 전단지를 붙이거나,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나를 찾지 않았다. 조금의 희망도 없이 그 짓을 일 년간 하는 것은 사람을 제정신으로 살게 하지는 못한다. 그녀의 어머니도 이제는 그녀를 위로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내가 어딘가 에서 잘 살아 있을 거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난 전에 어디론 가 숨어 마당이나 가꾸며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이런저런 작은 벌레들과 개구리 비슷한 것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온다. 뒷마당에는 군데군데 꽃과 잡초가 피었고, 바람은 조금 더 둥그렇고 따뜻해졌다. 너는 창 밖에 새로 자라는 작은 나뭇잎을 쳐다본다. 그러다 창을 닫는다. 아카시아 냄새 때문이다. 너는 그것이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가만히 서서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그러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방은 낯설고 고요하다. 매일 아침 실망을 위한 의식을 하고는, 이어서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한 호흡을 몇 번 한다.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어깨를 내리고 주먹을 쥐며 거실로 나간다. 역시 적막뿐이었고, 방보다 조금 쌀쌀하다. 너는 책상 양쪽에 마주 보는 두 개의 의자를 바라본다. 한쪽 의자에 걸려 있는 카디건을 걸치며 앉는다. 의자에 두 다리를 올리고 양 팔로 무릎을 감싼다. 너의 시선에 벽에 걸린 포스터가 들어온다. 한쪽 귀퉁이가 접착력을 잃고 떨어져 있다.
잠시 그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던 너는, 노트북을 열어 메일을 확인한다. 지난 일 년간 일을 미뤄둔 너는 신임을 잃은 듯했고, 더 이상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 생활비가 부족할 때마다 너는 '여행 가고 싶어', '섹시한 자동차를 위해', '우리의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이름 붙은 통장을 하나씩 없앴다. 저번주에는 ‘결혼식’이라고 이름 붙여진 통장을 없앴다. “독립 영화의 자막 번역가를 구합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을 열어 본다. 전이었다면, 꽤나 소문난 번역가로서 그런 영화까지 손을 넓힐 수 없었지만, 너는 이제 그것을 놓칠 수 없다.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한다. 너는 그것을 보며 번역 한 대사를 한 줄 한 줄 적어 나간다. 서로를 바라보던 눈은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다. 이내 여자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고, 남자는 뒤돌아서 떠나간다. 여자가 주저앉는다. 그러자 비가 내리고, 여자의 얼굴은 빗물에 뒤덮인다. 쥐 한 마리가 여자에게 온다. 둘은 마주 보고 한참을 비를 맞는다. 여자는 쥐를 한 손으로 움켜쥔다. 그리고 일어나서 남자가 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해가 뜬다.
너는 고양이를 본다. 그것 역시 가만히 너와 눈을 맞추고 있는다. 네가 그쪽으로 몸을 돌리자 고양이는 너에게 달려와 몸을 비빈다. 너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쓰다듬는다. 고양이가 계속 노트북을 만지려 해서 너는 녀석을 바닥에 내려놨다. 다시 일에 집중을 하려 하지만 고양이가 계속해서 운다. 너는 잠시 쉬기로 하고 노트북을 덮는다. 방에서 고양이를 놀아줄 때 쓰는 장난감 몇 개를 가지고 나와 고양이의 시선을 끈다. 고양이는 장난감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뛰어다닌다.
전에 너는 고양이와 눈만 마주쳐도 미소를 머금었다. 건조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놀아주는 너는,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고양이도 그것을 아는지 이내 노는 것을 멈추고 커튼 뒤로 들어가 버렸다. 그것 역시 전에는 항상 우리의 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도 너도, 모두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너는 늦은 밤 집에 들어왔다. 신발도 벗지 않아서 카펫에 진흙이 조금 묻었다. 너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한참을 토한다. 그렇게 괴성과 함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비워내고 쓰러진 너는 새하얘진 얼굴로 변기에 기대어 앉는다. 숨을 고르며 허공을 쳐다본다. 초점을 잃은 눈에 벽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칫솔이 들어온다. 너는 양손을 두 눈에 가져다 대고 한참을 가만히 있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억이 돌아온 사람처럼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작은 화장실이 금세 연기로 뿌옇다. 너는 오열한다. 물론 조금도 소리 내지 않고. 너는 가끔 그렇게 울곤 했다. 그럴 땐 내가 근처에 오는 것도 싫어해서 난 항상 문 밖에서 널 기다렸다. 그래서 네가 우는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지켜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참을 울던 너는 벽을 짚어가며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 침대가 그녀의 작은 몸을 더 여려 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거칠게 숨을 몇 번 몰아쉬다 마침내 잠에 든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던 너는 밤 빗소리에 깼다. 냉장고로 가서 물을 병 채로 벌컥벌컥 마신다. 다시 침대에 누워 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지, 가방에서 작업용 노트북을 꺼내 책상에 앉는다. 너는 언제나처럼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영화 대사를 한 줄 한 줄 번역한다.
너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이 일을 하고 있으면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열등한 매개체인지 느껴져. 그것은 때로 잠깐의 눈빛 보다도 부정확하고, 몇 번의 호흡 보다도 부자연스러우며, 가장 큰 문제는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지. 인간들이 더 진화한다면, 언어 같은 건 추억으로 남겨두고, 눈빛과 호흡 만으로 소통과 교감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야. 다시 말해 이곳의 말과 이 배우의 대사는 나에게 번역되었을 때 이미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어 힘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아.
생각해 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며 대화하는 게 가능할 거 같아? 심지어 같은 언어 내에서도, 내 머릿속의 고양이와 네 머릿속에 고양이가 다른데, 스티브 씨의 cat은 말도 안 되게 다른 생물인 거지. 아니 그전에 입 모양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간신히 호흡에 저항을 주어 내는 소리 따위가 생각이란 걸 담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너는, 영화 번역 분야에서 누구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누구나 가장 먼저 너에게 작품을 부탁했고 너는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재능 있는 번역가였고, 누구보다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다만 요즘의 너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대사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더 이상 번역하는 법을 잊은 것일 수도 있다.
너는 책상에서 눈을 떴다. 아직 어젯밤의 숙취가 남아 있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잠시 뒤 입을 헹구고 나온 너는 찻물을 끓인다. 문자 알림 음이 울린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고, 너에게 집에 잘 들어갔는지 묻는다. 너는 그 연락을 무시한다. 그 뒤로 같은 사람에게 사진 몇 장과 하트 이모지로 끝나는 문자가 온다. 그것을 보자 너는 다시 화장실로 가서 한참을 토했다. 그리고 그 문자를 열어 보지도 않고 삭제했다.
너는 손을 머리에 대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숨을 몇 번 내뱉고, 차를 내린 컵을 코에 닿을 듯 높이 들고 깊게 숨을 쉰다. 뜨거운 김과 씁쓸한 향이 거친 숨을 걸러준다. 너는 책상에 앉아 한 페이지가 A4용지 보다 더 넓고 안나 카레니나 보다도 두꺼운 공책의 중간 부분을 폈다. 그 공책에 너는 무언가를 그리려는 듯했다. 한참을 덧대 가며 형태를 잡는다. 그것이 끝나고 책상 아래 서랍에서 팔레트를 꺼내, 말라 굳은 물감을 녹인다.
그림에 색을 칠하려던 순간 너는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조금 색을 칠하더니 붓을 내려놓는다. 다시 집는다. 색을 바꾸어 다시 칠한다. 다시 붓을 내려놓는다. 이 것을 몇 번 반복하다가 너는 그림 위로 엎드린다. 그림에 볼을 몇 번 비빈다. 네가 다시 일어나자 그림은 번져 있고, 너의 볼도 너의 피부보다 어두운 색으로 지저분 해졌다. 망가진 그림을 보며 너는 다시 숨이 차오른다.
던져 버린 붓을 주으러 갈 때서야, 벽과 바닥에 묻은 물감을 발견했다. 붓을 다시 주워 앉았으나, 그리지 못한다. 한참을 그렇게 머리카락을 쥐어짜다. 앞장을 펼친다. 그곳에는 조금 일그러진 내가 있었다. 또 한 장 앞으로 넘긴다. 그곳에는 온전한 내가 있었다. 한 장을 더 넘긴다. 또, 또 넘겨도 계속 내가 있었다. 너는 맨 첫 장을 본다. 그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그리던 그림으로 돌아온다. 한참을 색칠하던 너는 다시 첫 장을 한번 보고, 돌아와 그림을 그리고, 다시 첫 장을 보고, 다시 그리고.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붓을 너무 세게 쥐어서 손이 떨린다. 붓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아가며 계속해서 그린다.
그것을 하는 내내 너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다. 어떤 감정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쥐었던 붓을 천천히 놓는다. 그것이 마침내 완성되었나.
너는 아직 마르지도 않은 공책을 덮고 천장을 쳐다본다. 네가 눈을 감자, 하얀 천장이 파랗게, 파랗게 변해간다. 전구가 있던 자리에 해가 있지만, 눈이 부시지는 않다. 한 점 구름이 너의 이마 위로 지나간다. 바람이 선선히 불고 너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다. 아직 하늘은 파랗고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간다. 느리게 날던 까마귀가 이내 멈춘다. 날갯짓 없이 가만히 멈춰 있다. 구름도 흐르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해는 조금씩 빛을 잃어간다. 하얀 하늘이 작은 점과 점으로부터 어두워지고 이제 까마귀만큼 거메져서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은 천천히 하강하고, 너를 완전히 덮는다. 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그 속에 묻힌 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조금 뒤엔 눈물이 발목을 타고 흐르는 소리도 들었다.
다시, 12월 30일이 되었다. 나의 생일이자. 내가 사라진 지 이 년째 되는 날. 너의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다. 너는 차를 내리고, 시리얼을 먹고 가만히 책을 읽는다. 그리고 한참을 운다. 너는 나와 함께 지낼 때도 매일 울곤 했다. 이유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다만 매번 우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너는 울 때 대개 표정이 없다. 또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떨어질 때쯤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하루에 몇 방울 씩 너는 울었다. 이제 그것은 방울로 뭉치기 전에 흐른다.
핸드폰 알림 음이 울린다. 어제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들이 도착했다는 알람이었다. 그것은 신선한 채소와 고기, 그리고 각종 식재료와 과일 등이었다. 내가 사라지고 너는 요리를 한 번도 한적 없었다. 매번 뜨거운 물에 데워 먹는 간편 식품이나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빵을 먹고살았다. 때로는 그것도 버거웠는지 와인 한잔으로 넘어간 저녁도 많았다. 그런 네가 배달 온 식료품을 냉장고에 정리하는 모습이 나를 조금 안심시켜 주었다.
멈추지 않고 너는 청소를 시작한다. 식탁과 부엌 선반에 쌓인 먼지들을 닦아냈다. 그 먼지들 때문에 너는 매일 기침을 했었다. 침대 시트와 이불도 세탁기를 돌려 널어놨다. 그것들에는 노랗게 바랜 눈물자국이 흥건했다. 밖에 나가 러그와 베개의 먼지를 털고 카펫은 청소기를 돌렸다. 여섯 달째 켜지지 않는 부엌 위의 형광등도 갈았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내려놓은 차를 마셨다. 얼굴엔 조금 생기가 돋은 듯했다.
집안에 맑은 공기가 가득 찰 때쯤 너는 부엌 밑 수납장에서 냄비를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끓는 물에 뇨끼를 넣고, 마늘과 파를 다지고, 감자와 토마토, 베이컨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마늘, 페페론치노, 베이컨을 넣고 볶다가 감자, 파, 뇨끼를 순서대로 넣는다. 너는 잘되어가고 있다는 표정을 한다. 마지막으로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고 볶아주면, 우리가 가장 즐겨해 먹던 토마토 뇨끼가 완성된다. 그것은 2인분이어서 반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남은 것은 접시에 조심스레 담는다.
너는 그것을 먹는다. 뇨끼를 세 덩어리쯤 입에 넣었을 때, 너는 참았던 눈물이 터지듯이 울었다. 오랫동안 울었다. 그리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간다. 화장실, 안방, 뒤마당까지 모두 둘러본 너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조그맣게 신음한다.
“그만해. 얼른 나와줘. 더 이상은 못 하겠어. 나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아. 제발 부탁이야. 나타나 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너는 한참을 더 울었다.
창 밖에선 들쥐와 까마귀 같은 것들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와 바람이 모기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달빛이 옆집 흰 지붕에 반사되어 곱게 퍼진다. 너는 부엌 선반 위에서 주먹 크기의 흰 통에 들어 있는 약 세 알을 입에 넣었다. 물 없이 그것을 삼키고 크게 숨을 골랐다. 벽에 기대 쓰러지듯 앉는다. 허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아니 기도를 하고 있는 듯했다.
수없이 비빈 눈은 뻘겋게 부어 있었고, 살이 까져 있다. 마른 눈물이 그 위에 하얗게 덮여 있다. 더 이상은 눈물이 나오지 않나 싶다 가도, 눈동자에 두껍게 눈물이 차오른다. 딱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찼다가 푹 숙인 고개와 함께 떨어진다. 너는 정말 한계에 온 듯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숨을 골랐다. 거친 숨을 헉헉거리며 재웠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며 마침내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담배를 하나 물었다. 불을 붙이자 네가 들어온다. 너 역시 담배를 하나 꺼내고 입에 물었다. 숨을 크게 한번 쉰다. 라이터를 쥔 손이 올라오다가, 툭, 힘없이 떨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풀썩 주저앉았다. 천장을 향하는 너의 눈을 가만히 보다가, 초점이 천장 보다 조금 더 멀리에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그 위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조금 더 멀리, 하늘과 땅 사이의 그 어디쯤. 너는 두 손을 모은다. 모은 손이 조그맣게 떨리며 눈을 더 질끈 감는다. 너는 신을 찾고 있었구나. 하늘에도 땅에도 없어서, 하늘과 땅 사이 어딘가 즈음에서.
나는 너에게 다가간다. 한걸음 씩. 네 옆에 앉았다. 너의 좁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 보았다. 네가 훌쩍일 때마다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숨죽이고 있는 나는, 너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심장소리, 목에 있는 동맥에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을 듣다 보니 내 심장과 네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는 것을 알았다.
네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중심을 잠깐 잃었다. 너는 그대로 서서 세면대의 거울을 바라본다. 나도 일어나 네 뒤에 살짝 비켜서서, 거울에 비친 너를 본다. 잠깐 너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art 2 - her point of view.
거울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내 눈에서 네가 보였다. 얼굴에서, 팔에서, 어깨에서 네가 보였다. 거울을 보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네가 보이는 듯한다. 가만히 서서 너를 바라본다. 그렇게 한나절을 서있곤 한다.
문득 긴 머리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너와는 어울리지 않다. 그것을 모두 잘라냈다. 너의 머리는 항상 내가 잘라줬으니까, 별로 어렵지 않았다. 두꺼운 주방용 가위로 조금의 망설임 없이, 한 묶음 씩. 정확히 너 만큼의 길이로 잘랐다. 가위질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이 투박함 마저 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 감촉마저 비슷하다. 정말로 닮았다고 생각한다.
너를 악착같이 떠올리려 할수록, 너와 닮아갔고, 이제는 정말 네가 되었다. 나는 기억만으로 너를 온전히 이곳에 만들어냈다.
한참을 서있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 털어놓고 싶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마음은 한 가지로 분명하지만, 그것을 너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을 발음할 단어를 배우지 못했다. 이것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이제 감정이라는 것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답답한 마음은 없다. 내 겉모습이 너와 닮아가기 이전에, 나의 가슴이 너와 더 닮았기 때문이다. 너는 분명 이것을 알고 있다. 오래전부터 그랬다고, 그렇게 확신한다.
계속해서 들여다본다. 내 앞에 선 너를 보며, 미소 지었다가, 옅게. 또 찡그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가, 울었다가, 한참을. 부끄러워하다가, 또 한숨을 짓고. 다시 한참을 울었다. 거울 안의 너도 막 눈물을 닦고 있었다. 너도 나만큼 한참을 울고 있었을까.
네 앞에 서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너는 나를 사랑해서, 마침내 그래서, 사라진 걸까. 세상엔 적어도 한 명의 네가 있었어야 했을까. 그래서 나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고 간 걸까.
거울에 비친 천장이 보이다가, 다시 진짜 천장이 보인다. 머리가 바닥과 세게 부딪힌다. 바닥의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살을 따갑게 한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몸에서 나가려는 숨들이 가슴을 막 들썩인다. 시야의 들어오는 모든 것이 날 아프게 한다. 너무 오래 숨을 쉬지 않았다. 천장의 램프가 꺼진 것처럼 눈앞이 천천히 어두워진다.
이제야 그것이 날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한참을 허우적댔다. 아니 사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눈을 떴지만 온통 깜깜하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공간이었다. 누워있는 바닥부터, 천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하늘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온통 꺼메서 어디까지가 이 공간의 끝인지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끝이 있긴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몸에서 나는 아주 미세한 빛이 그곳을 희미하게나마 비췄다. 이곳의 유일한 빛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 쉬며, 이다음에는 무엇이 올지 기다렸다. 생각했다. 이곳은 내 의식이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겠다 하고. 나는 이 시간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보내기로 했다.
무수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친다. 눈이 왔던, 정말 많은 눈이 왔던 날. 막 10살이 되었던 겨울, 새벽 1시. 아빠와 타이타닉을 봤다. 중간에 배가 고파진 우리는 내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집 앞 맥도널드까지 모험을 떠났다. 밤늦게 내린 눈이라 길에는 우리 둘의 발자국뿐이었다. 옷에 쌓인 눈을 털며 들어간 맥도널드에서 났던 그 고소한 냄새가 떠올랐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잠수함을 처음 탔던 12살 소녀는 그곳이 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일 것이라고, 죽으면 그곳에 가서 영원히 날아다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수함 조명에 빛나던 산호들과 육지에는 없는 화려한 색깔로 된 작고 큰 물고기. 그것들이 떠올랐다.
이러한 회상은, 당연하게도. 내 마음을 서럽게 하며, 네가 떠오른다. 사실 너를 떠올릴 생각은 없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에 너를 떠올리는 것은 나를 걷잡을 수 없게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너는 내가 애를 쓸수록, 내 머릿속을 선명하게 비워가며, 오직 너만 남게 한다. 이젠 그 긴 시간들을 나는 환상 속의 세계를 훔쳐보듯, 조심이 훑어봤다.
너의 그 어설픈 웃음을 처음 본 날, 너는 태어나서 처음 웃어본 아이처럼 웃는다. 너의 웃음은 항상 그랬고. 언제나 내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네가 미소 지을 때면 나는 언제나 따라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라며, 얼굴을 붉힌 네가 종이 뭉치를 주었던 날. 그 스무 장의 단편은 내가 아는 최고의 소설이었고.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였고. 죽음을 결심했던 수많은 순간에 내 앞에 있었다. 그 안의 내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나는 나를 도무지 죽일 수가 없었다.
수 없이 많이 마주했던, 늦은 아침. 그 아침에 아직 자고 있는 너를 보며, 혹여나 깰까 봐 숨죽이고 있었다. 커튼과 창문 틈을 통과한 햇빛 한 줄기가, 몇 센티 이동하는 시간 동안, 너를 지켜봤다. 넌 한 번도 울타리 밖으로 나가보지 않은 소년처럼 자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은, 나를 12살 처음 사랑에 눈뜬 소녀로 만들고는 했다.
카디건 한 장이 가장 적당한 날씨의 가을, 이슬비가 내린 밤. 너와 손을 잡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까지 산책을 나갔다. 담배를 든 너와 와인을 든 나는 그것을 바꿔가며 한참을 걸었다. 그날 있었던 일과 읽었던 책의 내용 같은 것들을 떠들었고, 노래도 불렀고, 키스도 했다. 키스를 하면서 나는 살짝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너와 함께 있던 모든 시간을 떠올렸다. 이미 나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무너져 저항 없이 오열하고 있었다.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닿자 그것은 넓게 퍼진다. 그리고 그만큼의 땅은 천천히 부드러워졌고, 이내 질퍽거렸다. 그 공간이 나를 천천히 가라앉힌다.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제자리걸음을 해보지만 발이 다시 땅에 닿았을 땐 더 깊은 곳까지 빠졌다. 그러는 순간에도 나는 너를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젠 그 칠흑의 늪에서 간신히 고개만 내밀고 숨을 쉰다.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늪에 떨어지면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더 가라앉힌다.
팔을 허둥거리고 온 힘을 다해 몸을 튕겨봐도 그것은 나를 더 세게 당긴다. 이젠 머리도 잠겨 숨을 쉴 수 없었다. 고통은 의식이 흐려짐과 같이 사라져 갔다. 이제 나는 조금이라도 너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의식이 다 사라지기 전에, 내 기억이 없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너를 더 떠올리고 싶다. 네 얼굴을 기억 속에서 나마 보고 싶다.
내 숨이 다하는 이 순간에도 너는 이토록 아름답구나. 이 와중에 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만큼 설렘을 느낄 수 있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늪의 축축함 만을 유일하게 느끼고 있었을 때, 하나의 손이 내 팔을 잡아 날 번쩍 꺼내 든다. 눈이 부셔서 쳐다보지 못했다. 찌푸린 눈 사이로 선명해지는 빛. 너였다.
날 일으켜 세운 너는 한걸음 뒤로 가서 섰다. 이젠 너의 발끝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시선은 다시 아래로부터,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내 것보다 엄지 손가락 하나만큼 긴 발이 보였다. 바지 위로 조금 튀어나오는 무릎이 보였다. 마디가 굵고 하얀 손이 보였다. 티셔츠 위로 비치는 갈비뼈와 쇄골이 보였다. 살짝 위를 향하는 목젖과, 조금 뻣뻣해 보이는 목선과 앙증맞은 귀가 보이고.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한참을 바라봤다. 그렇게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었다. 미동에도 너는 연기처럼 흩어질 것 같았다. 초조히 숨죽이고 너를 쳐다봤다. 눈 한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다시 사라질 것만 같은 너를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너를 잊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도 너의 눈은 신처럼 인자했다. 꿈과 같은 이곳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다. 몇 초였을지도 모른다. 가끔 눈물이 고이거나 눈가가 떨렸지만 우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던 눈동자와 눈동자는 점점 가까워져 천천히 겹쳐진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바라본다. 시야가 나누어지다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너의 시선이다. 우리의 시선은 뒤바뀌어서 서로가 서로를, 내가 나를, 네가 너를 바라본다. 우리는 마주했고, 이제 몸과 몸이 천천히 가까워진다. 천천히, 천천히, 그것은 너무 느려서 나를 애태웠고, 어느새 네가 내 코 앞에 서 있을 만큼 빨랐다.
점점 더 가까워진 우리의 몸이 맞닿자, 천천히 뭉개 진다. 뭉개진 살덩이는 다시 서로를 끌어당기고, 하나가 된다. 그것은 신의 작품만큼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내 세포와 네 세포가 이어지고, 핏줄과 핏줄이 엉키고, 장기들이 연결이 되고, 두 개의 심장이 하나처럼 울리다가 하나가 된다. 이빨과 이빨이 서로를 물고 혀와 혀가 서로를 감싼다. 마침내 그것은 완전히 하나가 됐다. 우리의 피부색이 서로 섞이고 계속해서 어떤 모양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게 우리의 사랑이구나. 우리의 사랑은 이런 모양이었구나. 정말 죽을 만큼 아팠는데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연약하구나. 버틸 수 없이 아름다웠구나. 이런 게 사라졌으니, 그렇게 공허했구나."
그 안에서, 너의 눈을 통해 네가 보았던 것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네가 견뎌내지 못한 일들을 다 보았다. 다음으로 너의 뇌를 감상했다. 네가 얼마나 많은 선택 앞에, 수없이 많이 망설였는지 보았다. 하나씩 다 보았다. 그 선택들은 내 것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너의 심장을 느낀다. 네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느낀다. 그것은 딱 네 품만큼, 그만큼이나 따뜻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생명체가 되었다.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가 될 운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둘이서 하나의 목숨을 가졌다. 해서 우리는 이렇게 손을 맞잡고 나서야, 죽음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다.
너의 몸속에서, 나는 알 수 있다. 너는 눈물을 흘린다. 아이처럼 운다. 너의 얼굴은 몇 년 동안이나 운 사람처럼 일그러져,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어루만진다. 입을 맞춘다. 울음을 멈춘 너와 키스한다. 그렇게 뭉쳐진 살덩어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몸을 맞댔다. 그러다 어렸을 때처럼 진지한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약속을 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서로를 끌어안으며, 정말로 오래 그렇게 있었다.
네가 말했다. 너의 입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다. 조금의 망설임과 떨림 역시 전해졌다. “고마워.” 내가 대답했다. 역시나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잠시 가엾은 눈으로 마주 보던 우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우리는 더 크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웃음을 짓는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너와 있었을 때는 항상 미소를 지었으니까.
그 웃음이 멈출 때쯤, 나는 천천히 떨어져 나간다. 그것은 나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너도 그렇다. 다시 심장이 쪼개지고, 장기가 찢어진다. 혈관은 모두 끊어지고, 세포들이 갈기갈기 흩어진다. 그것들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그래. 너와 떨어지는 건 이런 기분이었지. 그것마저도 나에게는 축복이었을까.
다시 나눠진 우리는 서로를 보며 서있다. 이젠 너도, 그리고 나도, 미소를 짓는다. 역시, 너의 미소는 날 가슴 아리게 한다. 너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네 곁에 남으려 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이미 약속했다. 우리의 몸이 하나가 되어있었을 때.
이곳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네가 지금 나의 선택을 동경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너의 선택마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선택. 번역가이기 때문일까. 나는 너의 짐을 온전히 떠안기로 했다. 그 짐은 날 짓누르지만, 결국 발 딛고 머물게 했다. 태생적 우울과 외로움, 너의 그 모든 고통과 염증, 분노. 난 그것을 소중히 보살피기로 했다.
몸이 먼저 돌고, 고개는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 조금은 더 눈이 마주쳤다. 돌아선 나는 한걸음을 내디뎠다. 두 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를 감싸던 어둠이 천천히 사라진다. 내가 걸을 때마다 내 몸에서 나던 빛이 더 강해졌다. 마침내 이곳은 새 하얗다.
천장의 조명에 눈이 부시다. 나는 천천히 일어난다. 잘린 머리카락과 옷가지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내가 살던, 우리가 살던 그 집에 돌아왔다. 거울에 비친 내가 보였다. 잠시, 네 얼굴이 보였지만,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 커피 포트에 물을 끓였다. 티 백을 컵에 넣고 물을 붓는다. 씁쓸한 카라반 향이 긴장된 몸을 풀어준다. 냉장고에 넣어둔 뇨끼를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플라스틱 뚜껑을 열자, 고소한 향이 난다. 그것을 그 자리에서 다 먹었다.
차를 담은 머그컵을 들고 마당에 나왔다. 1월 1일, 마당은 새하얗게 덮여 있다. 포근한 스웨터가 바람에 흔들리며 몸을 간지럽힌다. 입김이 하늘로 길게 올라간다. 새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곳에 너를 그린다. 여전히, 네가 보고 싶다. 아직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단지 꿈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너는 정말로 그곳에, 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렇다고 믿는다. 또 이제는, 네가 정말로 내 곁을 떠나갔다는 것 역시 확실했다. 나는 이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대여 어떤 우울은 태생적인 것이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은 것에 미안할 필요 없다. 또 어떤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껏 사랑해도 괜찮다. 그대가 나를 이곳에 숨 쉬게 둔 것처럼, 그대는 그대를 평안하게 해 줄 곳에서 영원히 숨 쉴 것을 믿는다.
그대,
목숨을 다해 나를 사랑했던 사람.
마지막 숨으로 나를 구해준 사람.
나의 ,
구원.
-구원- 마침.
-23년 봄부터 겨울-
vo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