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운전해 어딘가에 차를 세워놓고 담배 한 대 딱 피우고 헤어지는 모임 하고 싶다.
정하는 운전석에 앉아 비킹구르 올라프손 "The arts and the hours"을 들으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천천히, 하염없이 내리다 인목 시인이 남긴 글에 멈췄다. 밤마다 운전해 어딘가에 차를 세워두고 담배 딱 한 대만 피우고 헤어지는 모임이라. 삼 년 전, 정하는 뒤늦게 서른이 되어서야 면허를 따고 그간 열심히 모아둔 적금으로 야심차게 차를 구입했지만 보름 만에 가로등을 들이 박는 일이 생겼다. 그러고 또 보름이 지나 은행나무를 힘껏 박은 이후 운전대를 완전히 놓았다. 가로등 300만원, 은행나무 834만원, 교통신호제어기 750만원, 전신주 1,000만원... 동진과 운전 연습을 하며 장난스레 말했던 것들을 순서대로 박아 버리고 이젠 교통 신호제어기를 박게 될까봐 덜컥 겁이나 지하주차장에 차를 수개월을 방치하다 그대로 팔게 됐다. 운전 같은 거 내 인생에 또 있나 봐라. 다시는 운전을 하지 않겠다는 정하의 다짐과는 달리 어느 날 갑작스레 다시 차가 생긴 것이다. 동진이 남긴 도요타 AE86. 잠을 뒤척이는 새벽이면 정하는 잠옷차림에 로브를 걸치고 슬리퍼를 끌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석에 앉아 가만히 앉아 담배를 태우며 음악을 듣는 것이 정하의 작은 일탈이 됐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이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동진이 사라진지 어느새 일 년이나 지났구나. 너 정말 사라진거구나. 정하는 몇 번이고 동진이 사라지기 전 하루를 복기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동진과 함께 단골 베이커리에 들러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들고 천변 산책로를 걷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날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 샌드위치 하나를 나눠 먹고 커피를 마시고 냇물에 앉았다 포르르 날아가는 흰 새를 보며 내가 동진에게 저 새가 뭔지 아냐 물었고 동진은 그 새가 어떤 새인지 단번에 맞췄다. 동진은 늘 그런 사람. 내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모든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주기에 넌 왜 이렇게 아는 게 많으냐 신기해했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과 무성하게 자란 풀, 뒷목으로 조금씩 흐르는 땀이 여름 초입을 알리고 있었다. 날씨 덥다 그치? 옷소매를 걷자 동진은 제 모자를 정하 머리에 씌워줬다. 얼굴 타. 너 얼굴 타는 거 싫어하잖아.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동진은 반쯤 젖은 머리로 쇼파에 앉아 어제 읽다만 시집을 집어 들었다. 정하는 동진의 무릎에 누워 그를 올려다 봤다. 눈이 마주치자 동진은 가느다랗게 웃으며 정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기며 손에 들린 시집에 실린 시를 읊었다. 네 목소리는 참 선선한 바람 같구나. 정하는 눈을 감고 동진의 목소리를 듣다 낮잠이 들었다.
저녁에는 동진이 만들어준 비빔국수와 만두를 먹으며 아, 맛있어 하고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신 일요일 저녁. 늘 같은 저녁. 언제나 우리의 저녁. 다를 게 없는 저녁이었다. 월요일 아침, 토스트 한쪽을 물고 동진에게 회사 잘 다녀 오겠다 인사를 한 게 동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녀 와. 오늘도 힘내고.
퇴근 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동진은 사라졌다. 집 안 군데군데 물건이 비어 있었다. 정하가 중학교때부터 용돈을 아껴 모아온 씨디, 성인이 되고부터 수집욕이 생긴 엘피, 언젠가 모두 읽겠다 다짐하며 벽 한 쪽을 빼곡하게 채운 책, 일본 여행하며 틈틈히 구입한 피규어까지. 정하는 자신의 영혼의 반을 도난당한 기분이라 한참을 멍하니 쇼파에 앉았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겨우 선잠이 들었다가 악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 미친 사람처럼 서랍을 뒤집어 쏟았다. 여지껏 모아둔 공연 티켓 마저도 사라졌다. 미친새끼... 정말 남김없이 가지고 가버리네. 정하는 얼빠진 얼굴로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내려는데 식탁 위에 도요타 키가 놓여 있는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자동차 키는 여기 식탁이 아닌 미술관에 놓여 있어야 하는 현대미술 같았다. 정하는 키를 들고 잠옷 차림으로 지하주차장으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동진의 흰 도요타가 정물처럼 놓여 있었다. 동진이 주차하던 늘 그 자리에. 키를 돌리고 운전석에 앉아 썬바이저를 내려보니 동진과 드라이브 하며 자주들은 벨벳언더그라운드 <The Velvet Underground>, 백현진 <반성의 시간>, 비킹구르 올라프손 <드뷔시&라모 작품집> 씨디 세 개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놓여 있는, 어제 동진이 읽어준 인목 시인의 시집 하나.
정하는 동진을 삼 년 반을 만났지만 동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동진과 정하는 여기 서울 사람이 아니었고 동진의 부모님을 만난 일이 없고 부모님의 연락처를 알 리는 더더욱 없었고 동진의 친구라 해봤자 둘이서 카페나 음식점, 이자카야를 다니면서 알게된 겹치는 지인들 뿐이었다. 정하가 본래 살고 있는 이 집에 동진이 들어오게 되면서 동거를 시작하게 됐는데 그때 동진이 가지고 온 것도 겨우 32인치 캐리어 하나가 다였다. 동진은 일 년 후 출간 될 희곡집을 집필 중이어서 정하와 함께 하는 게 아니라면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정하는 동진의 행방을 미친 듯이 수소문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차에 그 시집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목 시인의 트위터와 인스타를 찾아내 팔로우를 하다가 정말 못 견디겠다 싶은 어느 날 경찰에 실종신고까지 마쳤을 때 동진의 어머니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진이 잘 있어요. 그러니 더는 찾지 않아도 됩니다. 문자 하나가 다였다. 살아는 있네,라는 안도감, 살아는 있네,라는 괘씸함. 심장에 사이다를 들이 붓는 기분으로 지냈다. 아프고 시원했다.
둘이 가면서 단골이 된 카페 음식점 이자카야를 이젠 정하는 혼자 다니게 됐고 사람들은 어쩐지 동진이 정하를 떠났다는 위로 보다 자신들이 동진을 볼 수 없음에 더 아쉬워했다. 정하가 다니던 가게에 동진을 데려가 둘이서 단골이 됐지만 사람들은 늘 동진과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동진은 늘 술을 취하지 않을 만큼만 마셨고 사실 취했는지 취하지 않았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맥주 다섯 잔을 마셔도 동진의 목소리는 늘 선선한 바람 같았다. 동진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사람들은 손으로 턱을 괴고 동진의 표정 말 몸짓 하나 놓치지 않으려 했고 그의 지적 풍요로움에 입을 반쯤 벌리고 경청하곤 했다. 동진이 그만 집에 가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처음보는 옆 테이블 사람들마저 아쉬워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동진은 마치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졌다. 비킹구르 올라프손 씨디가 다 돌자 정하는 끅끅 울며 운전대를 쳐댔다. 마음 속에서 클락션이 마구마구 울렸다. 숨이 헐떡이며 넘어갈 때 즈음에 트위터 알람이 울렸다. 인목 시인의 트위터에 사진 하나가 떴다. 한 명 도착. 사진 속 담배를 태우는 검지 손가락에 있는 작은 흉터. 동진이었다. 정하는 잠들기 전 동진의 손가락에 난 흉터를 매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사진만 봐도 흉터의 촉감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정하는 주저하지 않고 시동을 걸어 지하주차장을 나왔다. 초록잎을 잔뜩 매단 은행나무들과 언젠가 박살내겠다는 교통제어신호기와 일요일 아침이면 함께 다닌 천변을 지나, 설마 이니셜D 때문에 구입했냐 놀려댄 동진의 오래된 도요타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오면서 정하는 운전석 창문을 천천히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바람이 귓속을 웅웅 거리며 동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읊은 시였다.
혼자서 잘 있어야 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남은 소주를 마시고 일찍 잤다 어쩌다 잘못 깨어나면 밖으로 나가 한참만에 돌아왔다 내일은 다른 집에 있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