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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Apr 05. 2019

낭만적 알코올과 주사

지극히 개인적인 술 예찬론

나는 정이현 작가님의 오랜 팬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그녀의 데뷔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다시 읽었다. 주인공은 낭만적 사랑을 비즈니스라는 사회적 도구로 역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처녀를 아끼고 아낀다. 하지만 결국엔 남자와의 잠자리 후 선물 받은 짝퉁 명품 가방을 손에 꼭 쥐는 그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한숨을 토해내게 된다. 완전한 반어적 팩트폭력.

그렇다면 진짜 낭만은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 번뜩 떠오른 나의 낭만.



으악. 나 진짜 알코올 중독일까.


나는 술을 제법 즐기는 편이고, 그런 만큼 술에 대한 나만의 철학(?) 같은 것도 가지고 있다.

요즘은 하는 일이 많지 않아 조금 한가하고, 근 일주일은 7일 중 4일을 술을 마셨다. 연일을 퍼붓다 보니, 하루 온종일을 숙취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버리는 날도 있었다. 늦잠을 자다 일어나 전화를 받는 날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당연하다는 듯 "어제 또 술 마셨어?"라고 묻는 경우가 많고, 엄마는 너 그렇게 집에서 버릇처럼 술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 된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선, 나 진짜 대체 왜 이렇게 술을 마셔대는 건지, 이러다 정말 큰일 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인터넷으로 '알코올 중독 자가진단'을 찾아 점수를 매겨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고위험군으로 진단이 됐다. 그렇다고 술을 끊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그냥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나는 술에 취해도 잘 티가 나지 않는 편에 속하고, 별다른 주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나 자신을 꽁꽁 동여매고 있던 단단한 줄이 조금 느슨해지는 걸 느끼는데, 제법 들뜨고 신난다거나 평소보다 말과 웃음이 많아지는 정도. 그게 내가 술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짧은 현실도피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술은 낭만적이다.

사람마다 주사는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가장 곤혹스러운 주사의 유형은 바로, 술을 마시고 과격해지면서 '파이터'기질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아오 씨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가!! 놀 거야!! 내 맘대로 할 거야!!"가 술버릇이라, 술만 먹으면 남편과 다투는 유형. 평소에는 엄청 순한 성격인데 취기가 오르면 아무한테나 막말을 하거나 싸움을 거는 유형. 몇몇의 그런 지인들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난 오랜 고민(?) 끝에 그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무지무지 착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이 그러했다. 늘 표출하지 못했던 자신의 의견이나 화를, 술기운을 빌어 터뜨리는 것은 아닐까. 우습지만 이 또한 본인만의 낭만이라면 낭만이다.

이렇듯 숨겨왔던 나의 본성을 끌어내 주는 수단이 바로 '술'이다. 타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내가 헤벌레 하고 조금 풀어지기도 하고, 착한아이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이 갱스터가 되기도 하는 만취의 상태. 그것은 어쩌면 비현실(非現實)이다. 낭만은 늘 현실과는 반비례하니까, 가끔은 낭만적이지 않은 현실보다 낭만적인 비현실이 더 필요한 날이 있는 것이다.

책에서 봤던 것처럼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여전히 없고, 현실에서의 낭만은 그저 술을 마신다는 것, 조금은 풀어져도 괜찮다는 것. 그것뿐이다. 포장하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실수 정도는 '미안 내가 술에 좀 취했었나 보네'라는 말로 용서가 되기도 하는.

그래서 우리의 주사는  모두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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