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세계관1> 간이역(簡易易)
중국 은허 유역에서 발견된 갑골 ⓒ Baidu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쉬운' <주역周易> 해설서다.
누구에게는 점서, 누구에게는 지혜의 서, 누구에게는 철학서, 누구에게는 심리학 개론, 누구에게는 과학의 원형인 <주역>의 다재다능한 가치1)를 세상의 모든 갑남을녀들이 각자 필요에 맞게 각자 능력되는 수준에서 접근하고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게 하는 것.
이유는 간단하다. <주역>이 그만큼 유용하고, 지혜롭고, 풍요로운 지적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런 훌륭한 공유 자산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금단의 땅 안에, 몇 겹의 황금상자 속에 결박시켜 놓았다.
이제, 봉인해제 시켜줄 시간이다. 필요하고 원하는 모두의 易으로.
봉인해제 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이상의 기량으로 우리의 삶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易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아마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그게 가능하겠냐고?
1
“<주역>이 만들어지던 시대에도 易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웠을까요? 그때 사람들은 어떤 때 易을 찾았을까요? 어떤 방법으로 易을 했을까요?”
“하나씩 물어라. 이놈아”
나는 못 들은 척 질문을 바꿔 다시 다그쳤다.
“옛날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신을 찾았을까요? 어떤 문제로 신에게 의탁하려 했을까요? 신과 소통하는 방법은 어땠을까요? 지금 우리가 보는 역처럼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웠을까요?”
“그만 좀 보채고... 어디 너부터 한 번 대답해봐. 너는 니 그 깡통 같은 깜냥이나 곰손 같은 재주로 혼자서 해결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
“헤헤. 저야 이렇게 영감님한테 달려 오져. 괜히 신지박사2)라는 거룩한 별명까지 붙여드렸게요?”
“에끼! 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나는 이미 그 경지였어, 이눔아~. 근데, 내가 너무 바쁘쟎녀. 하늘이 주신 소명이 너~무 많아. 너 하나 상대하기도 구챦아 죽겠어.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해결해야 돼?”
영감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차 알아가겠지만, 미리 한 가지 경고해두자면, 이 분은 그 하해 같은 지식이나 지혜의 폭과 깊이만큼이나 깔때기 꽂고 자뻑하는 경지도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가끔 너무 대놓고 잘난 척하는 통에 오만 정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일단 ‘믿보박-믿고 보는 박사’임은 보증한다. 오죽하면 ‘신지박사’라는 애칭을 붙여줬을까? 물론 다행히도 맛깔스런 너스레와 구라력에 재미는 기본이다. 살짝 귀띔하자면, 실제로도 그는 오피셜한 박사학위도 여러 개 보유한 퇴역 교수 출신의 자칭 ‘한량’이다.
“잘 아는 사람이나 전문가를 찾아가야져. 정보가 필요하니까.”
“그래. 그 ‘정보’가 뽀인트쟈녀. 근데 정보 얻으러 요즘 누가 전문가한테 직접 달려가냐. 더 빠른 게 있는데.” “아~ 스마트폰요? 흐흣”
핵심은 ‘정보’였다.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 어떤 생물체로 살아가든지 물과 공기만큼이나 기본적인 자원은 ‘정보’다. 그리고 어쩌면 인류가 모든 생물을 압도하는 지구의 주인공 행세를 하게 된 배후에는 그 ‘정보’를 더 복잡하고, 더 정교하고, 더 고급지게 가공하며 서로 공유해 온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틀어 우리는 ‘인간의 흔적-문명’이라 불러왔던 것 아닌가?
“그렇지. 인간들은 지가 가진 자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더 '고급진 정보'를 찾게 돼. 물론 정보의 종류는 다양하지. 생명을 다투는 위급한 일, 복잡한 가정사, 백 년 앞을 내다봐야 할 국가의 일까지. 근데 너는 스마트폰을 그런 중대하고 가치 있는 이유로만 찾냐? 사실은 시간 때우기나 단순한 재밋거리를 찾아 들여다볼 때가 더 많챠너.”
맞다. 요즘 사람들의 일차적인 정보 취득원은 스마트폰을 켜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신느님이라 한들 구글의 뇌보다 더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을까? 뒤집어 생각해보자. 인터넷이 없었다면, 그전에 백과사전이 없었다면, 제갈공명 같은 책사가 없었다면, 신지박사 같은 ‘지혜로운 노인’이 없었다면, 아니 있다 해도 너무 멀고도 높은 곳에 있었다면...
인간에게 닥친 정보가 필요한 순간들, ‘위급한’ ‘궁금해 미칠 것 같은’ ‘모가 되든 도가 되든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그 모든 순간들에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 누구에게 달려가게 될까?
“갑골문 알지? 몰라?그게 뭐냐면, 단군이니 치우니 요순이니 하는 어르신들이 등장하던 시절에 하늘에 제사 내면서 점을 친 흔적들이야. 옛말3)에, 점복이라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인지 저것인지 의심스러운 것을 결정하고,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여지는 것을 결정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어. 그게 뭔 말이겄어? 나라에서 뭔 큰일을 치를 때나, 너처럼 호기심 천국인 종자들이 궁금한 게 있어 잠도 못 이룰 때나 항시 점을 끼고 살았다는 거쟈너.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었단 거지.”
“궁금한 게 있을 때,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할 때 마다요? 하긴 그때의 문명 수준으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을 테니..."
“그래. 생각해 봐. 식물도감도 동물도감도 없던 시절인데, 부족 사람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생전 처음 보는 큰 짐승이라도 떡하니 마주쳐 봐? 마을 노인들도, 부족장도 다 생전 첨 본댜. 너 같으면 어쩔래?”
“일단, 튀어야죠ㅋㅋㅋ.”
“ㅋㅋ그건 니 얘기고~, 대충 분위기 파악해보니까 무리의 힘을 다 모으면 포획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면?”
“아니, 그럼 뭐 잡아서 공평하게 분배하고 시식해야죠. 마을잔치 한 판, 딱하고! 다큐 같은 거 보면 그렇게들 하잖아요."
“거봐, 짜샤 넌 아직 멀었어. 고대 사회를 후벼파겠다는 넘이 당최 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준비가 안 돼 있어. 그 시절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았을 거라며? 그게 무슨 의미겠어?"
"음...조~금 신기하고, 마이~ 두렵고, 더~더~ 조심스러웠겠네요.”
“내 말이~. 그럼 첨 보는 짐승을 마주치면, 잡아도 되는지 그냥 풀어줘야 하는지, 제사의 희생물로 써도 좋을지 안될지, 인간이 먹어도 될지 말지, 혹 독은 없을지... 이런 궁금증들부터 막 들이닥칠 거 아냐.”
“아... 그렇겠네요. 역시 로마에서는 ‘로마법’부터, 고대사 탐구는 ‘고대인 되어보기4)’부터! 푸하."
"자, 그럼 지금부터 고대인으로 빙의됐다 쳐봐. 그 미지의 것들에 대해 알아보려면 대관절 넌 뭘 해야쓰겄어?”
“빙의ㅋㅋㅋ. 빙의된 김에 신에게 물어 봐야겠죠. 동물 신이 든 하늘님이든. 아님, 더 강력하게 빙의된 무당님이든가. 그러고 보니, 실제로 어떤 질문들로 점을 봤을지, 어떤 식으로 신에게 말을 걸었을지 정말 궁금한데요?”
“딱! 기둘려 봐.”
2
드디어, ‘신지고’(신지박사의 '나름' 수장고)가 열렸다. 오늘은 또 뭘 건져 올리시려나. 신지고 안은 책꽂이는 말할 것도 없고, 책상 위, 의자 위, 소파 위, 오디오 스피커 위... 일정한 면적을 가진 방 안의 모든 평면에는 책, 책, 책과 복사물들이 펼쳐지고, 포개지고, 구겨진 채 필기구, 연필깎이, 자, 포스트잇, 뭔지 잔뜩 들어 있는 문구류 상자들, 심지어 화분까지.... 온갖 것들과 함께 뒤죽박죽 널브러져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 ‘혼돈’ 속을 뚫고 신지박사가 목표물을 포획해 오는 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질문에 필요한 자료든 간에. 지금도 한 3~4분 지났나? 까치발로 책들과 의자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사뿐사뿐 디디며 들어가더니, 책꽂이 저 밑동을 뒤적거려 A4용지로 된 복사물 한 꾸러미를 들고 나왔다. 오래 방치됐던 터라 꺼끌꺼끌 왠지 불결한 먼지 느낌의 질감에다가 포스트잇은 제 맘대로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첫 페이지는 누렇게 빛바래 있었다. 몇 페이지 뒤적이자 빨갛게 밑줄 그어진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갑골문이란 거에 이런 질문들이 새겨져 있는겨. 물론, 갑골이야 국가적인 점행사에나 사용되는 것이었으니 이렇게 나랏일을 주로 물었을 테고, 유물로 남겨지지도 못한 일상의 점은 훨씬 원초적이고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것들이었겄지.”
“제가 윗마을 꽃님이한테 장가를 가도 될까요? 안될까요? 뭐 이런?”
“그런 것만 있었간디? 오늘 사냥 나가려는데 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 낚시하러 갈 건데 풍랑이 일까요?”
“산달이 다 됐는데 아들일까요? 아닐까요?”
"... ..."
재미 들여진 신지박사와 나는 랩 배틀처럼 예상 질문들을 쏟아내며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농경사회가 되기 전부터 있었다면, '마을을 옮겨야 할까요?'라든지 '언제 이동할까요?' 같은 것도 있었겠지. 또, 사냥 나갔다 사슴을 막 쫓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 큰 개천이 떡하니 나타나... 그럼 '저 내를 건너버릴까요 말까요?' 이런 것도 물었겠지. 장난반 진반으로 물어보기도 했을거고.”
"모 아니면 도!란 심정으로요?"
"그랴,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을 텐디. 뭐~ 목숨 걸고 해야 할 일,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만 물어봤겄어?"
“그럼,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펼쳐놓을 수 있을 만큼 간편하게 만들었게요? 스마트폰처럼 늘 지니고 다니게.”
“실제로 역이란 것, 점이란 것은 그렇게 어렵고도 먼 고담준론이 아니라 아주아주 일상적인 것이었을 거야. 스마트폰 검색하는 것만치나. 말 나온 김에 스마트폰으로 한자 '易'을 한번 검색해봐."
"에이~ 검색 안 해도 그 정도는 알아요. ‘바꿀 역’, ‘쉬울 이’ 두 가지 음과 뜻이 있잖아요."
"그래. 옛날부터 점치는 '易'은 세 가지 뜻6)을 지닌다고 해샀어. 간이(簡易)하다는 뜻의 ‘易(이)’, 변화한다는 뜻의 ‘變易(변역)’, 변하지 않는다는 ‘不易(불역)’, 이렇게. 그 얘기인즉슨 점치는 도구가 항시 지니고 다닐 만큼 간편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점 풀이라는 것도 누구라도 어깨너머로 봐 온 세월의 깊이만큼 구라를 풀 수 있을 만한 그런 것이었다는 얘길껴.”
불현듯 신지박사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기사7) 하나를 검색해 보여주었다. 윷놀이가 단지 게임이 아니었다나.
“상상해 봐.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찾는 심정, 딱! 그 심정으로 옛날엔 윷판을 쫘악~ 펼쳤던 거지.”
“화투점 치는 심정은요? ㅋㅋㅋ" ”짜식이 수준하고는... 그런 신박한 예를? 흐흐흣“
“變易(변역)은 그 자체로 역의 운용 원리이자 핵심 정신인 '변화'에 대한 것이고, 간이(簡易)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간이하게 신과 소통할 수 있고, 쉽게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을 껴. 易, 그니까 고대의 占(점)이라는 것은 '외부'8)의 '고급 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하고도 기본적인 수단이었을 테니까."
3
“그런데, 제가 요새 공부하고 있는 <주역>은 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주역>에 '貞정'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이지?"
역사서나 고전을 뒤적이다 보면 '貞人정인'이라는 단어도 자주 보인다. 점을 치고 갑골에 그 결과를 새기는 사람들을 정인 집단이라 했다.
"그런데, 정인은 단순한 직업이 아녀. 옛날 '단군'의 원형인 '당골'이 그 시작인 셈이지. 단군왕검이 뭐야? 제정일치 사회라는 거쟈나. 왕과 제사장이 한 몸인 거지. 천자. 하늘의 아들. 그 정도로 막강한 권력자. 그러다가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흔적을 보면 정인과 왕은 분리돼 있어. 정인 집단이 전문가 집단으로 분화한 거지. 그렇지만,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자이기는 매한가지야. 이 점을 다루는 자들이 최고 권력집단이란 거지."
"똑같이 신과 소통을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도 요즘의 무당이나 사제와는 지위가 많이 다르네요. 왜죠?"
"왜겄어? 가장 중요한 걸 움켜쥔 자들이기 때문이지."
"중요한 거... 뭐요? 주렴구나 청동거울 같은 거요?"
"상상력 수준하고는... 주렴구나 청동거울로 뭘 했겠어? 신, 하늘의 말씀을 내려받았을 거쟈나. 그게 뭐야? 바로 '정보'자나. 당시에 가장 권위 있고 고급 진 정보. 백성들을 호구로 만들 수 있는 거. 맘먹고장난치면 개구라로 포장해서 나라와 민심을 주물럭거릴 수도 있는 거."
"아! 전문가의 출현? 점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거라 했잖아요."
"아! 그랬었지. 그런데, 상나라 시절에 이미 그 '일상적인 것'이 아주 '특별한 것'으로 바뀌었다는 거지. 점치는 직무가 별도로 있었다는 것은 상나라의 점복이 더 이상 우리가 얘기하던 원시 점복 수준이 아니었다9)는 거여. 이미 부족 사회가 아니라 본격적인 고대 국가란 거고."
"하긴, 국가의 본질이 신분과 위계가 나눠져 귀천이 생겨나고, 좋은 것과 중요한 것은 소수 상류층에 집중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거죠. 그런 일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게 '정보'의 독점이다?"
"뭐는 안그랴? 어디 저 논바닥은, 너 사는 집 마당은, 강남 아파트 땅바닥은 원래부터 주인이 있었간디? 개나 소나, 사람이나 사슴이나, 공룡이나 바퀴벌레나 지맘대루 뒹굴 수 있던 '그냥 땅'이었쟈네."
그러고 보면, 백서 주역의 대가 등구백 선생도 점괘를 초급단계(혼란시기)와 고급단계(계통시기) 두 단계로 구분10)한다. 그는 초급단계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점을 쳤고, 집집마다 시초점을 물었는데, 그 단계에서는 점의 법도나 괘의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고급단계에 들어와서 순서도 생겨나고 전문관리인 서관(또는 역관)이 생겨나며 점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폐단도 생겨났을 거라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요?"
"그렇지. 그 불처럼, 이제 갑골 점복은 왕권과 기득권 세력의 강화와 재창출을 위해 제도로 편입됐을 테고. 아마 그때부터 거북뼈니, 소뼈니 하며 번잡한 절차와 의례가 생겨났겠지. 복잡하고 어려워야 아무나 접근허지 몬할거싱게."
"그래서 <주역>이 이렇게 어려워진건가요?ㅠ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려고 사대부들하고 그토록이나 싸웠던 이유 같은 거요?
"그랴~. 역이나 프로메테우스의 불, 세종대왕의 한글... 이게 다 같은 맥락이여. '불'에 대한 신화만 해도 봐봐.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신분 질서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 상태에서 만들어진 거야. 그래서 신화의 기본 뼈대가 불을 독점하려는 신들과 그것을 인간에게도 전해주려는 프로메테우스의 갈등으로 만들어져 있잖아."
"그 과정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처절한 희생양이 되고요."
"뭐... 희생양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는 영웅으로 부활한 거나 진배없지. 결국엔 영웅신화인 거지. 것두 인간 승리의. 인간이 누구에게, 왜 핍박당했는지 감정몰입시키는 서사지. 그 결과 '신'으로 상징되는 자연계가 왜 응징당해야 하는지, 왜 착쥐당해도 싼지를 정당화시켜 주잖아?"
"그게 뭐 어때서요? 그게 인류 진화의 과정이고 문명 발달의 과정이잖아요?"
"글쎄... 지금부터 이게 니넘 숙제고 화두여. 저 신화가 문제가 있을지 없을지... 죽을 때까지 고민해 봐~. 문명의 과정이라고 했지. 내가 힌트 삼아 불에 관한 정말 시적이면서도 발견과 응용의 과학적 과정 그 자체인 신화를 하나 알려줄게. 같이 연구해봐~ "
"잉? 불에 관한 신화가 또 있어요?"
"거봐. 지할애비 생일날은 몰라도 예수 생일은 칼같이 챙기지들. ㅉㅉ. 동아시아 신화에 '고시레'라고 있쟈나. 그건 들어봤을 거 아냐?
"그럼요. 고사 지낼 때 '고시레'하쟈나요."
"그게 실은 사람 이름이여. 것두 불을 발견해 낸...11) 스마트폰으로 함 찾아봐. 신분 사회 이전에, 아주 '태!초에' 불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는지... 어떤 게 더 신비롭고 신화같은 신화인지. 것다가 어떤 게 더 합리적인지도... 서양 애들 따라서 합리적인 거 좋아하쟈너?"
뇌에 지진날 것 같은 알듯말듯한 말들을 던지던 영감은 세심정(洗心亭) 난간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어디 가세여? 세 가지 易이 있다면서요. '變易(변역)'에 대해서도 마저 얘기해 주셔야져."
"치료하러!" 영감이 버럭 소리친다.
"에구, 니넘만 오면 내 머리통이 쪼개질 것 같아. 가서 텃밭에 물이나 좀 주고, 닭 모이 챙겨주고, 강생이들하고 고냥이들 마사지 좀 받아야 다시 살겄어. 넌, 어여 꺼져버리라구!!"
"힝. 왜 저만 미워하는 거여요. 길바닥에 이름 없는 들꽃도, 온 동네 천덕꾸러기 짐승들도 다 그리 다정하고 살강시럽게 챙기면서 저한테는 왜 이렇게 야박하신 건데요~ㅠㅠ"
4
돌아오는 길에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져 있었다. 뇌를 감싸고 있는 근육이란 근육은 죄다 최대치 강도로 운동해서 급성 근육통이라도 앓는 것처럼. 영감은 알기나 할까? 세상없는 한량처럼 툭툭 던진 말들이 실은 몇 날 며칠 내 눈과 뇌를 바쁘게 긴장시킨다는 걸. 그저 <주역> 공부 좀 쉽게 할 수 없나 해서 찾아간 발걸음에 오히려 두 가지 '어려운' 숙제만 더 떠안았다.
'정보의 독점과 권력화'의 문제와 '인간 중심의 문명이란 무엇인가'하는... 늘 이런 식이지. 휴우~
등구백 선생이 말하는 ‘초급단계’는 아마도 ‘국가’ 성립 이전의 부족사회 단계일 것이다. 신분이나 위계의 구분이 없고, 그저 필요에 의해 리더가 정해지고(그도 또한 나이에 따르는 경우), 재주나 능력에 따라 역할이 맡겨졌던 소박한 공동체 사회. 진도를 조금 더 나가본다 해도 ‘소도’가 존재했던 고대국가 성립 전의 소국 사회, ‘삼한시대’라는 이름으로 표상되는 많은 사회 문화 요소들을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이런 단계에는 신분이 없었기에, 독점도 없었다. 따라서 당연히 배제도 없었다. 개인과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필요한 것을 조달하고, 개발하고, 공유하는 사회. 정보도 예외일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정보의 집약체인 ‘마을의 노인’이나 ‘당골’ 또는 ‘소도 안의 점 관련한 지혜’ 등도 모두 공유 자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졸한 형태일지라도 아마도 ‘고대국가’를 암시할 ‘고급단계’에 와서는 달라진 상황을 볼 수 있다.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니라 이른바 ‘전업-전문가’가 출현한다. 더불어 그 전문가에 의한 ‘독점’과 ‘양식화’ '제도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문명화’ 이면의 그늘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독점’은 곧 접근성의 제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특수계층’이 형성될 수 있다. ‘접근성을 제한’한다는 것은 구태여 필요하지 않은 여러 가지 진입장벽을 만드는 과정이다. 불필요한 기교와 형식이 개발된다. 시간이 지나면 '도식화'하고 ‘양식화’한다. ‘양식화’한다는 것은 사실은 무서운 말이다. ‘정신적 가치-영혼이 없어져 간다’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사 최고의 예술품으로 꼽히는 것으로 고려 비색청자가 있다. 그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것은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이다. 비색에 상감문양까지 예술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기술도 극한에 다다랐다. ‘비색 상감청자’는 고려의 대표 ‘상품’이 되었다. 그 결과 극점에 달한 고려청자는 다량의 유사품과 복제품을 양산하며 대량생산되기 시작한다. 이것을 ‘양식화’ 과정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영혼’은 자취를 감춘다. 품질도 하락한다.
안타까운 것은 대개 예술의 궁극점은 그 집단이나 국가의 궁극이기도 하고, 예술성의 퇴락은 곧 국가의 쇠퇴와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 그 근저에는 극한에 이른후 공허해져 퇴폐적으로 변질돼가는 정신문화가 있다.
15세기에 등장한 ⑦상감어문 매병이 질박하면서도 모던한 분청사기인 까닭과 이후 조선의 문화 양식이 소박미와 간결함의 결정체인 백자 달항아리로 대표되는 까닭은, 고려시절 극한에 이른 인공적 기교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터.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12)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신지박사와의 대화 속에서 발견한 역의 운명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고 있다. 본래 역은 세상 만물의 발전 과정이 그러한 반복된 절차에 따라 순환하고 변해간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지혜의 서이다. 또한 그 돌고 도는 만 가지 세상의 법칙에 따라 인간이 대응하는 방법을 최대한 담아내려 한 일종의 인생백과사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문가’에, ‘학문’에 혹은 ‘전통’에 포박당한 상태에서, 역은 더 이상 '변화 그 자체를 본질로 하는' 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특별한 비법'이 되어 돈과 권력에 포획당한 채 정치인이나 기업의 돈지랄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접근하기 어려워 신령스러운' 줄로만 아는 호구들을 낚는 금단의 그 무엇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할 것은 다시 ‘간이(簡易)易역’의 소박한 양식과 소탈한 정신세계를 회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막막한 바다를 항해하려는 늙은 어부의 손에 쥐어진 나침반처럼, 지상에서의 삶의 경험이 더해질수록 바다에서도 그 경험치만큼 더 읽혀지는 활용력을 지닌 어부의 유일하지만 거대한 도반.
해서 지금부터 풀어가는 이야기는 문명의 기교로 번쇄하고 난해해졌던 易의 오랜 봉인들을 해제하는 과정이자, 나침반처럼 간단명료하면서도 더할나위 없이 깊은 이야기를 품은 새로운 간이역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1) "<주역>은 연구자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율리안 슈츠스키는 19가지에 달하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8가지를 들어본다. ①점치는 책 ②철학적 문헌 ③정치가를 위한 편람 ④음경숭배의 우주발생론 ⑤논리학 교과서 ⑥이진법 ⑦유치한 책 ⑧헛소리..."<백서주역교석_해제_황준연>
2)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태백일사_신시본기>
3) " 龜甲(귀갑_거북껍질)으로 길흉을 점치는 것을 복(卜)이라 하고, 蓍草(시초_톱풀. 뺑때쑥. 점을 치는 데 썼으며 후에 대나무를 깎아 시초 대신 점을 쳤으므로 서죽(筮竹)이란 말이 생겼음)로 길흉을 점치는 것을 筮(서)라 한다. 복서(卜筮)는 선대 성왕(聖王)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時日(시일)을 믿게 하고, 귀신을 공경하게 하고 법령을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며, 백성들로 하여금 혐의가 있는 것을 해결하게 하고, 유예하던 것을 확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이 나서 점을 쳤으면 점의 결과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아야 하고, 어느 날 일을 행하기로 정해졌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예기禮記_곡례曲禮_上>
4) 당대인의 사유를 상상해보고, 최대한 감정이입하려고 애쓰는 것은 역사적 사료를 다룰 때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자 방법론일 것이다. "... 《노자》에 대한 주석을 검토할 때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노자주》의 영역본을 낸 린(Richard J. Lynn)은, '왕필은 가문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삶의 체험 속에서 자신이 어려운 난세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의 《노자》에 대한 주석은 일정한 수준에서 처세의 전략(a strategy for survival)으로 읽는 것도 꽤 가능한 일이다.'라고까지 표현한다. 달리 말하자면 《노자주》는 최소한 왕필이 그가 살았던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상황과의 대화의 흔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왕필노자주_해제>
5) 1999년 ‘갑골학 일백 년 기념 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집 <갑골학 일백 년>에서 갑골에 새겨진 다양하고 풍부한 질문들을 볼 수 있다.
6) "易은 변화의 총체적인 이름이고 바뀜의 다른 명칭이니, 易이라고 부른 것은 변화의 뜻을 취한 것이다.이미 의미상 변화의 뜻을 모두 취하였는데 유독 易이라고 이름한 것은,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易은 한 이름에 세 가지 뜻을 포함하였으니, 이른바 易(簡易간이)와 變易(변역)과 不易(불역)이다.' 하였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易(簡易)란... 번거롭지 않고 소요하지 않아서 담박하여 잃지 않으니, 이것이 易이다. 變易이란 ...시절이 변하여 서로 바뀌어서 능히 사라지는 것은 자라나고 반드시 專斷하는 자는 패하니, 이것이 바로 變易이다. 不易이란 그 자리(위치)이니,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이것이 바로 不易이다'." <주역정의>
7) "윷놀이, 게임 아닌 점술이었다.""한국의 '윷 점'은 우리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우리 고유의 민간 점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점법과는 여러 가지 방식에서 다 구별됩니다.(임채우_한국 윷 문화 연구소장) 4개의 윷을 던져, 나온 만큼 움직이는 세계 최초의 보드 게임 윷놀이, 단순히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한 해의 운세를 알아보는 주술성을 내재한 놀이였습니다.<YTN>
8) '외부의' = '당시 부족이나 집단 사람들의 총합적 지식 너머의'
9) 아래는 <갑골학 일백 년>의 공저자인 왕우신, 양승남이 <춘추><좌전><예기> 등 여러 고문을 인용하고 이어 붙여 재구성한 글이다. “점복관의 직무가 나눠져 있었다는 것은 은상의 점복 습속이 일찍부터 이미 원시 점복에서 승화되어 성숙되고 규범화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갑골점복은 상 왕조의 왕권정치 강화와 매우 밀접하게 연계된 채 점차 제도화되어 갔고, 한 시대의 고유한 예제의 구성부분으로 발전해 나갔다... 동시에 실천경험의 풍부한 축적, 인식사유의 제고, 사회 관념의 변화 등은 암암리에 갑골점복을 점차 자의적인 것에서 전문적인 것으로, 성행하던 것에서 쇠퇴하는 것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의심나는 것을 점복으로 해결하고, 나라에서 거북을 보관했던 것은 그 어떤 일이라도 점을 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며...”
10) 등구백 선생이 역사적 사실과 사료들에 기초해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또, 등선생은 서괘술(순서가 정해진 역)의 가지런하고 획일적인 상태는 응당 이와 같은 전업 점술가의 성과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백서주역교석_전문>
11) <<진역유기>>의 신시기에서 말한다.
"...고시례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 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산에 들어가니, 다만 교목들만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침묵하며 말없이 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숲에 불어 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여러가지 소리가 일어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데 번쩍번쩍 하고 불길이 잠깐 동안 일어나더니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얻는 법이로다' 라고 말하며 오래된 홰나무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다만 완전한 것이 못 되었다.
다음날 다시 교목들의 숲에 가서 이리왔다. 저리갔다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한 마리의 줄무늬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고시씨는 크게 한마디 외치면서 돌을 집어 던져서 이를 맹타했다. 그러나 겨냥이 틀려서 바위의 한쪽에 돌이 맞아 번쩍하고 불을 냈다.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태백일사_신시시본기>
12)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결손이 있는 듯하지만 그 쓸모가 닳아서 떨어지지 않는다.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쓰임이 끝이 없다. 크게 바른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크게 솜씨가 좋은 것은 마치 서툰 듯하며,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마치 어눌한 듯하다. 고요함은 떠들썩함을 이기고 차분함은 열기를 이긴다. 맑고 깨끗한 것은 천하의 바른 길이 된다.(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淨爲天下正)" <도덕경_4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