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토리텔링주역 Mar 02. 2021

내가 나를 위로할 때 펼치는 책

<주역 세계관2> 달의 이면과 수시변통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표상이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런데, 현실 때문에...'라는 말을 더 자주,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아닐까? 얼마나 많은 이상들을 '현실'때문에 보류하며 지금, 여기까지 왔을까? 얼마나 많은 욕망들을 '현실'때문에 뭉개버리며 왔을까?

어쩌면, 그럴 때마다 우리가 더 좌절하고 힘겨웠던 이유는 타인의 비난이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낙인찍어온 주홍글씨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니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때, 나에게 스스로를 납득시킬 더 정교한 논리가 있었더라면, 스스로를 위로할 더 깊은 정신적 성숙함이 있었더라면, 어느 날엔가 문득 거울 속에서 '원죄의식'같은 천형을 짊어진 나와 마주 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에도, 위로하는 것에도 다 실패했고, 심지어 그 실패들은 축적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세상엔 온통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조건과 타협하지 않고',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자아를 실현해나가라는 응원 메시지로 넘쳐나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을 전시하는 콘텐츠가 더 대접받았고, 그래야만 '멋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세상을 지배하는 그런 '멋진'(어쩌면 가상적일지 모르는) 인물들 때문에 나는 점점 더 왜소해져 갔고, 무능해져 갔고, 나약해져 갔으니까. (그런데, 이 억울감은 뭐지?)

그래서 나이를 먹어가던 어느 즈음엔 이상보다 현실을, 주관적 열망보다 객관적 환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끌어안아줄 '나', 마케팅 세상이 만든 '멋진 인생'에서 기어이 누락돼버린 나와 화해할 '나'를 만나고 싶었다. 비록 '합리화'라 할지라도 한 번쯤은 그런 나를 억울함 없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나고 싶었다.




1. 순정적 직진남, 선한 오지라퍼, 똑똑한 외눈박이 이야기


“내가 지금부터 니 억울함을 풀어줄 단서가 될 만한 세 가지 짧은 이야기를 해줄게.”

더듬거리며 기억회로로부터 ‘나의 문제’를 주섬주섬 집어올리자 신지 영감이 느닷없이 제안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찬찬히 추적해봐. 최종적으로 니 억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정 짓는 것은 니 사유의 몫이야.”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순정남 갑돌이의 최후

“옛날에 저 아랫말에 갑돌이가 있었어. 근데, 어느 장날에 윗마을 갑순이를 마주쳤어. 한눈에 뻑갔지. 글구는 어떻게 편지를 넣어서 중간쯤 있는 강다리 아래서 어느 날 5시에 만나기로 했어. 근데, 하필 4시 50분부터 억수같이 비가 퍼부어댄 거야. 야들은 어찌 됐을고?”

“둘이 너무 사랑하니까 빗속에서라도 만나려고 약속 장소로 가다가... 뭐 빗길 교통사고? 아님, <소나기>의 '진사 댁 따님'처럼 여자가 폐렴으로 죽나요? ”

“아니, 막장드라마 쓰지 말고~. 내 얘기의 여자는 똑똑해. 미련한 여자캐릭터 안 좋아해, 내가. 흐흣. 근데, 머스마들이 문제야. 야가 그 억수 같은 빗속에서 5시 정각! 다리 아래!라는 약속을 사수하는 것만이 사랑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자리를 지키다가 물에 휩쓸려 가버린겨. 그길로 황천길 가버렸쟈네.”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고 오지랖 떠는 친구를 둔 혼돈의 최후

“두 번째야. <장자>에 이런 얘기가 있어”

남해의 제왕은 숙(儵)이고 북해의 제왕은 홀(忽)이고 중앙의 제왕은 혼돈(渾沌)이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함께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하였더니, 숙과 홀이 혼돈의 은덕에 보답하려고 상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만은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하고는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더니 칠일 만에 혼돈이 죽어버렸다.1)


“조건과 타협하지 않는” 똑똑한 원숭이들의 최후

원숭이 주인이 도토리를 주면서 말했다. “아침에 석 되(朝三), 저녁에 넉 되(暮四) 주면 어떠하냐?"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주인이 다시 말했다. "아침에 넉 되(朝四), 저녁에 석 되(暮三) 주면 어떠하냐?"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서 날뛰었다.2)




2.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문명의 구멍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니가 말한데 답이 있잖아. 세상엔 온통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조건과 타협하지 않고' 자아를 실현해나가라는 말만 넘쳐 난다메. 근데, 어떤 사람이건 일이건 간에 ‘현실’없는 문제가 어딨냐? ‘조건’없이 존재하는 게 어딨어? ‘환경’ 없이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있어? 어떻게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와 내 이상과 내 목표만 관철시킬 수가 있어? 그야말로 판타지 속에서 정신승리로만 살아가라는 이야기쟎어, 그게.”


“그래도 세상엔 진리라는 게 엄연히 있고, 이데아라는 것도 있잖아요."

“출처도 확인 안되는 불멸의 진리, 플라톤의 이데아?”

“그런 이데아나 영원한 진리가 존재하니까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뚫고 도전하는 불굴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늘 배웠잖아요."

“그래서? 불굴의 갑돌이는 어떻게 됐어? ‘선의’로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한 혼돈의 친구들은 외려 뭔 짓을 한겨? 타협은 없다며 똑똑한 척 시시비비 가리던 원숭이들은 지들이 어느 포인트에서 웃음거리가 된 줄도 모르고 있지. 얘들이 다 지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세계 속에서 지 꼴리는대로 살다 저리 된겨.”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껌벅거렸다. 나는 그저 현실적인 조건과 환경에 너무 쉽게 무너지고, 무언가를 미뤄 오기만 한 나 자신에 대해 푸념했을 뿐인데, 그 반복적인 푸념에 진저리가 나 이제 차라리 그런 나를 나라도 용서하고 이뻐해 줄 걸 그랬다고 후회스럽다 했을 뿐인데, 신지박사는 난데없이 왜 저 자명하고도 유명한 테제에다 대고 삿대질을 하는 것일까?


“갑돌이의 문제가 뭐겠어?”

“미련곰탱이?”

“그걸 다른 말로 뭐래?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고... 심지어 원리원칙주의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하지. 원리원칙을 뭣 땜에 지켜? 살자고 지키는 거쟈나. 다 같이 잘 살아보자고. 근데, 죽어버렸네?”

그래, 갑돌이한테 필요한 건 융통성 있는 사고였다. 비가 쏟아져 강물이 불어나면 약속을 미루거나 장소를 바꿀 수도 있다는 유도리있는 사고력. 그런 사고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왜 갑돌이에겐 없었었을까? 열정과잉 때문에? 창의적이지 못해서? 왜 갑돌이는 창의적이지 못했을까?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고 숨겨진 것을 읽는 법을 몰라서?


“혼돈은 왜 죽어버렸겠냐? 숙과 홀은 딴에는 은혜를 갚겠다고 설치다가 외려 원수가 돼버렸네?왜?”

숙과 홀은 자신들의 판단과 의지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혼돈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혼돈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이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을 위해 대상화되었고 도구로 전락했을 뿐, 뭔가를 도모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당했다. '선물’이라는 미명 아래.

그들은 혼돈을 선진 문명의 시혜 대상이자, 계몽시키고 개척해야 할 미개한 대상으로 여겼을 뿐이다. 마치, 식민지 정복 과정에서 군대 보다 먼저 들이닥친 종교집단의 다정한 사제들이 보인 친절한 선행처럼... 그들은 효율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며 문명을 예찬하다가 오히려 소외를 양산했다.


“원숭이들은 어떠냐? 나는 요즘 사람들하고 젤 닮은 게 이 원숭이들인 거 같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도 쟤들은 뭐 대단한 걸 쟁취한 것처럼 기뻐하잖냐. 딴에는 영악스럽게 따지고 계산했는데... 실제로는 겉으로 보이는 이분법 세계 너머에 있는 다른 경지를 전혀 통찰하지 못한 거지. 나중에라도 이런 전모를 알게 되면 얼마나 쪽팔리겠냐?ㅋㅋㅋ 근데, 사실 너나 나나 우리 사는 꼴이 쟤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지.”

'조삼모사'는 장자가 춘추전국시대 당시 우후죽순 자라난 제자백가들이 서로 다른 이론을 내놓고 자기들만 옳다고 배타적인 주장을 하는 상황을 원숭이들에 빗대어 들려주는 이야기다.3)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깨어있지 못한 인간들이 사태의 한 면만을 보고도 전체를 본 듯 확증편향에 빠져 아옹다옹하는 모습.

군부독재와 기득권에 저항하다가, '민주화'라는 대장정이 끝나자 오히려 진영논리를 부추겨 전형적인 기득권 사수의 길을 걷고 있는 한 세대가 떠오르기도 한다.4)


누구나 환멸스러워하는 모습이지만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모습. 어쩌면, 조삼모사는 분별과 아집의 세계에 포획당한 인류의 ‘영원한 거울’같은 이야기일까?

맹목적 영웅주의, 배려 없는 우월주의, 맥락 없이 시비분별에 빠진 확증편향주의...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어떤 ‘주의’, 즉 고정관념에 빠져 자신들이 의도했던 것과 상반된 결과에 도달한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 자기들 세계에서는 하나같이 ‘어리석지 않은’ 나름 똑똑하거나 모범적인 자들이란 거다.


갑돌이는 그저 미련했을까? 내 경험이 주는 직관으로는 아마도 그는 분명 시간개념, 공간개념이 칼 같은 지적인 남성이었을 것이다. 혹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뱉은 말을 쉽게 거둘 수 없을 만치 다른 이들의 모범이었거나 다른 이들에게 혹독했던 자였을 것이다.

혼돈의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은 선진적이고 우월한 반면, 혼돈은 미개하거나 덜떨어졌다는 인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고로, 선생님처럼 부모님처럼 함부로 혼돈의 몸에 손대고도 ‘선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 스스로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는 게 더 문제다.

원숭이들의 행동은 집사가 자신을 상대로 함부로 농간부리지 않도록 딴에는 똑똑한 척 사전 경고를 날린 것일 수도 있다. 근데 어쩌나... 원숭이 집사는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이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걸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바르고, 우월하고, 스마트하다는 확고한 믿음에 빠져 있게 한 것일까? 우리는 그런 걸 ‘신념’ 또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이데아’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홀로 영원히 바른 진리의 세계. 그 자체로 완벽한 완전체여서 문명의 궁극적 이상인 세계.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3. 갑돌이와 원숭이, 혼돈의 친구들한테 필요한 것.


“열자는 조삼모사를 보고, 능력 있는 자가 능력 없는 자를 농락하는 거라 했지5). 그니까... 성인께옵서 머리 써서 어리석은 놈들 한 방 먹인 거라는 얘기여.ㅋㅋㅋ"

조삼모사를 가장 대중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방식은 확증편향에 빠진 원숭이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우화에도 해석이 분분하다. 신지 영감은 좀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슨 말인고 하니, '조삼모사'이야기의 초점은 원숭이 주인의 삶6)이라는 거여. 도에 통달한 사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화냈다 기뻐했다 하잖아. 그런데도 원숭이 주인은 그냥저냥 원숭이가 하자는 대로 해주지? 화 한번 안 내고. 왜?”

“그게... 사실 뭐...손해볼 게 없쟎아요.”

“그래! 바로 그거야. 왜 똑같은 상황에서, 주인은 어느 쪽이든 손해볼 게 없다는 것을 벌써 눈치채고 계산 끝냈는데, 원숭이 저눔아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설레발 친 것인가... 하는 문제. 이게 이 이야기의 뽀인뚜야."

"알고보니, 원숭이 주인은 봉이 김선달같은 희대의 거간꾼이었다... 걷는놈 위에 뛰는놈? 뭐 이런 반전인가요?"

"짜샤. 넌 날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경향이 있어. 데끼! 내가 그리 '빤~한' 사람이 아녀~"

"아님, 도 닦은 사람이니... 마음을 비워서... 라고 하실려고요?"

"것두 아니... 암튼, 그걸 전문용어로 허심(虛心)이라고 하잖아. 근데, 장자가 말하는 '허심(虛心)'은 그냥 '마음을 비운' 정도로로만 풀이하면 좀 밋밋햐~. <장자>의 다른 글에 보면, 그 '허심'이라는 표현이 딱! '성심(成心)'의 대척점에서 사용되거덩.”


“성심(成心)이요? '마음을 이룬' 상태 말인가요?그럼 뭐가 달라져요?"

“성심은 '이미 만들어진 마음'이란 뜻이야. 그니까, 뭐겠어?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이미 한쪽으로 굳어져 버린 마음인 거지.”

따라서 대칭적으로 사용되는 허심(虛心)은 아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시비분별에 익숙해지지 않은,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은 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 허심 덕분에 저 냥반은 원숭이가 못 보는 다른 면도 볼 수 있었던 거여. 그니까 아무 소리 않고 걍 달라는 대로 줘버릴 수 있었던 거고.”

“갑돌이나 원숭이들, 속과 홀한테 필요한 것도 저 허심의 상태라는 거군요. 고정관념이나 편견으로 이뤄진 성심 을 없앤?”

“그랴. 구멍 슝슝 뚫린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필요한 거지. 그래야 사태의 전모를 보고, 자신을 객관화해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으니께."

신지 영감의 강의가 이어졌다. 모든 소통의 전제는 '여백'이라는7)... 스펀지처럼 여백을 가지고 있어야 타자가 스며들 수 있다. 그래야 자연과 세계 속에서 호흡을 맞출 수 있다. 또, 그래야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사태의 전모를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게 된단다.


"근데, 너 잘 따라오고 있냐? 지금 내가 엄청 중요한 얘기 하고 있는데 알아 듣고 있는겨?”

“뭘요?”

“허심의 상태란 게 뭔지 말이야~

“말랑말랑한 거라면서요. 융통성 같은 거겠죠? 그리고... 혼돈의 얘기를 생각해 보면, 배려? 쌍방향 소통력? 그니까... 일방적이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과 입장을 고려하는 처신 같은 거?”

“그렇지. 그게 없으면, 그러니까 '성심'에만 의지한다는 건 뭐겠어? 현실이나 조건, 상황에 대한 분석이나 고려없이 지맘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처신하게 되는 거지. 이게 바로 뭐야?'판타지 영역'에서 '정신승리'로 살아가는 거쟈나. 그러니까... 백~날, 불굴의 의지에, 선의에, 시비분별력을 장착했어도 백전백패하는 겨. 쟈들처럼."

"그럼 허심의 상태가 되면 어떻게 달라져요?"

"융통성과 유연함, 기민함이 생기지. 고루한 아집에서 해방돼서. 한 마디로 ‘수시+변통’능력이 생긴다는 거지. 어쩌면 이 지점이 서양적 사유방식과 동아시아적 사유방식이 갈라지는 핵심 지점일거여.”

“왜요?”

“세계를 선과 악으로 이분된 대립적 질서로 볼 것이냐, 아니면 세계를 ‘보이는 것(정면, 표면, 때로는 선)+보이지 않는 것(이면, 때로는 악)’이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한 덩어리일 뿐이지만, 시간 전개에 따라 한 점 만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볼 것이냐...에 따라 인간의 행동방식이 바뀔 수 있거덩.”

"어떻게요?"

"쨔샤. 그건 니 숙제여. 내가 다 말해 버리면 니 머리는 대체 뭘로 밥값 할겨?"


세계가 선-악으로 이분돼있다면, 악의 질서는 절멸시켜야 하는 세계다. 그 세상에서는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라도 악을 청산하며 선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영웅과 정신 승리의 역사가 우대받을 것이다.

반면, 정면에서 이면으로 변화 중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수시변통’하는 능력이 가장 유능한 덕목이 될 것이다. 중용의 핵심 정신인 시중이자 주역의 핵심 원리가 곧 이 ‘수시변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수시변통력을 장착할 수 있을까?

첫째,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사태의 전모를 보며 걸어갈 수 있어야 해, 표면뿐 아니라 이면까지.

둘째,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어야 돼, 자신의 감정이든, 지식이든, 역량이든, 판단력이든.

셋째, 선-악에 대한 판단을 일단은 배제하거나 미룰 수 있어야 돼. 표면에 대해서든 이면에 대해서든지, 니 자신에 대해서든 타자에 대해서든지... 외워!”





4. 달의 이면이 정면에 나오면, '소년 가장의 때'가 도래한 것이다?


“헐... 이건 꼰대와 덜 꼰대를 가르는 사유방식 같은데요?ㅋㅋㅋ”

“넌 맨날 속 터지게 멍 때리고 있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안타를 날리더라? 소꼬랑지로 쇠파리 잡냐? 암튼. 글치! 장자 성님 말씀대로 하면 성심(成心)에 사로잡혀 있으면 꼰대가 되는 거구, 허심(虛心)을 체득해갈수록 덜 꼰대가 돼가는 거니까.”

“박사님은 어느 경지셔요? ㅎㅎㅎ"

“나? 나야 당근 '안 꼰대' 경지지~ 흐흐흣. 어린애와 여자들의 세상을 설파하는 노자 성님을 모시고 사는 내가 어떻게 꼰대가 된댜?"

"과~~~~연? 그.럴.까.요?ㅋㅋㅋ"


"<주역>에 '몽蒙괘'8)라고 있어. 몽蒙은 작거나 어둡다는 뜻이야. 유치하거나 무지몽매한 상태나 어린애."

"그런데, 몽괘의 괘사에는 "내가 동몽(童蒙)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동몽(童蒙)이 나를 구한다"고 적혀 있쟈나요. 그럼, 어린애가 어른을 구한다는 건가요? 이 괘는 진짜 좀 어려운 거 같아요 ㅠㅜ"

"이 몽괘는 '산수몽'이라고 산 아래에서 물이 나오는 생김새9)야. 산 아래에서 물이 나와 아직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형국인겨. 왜냐면, 몽괘를 아래 위로 뒤집으면 '수뢰둔'괘가 되거덩? 이 '둔'이 뭐야? 혼돈을 말하는거야. 카오스. 몽괘는 그 카오스가 끝난 직후의 상태니 얼매나 막막하겄어~ 그니까 일단은 멈추는 거여. 물러나려니 험해서 곤궁하고, 나아가려니 山에 막혀서 갈 바를 알지 못하니까... 일단은 멈춰야 하는 거지."



"카오스...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지. 이런 시기는 그동안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해보고 되짚어 봐야 할 때라는 거여. 우리가 자명하다 믿어왔던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과~~~연?'이라고 다시 확인 들어가 봐야 되는 거지. 니가 감히 나한테 '과~~연?'이람서 건방 떨듯이~" 

"헤헷. 그동안의 모든 가치나 신념, 진리, 지혜 같은 것들을 다 스톱하고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지. "밝은 자가 어두운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쟈나. 그게 뭔 말인고 하니... 이 시기는 더 이상 덕망 높고, 지혜롭기로 이름난 스승이 어리석고 몽매한 자들-어린애들을 구하는 시기가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어두운 자가 밝은 자를 구할 뿐이다"는 말은 제가 박사님을 구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ㅎㅎㅎ" 

"그랴. 지금부터 나같은 위대한 스승이 할 일은, 니넘같은 천둥벌거숭이가 뭐라도 하도록 도와줘야 할 때란 겨. 지~~발 뭐라도 좀 해라~잉!" 


"아! 그래서 몽괘를 소년 가장 괘10)라고도 하는 거군요?"

"한때의 어두운 면 - 달의 이면이 이제 정면으로 나오는 시기가 됐다는 거지. 그때가 되면, 무시당하고 업신여기던 존재와 세계가 다시 조명 받게 될 거야. 대신, 지금까지 표면에서 당연한 듯 '유일무이한 진리'이자 '자명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에는 균열이 나기 시작하겠지. 꼰대 취급받으면서."

"그래서 박사님은 노자~ 노자~ 하셨던 거예요? 여자와 어린이가 중요하다고 하셨던 이유고요?"

"개똥같이 말했는데도, 그거는 찰떡같이 알아듣네ㅋㅋ. 이제 위로가 좀 되는감?"


신지 영감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빼 아득하게 뭔가를 살펴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파안대소한다. 

"하... 그놈 참... 하하하"

영감의 눈길을 따라가니 가르마같이 매끈하게 난 논둑길 양옆으로 천여 평 펼쳐진 논 한가운데 멀찌감치 작은 짐승 한 마리가 보였다. 처음엔 사람을 보고 놀라 움츠리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살그머니 다가가 안경을 치켜올려 자세히 보고는 나도 어이가 없어 주저앉을 만큼 웃고 말았다. 

딱! 신지 영감님 친구인 것처럼 개구지게 생긴 살찐이 한 마리가 뻔뻔하고도 편안하게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다. 추수 끝난 너른 논을 침대 삼아, 가지런히 펼쳐 말리고 있는 볏짚을 베개 삼아, 공활하고도 청량한 가을 하늘을 이불 삼아...  햇살도 적당하고 바람도 적당한 날이더라니. 

신지 영감은 모처럼 어린애같이 장난기 그득한 눈으로 한참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을 잡으며 나즈막하게 탄식처럼 중얼거린다. 


"누구는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만큼, 또 누구는 전쟁터에서도 끼고 있을 만큼, 그렇게들 역을 공부하는 이유가 뭐겠어? 점을 치려는 게 아냐~. 그저 어떤 경지가 되기 위한 안간힘이지, 나름. 물러날 때와 나설 때를 알고, 가르쳐야 할 때와 배워야 할 때를 알고, 어리고 약하고 몽매한 존재가 나를 기르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그런 역의 이치가 곧 몸에 배어 일상의 리듬이자 삶의 태도가 되게끔 하려는 거지. 저 고양이 놈처럼. 세상 겁 없이 당돌하자네. 자연의 이치를 알아서인거거덩. 오늘은 지가 죽는 날이 아니고, 저기는 지가 죽을 곳도 아니라는 걸... 흐흣" 

"그래서 주역은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거라고들 하나요? 아니, '공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역을 한다'고 하는 건가요" 

"그랴~. 죽을 때까지 한다고해서 그 이치를 다 깨쳐 오롯이 몸에 익히기까지 할 수야 있겠나마는. 너는 죽을 때까지 검색하면 구글 안의 모든 지식을 다 꺼내보고 니껄루 만들 수 있겄냐?”








1) <장자_응제왕>


2) <장자_제물론>


3) “깨치지 못한 인간들이 사물의 양면을 동시에 보지 못함과 궁극 실재가 하나임을 모르는 것을 지적한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함축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원숭이들의 세계는 이렇게 영악스럽게 따지고 계산하는 이분의 세계, 분별의 차원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경지를 통찰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당시 서로 다른 이론을 내놓고 서로 자기들만 옳다고 배타적인 주장을 하는 제자백가가 모두 이렇게 보인 것이다. 이렇게 한 쪽만을 절대시 하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양쪽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을 천균(天均)에 머무르는 것, 즉 양행(兩行ㅡ두 길을 걸음)이라고 한다.

천균(天均)이란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이고, 양행(兩行)이란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이다. 이런 것은 역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인시(因是)의 문제라는 것이다.”<장자(오강남)>


4) 한상진(76)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민(中民)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원로 사회학자다. 중민이론은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에 등장했다. 그는 당시 한국의 변혁 세력에 '중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론에서 말하는 중민은 중산층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들과 연대해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이다. 당대의 대학생이자 지금의 86세대가 한 교수가 말하는 중민의 대표 사례였다.

한 교수는 여권의 주축인 86세대를 개혁 세력으로 봤지만, 최근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그가 2020년 2월에 발표한 '세계의 탈바꿈과 중민이론의 재구성' 논문에는 "국가체제 안으로 진입한 86세대 중민 정치집단이 기성체제의 특징인 양극 대립, 특권과 차별의 제도화, 민중 배제의 모순을 걷어내고 통합과 화해, 상생의 길을 걸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에 관해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신동아_21.02.27>


5) "능력 있는 자가 능력 없는 자를 농락함이 이와 같다. 성인도 지혜를 써서 뭇 어리석은 사람을 농락함이 이와 같다" <열자>


6) 그러나 장자의 '조삼모사'는 원숭이 주인의 도에 입각한 삶, 즉 통달한 사람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명목이나 실질에 있어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원숭이에겐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원숭이 주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원숭이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에 따른 행동이다. 여기서 원숭이 주인은 마음을 비운 전형적인 사람이다. 즉 허심(虛心)으로 원숭이를 상대했기에 자세를 하나도 흩뜨리지 않은 채 먹이 주는 방식을 쉽게 바꿀 수 있었다.<장자_역주편(김정탁)>


7) "[張伯行 註] 정이천伊川이 《역전易傳》을 지어 이것을 해석하기를 “사람들이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있으면 실實하고 주장하는 바가 없으면 허虛하니, 이는 모두 감통感通의 묘리妙理를 말할 수 없다.

오직 성인聖人은 마음에 사사로이 주장함이 없어서 실實하면서도 허虛하여 일편一片의 천리天理요 공심公心일 뿐이다. 일찍이 먼저 의견을 내세우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 남이 감동시키거든 내가 응하고, 내가 감동시키거든 남이 믿어서, 감동함에 통하지 않음이 없다. <근사록집해_성백효>


8)'蒙은 형통하니, 내가 童蒙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童蒙이 나를 구하는 것이니..." [산수몽_괘사]

"내가 童蒙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童蒙이 나를 구함은 뜻이 응하는 것이다." [산수몽_단사]

물건이 이미 闇弱하여 마음에 형통하기를 원하면, 이는 바로 밝은 자가 어두운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德이 고명한 스승인 내가 어두운 童蒙에게 가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두운 자가 밝은 자를 구할 뿐이요, 밝은 자는 어두운 자에게 자문하지 않으므로 “童蒙이 나를 구한다.[童蒙求我]”라고 말한 것이다.<주역정의_공영달>


9) 〈산수몽_象傳〉 “山 아래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蒙卦이니"

山 아래에서 물이 나와 아직 갈 바를 알지 못함은 蒙卦의 象이다. <주역정의_왕필>

山 아래 물이 나와 아직 갈 곳이 있지 못하니, 이는 험하여 멈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몽매한 象이 되는 것이다. <주역정의_공영달>


10) "어린이가 나서야하는 형국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나만이 어린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나를 구한다." [괘사]

이 괘는 상층부(산)와 하층부(수)에 모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이 경우 전체를 해결해야하는 육오는 상구의 힘에 눌려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처지로 매우 어려운 상황의 괘다. 이 경우의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다. 어리지만 무한한 힘을 가진 능력자 구이를 등용하여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소년 가장이 집안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역강설_이기동>




















이전 02화 『주역』이 필요한 시간 vs 스마트폰이 필요한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