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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늘보 Oct 24. 2023

가장 포기하기 쉬운 나

워킹맘의 둘째 출산기

직장에서 실시하는 미술 심리치료를 받는 두 번째 날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도화지에 가득 그려보라고 하셨고, 그게 나의 특징이던 나 자신을 그대로 그리던 상관없이 자유롭게 표현해 보라고 하셨다. 미혼인 다른 직원들은 거침없이 도화지를 채워갔고, 흰색이던 도화지는 형형색색의 파스텔과 색연필로 가득히 채워졌다. 어떤 이는 꽃을 본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본인의 성격과 싫어하는 성격을 각각의 특징에 맞춰 그리기도 했다. 그들이 도화지를 빼곡히 채워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업무에서나 육아에서나 거침없던 나의 추진력은 길을 잃고 말았다.


사진첩에는 아이의 어린이집 알림장에는 온통 내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정작 '나' 자신에 대한 특징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당연히 나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나는 얼마 전 릴스에서 잠깐 본 빛이 나는 무대 위의 제니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목은 '오늘도 난 빛이 나는 SOLO'였다. 제니의 뒤에는 별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제니는 너무 예쁜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니의 얼굴은 그릴 수 없었다.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을 보고 선생님은 ’ 미래의 나를 그리신 거군요. 미래에 그렇게 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게 더 슬펐다.


미래의 나도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생애서는 글렀지만, 다음 생에서는 제니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 중반에 너무 빨리 결혼해서일까 가정이 아닌 내가 중심인 제니의 삶은 어떨지 참 궁금하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토끼 같은 자식들도 있고 바다 같은 남편도 있고 일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참 행복해.’라는 감정을 나도 모르게 스스로 주입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행복한데 눈물이 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데, 나는 멈출 수 없는 달리는 기차에 탄 기분이다.


멈추지 않는 빠른 기차 안에서 꼭 해야 하는 일들을 매일매일 퀘스트를 깨듯이 하며 지나왔다. 내 몸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해야 하는 일들은 많이 있다 보니 결국 중요도 순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포기하기 쉬운 것은 ‘나’에 관한 부분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를 위한 일들은 결국 내가 가장 포기하기 쉬운 것들이었고 이는 내 삶을 결국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 무의식에 자리 잡도록 했다. 주말마다 학회나 스터디를 꼭 찾아서 다니던 나의 주말은 어느새 아이 축구대회와 수영대회, 학원 스케줄로 꽉 차 있었고, 일주일 2-3회는 지인과 함께 식사를 하던 나의 시간은 아이 친구들의 엄마들과 함께 육아, 교육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짜증 내는 아이의 학원 숙제를 감시하기 위한 시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슬픈 건, 이 모든 걸 내가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프거나 후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별것도 아닌 것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에게 우울감이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심리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매일 감정일기를 써보는 숙제를 주셨다.


타인의 감정이 아닌 본인의 감정에 집중해 보라고 하셨다. 감정 매트릭스를 앞에 두고 지금 내 감정은 어떤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나는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하셨다. 어쩌면 지난 시간 동안 ‘누군가의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누군가의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더 이상 ‘나’를 우선순위에서 낮추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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