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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Apr 18. 2019

엄마는 우리 집의 가장이었다

그 시절 엄마의 예민함

나의 서른 즈음. 그리고 엄마의 서른 즈음.

한 해 한 해 나이가 늘어갈 때마다 종종 '내 나이 때의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지' 하고 되돌아볼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가끔 가슴이 아팠다. 기억해보면, 자유롭게 삼십 대를 즐기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엄마의 이맘때쯤은 조금 가혹했던 것 같다.

엄마는 스물네 살에 언니를 낳았고, 스물일곱엔 나를 낳았다. 서른 즈음에는 두 딸을 키우면서 집에서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자라면서 엄마는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보험회사, 마트, 식당 등을 다녔다.

아빠는 작은 간판가게를 운영하셨는데, 수입이 불규칙했다. 하지만 문경에서 가장 오래된 간판가게였고,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빠는 늘 돈보다는 명예를 택했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아빠가 고백한 사실이지만, 남 밑에서 일하기 싫어 들어오는 일도 다 거절하고 어려울 때도 자기의 사업을 접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의 경제권은 완전히 분리가 되어 있었다. 내 아빠는 직장에 다니는 아빠들처럼 주기적으로 엄마에게 돈을 갖다 주지 못했고, 우리는 용돈은 주로 아빠에게 받았으나 먹는 것과 입는 것 등의 전반적인 생활비는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던 나의 유년시절. 하지만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눈을 떠보면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있기도 했고, 한때는 오전마다 고소한 빵 냄새와 더불어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으로 집안이 가득 채워진 때도 있었다. 밤에는 배달 온 통닭 앞에 네 가족이 도란도란 둘러앉아 시트콤을 보면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족하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아마 가정을 위해 안팎으로 노력해온 '가장 엄마'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는 가녀리고도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라도 가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가끔씩 술에 취한 날이면 아빠와 심하게 다투는 바람에 늦은 밤 큰아빠나 외삼촌이 동원되기도 했고, 아빠와 더불어 내 등까지 떠밀면서 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소리친 적도 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피곤한 상태에서는 언니와 내가 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심하게 혼내거나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씩 그때 얘기를 하면서 미안하다며 눈물짓곤 한다.

생각해보면, 당시 엄마의 나이는 고작 서른 몇 살이었다.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많이 어렸고, 감당해야 할 덩치 큰 현실들 앞에 많이 아팠으리라.


영화 <생일>


곧 마흔이 가까워오는 미혼의 친한 언니가 있다. 그녀는 완벽한 비혼 주의자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직에 계셨었는데,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가정주부가 되었다고 했다. 늘 예쁘게 머리를 묶어주고, 도시락에 하트콩이나 병아리 모양의 메추리알을 넣어주는 다정한 엄마였다. 그러나 그 딸이 비혼 주의자로 자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서'라고 했다.

우리는 이렇듯 어떤 형태로든, 어릴 때 보고 자란 '엄마의 모습'에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나처럼 집안 형편이 어려웠거나, 또는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랐거나, 애정의 결함이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거나. 이러한 아픔을 가진 여성들은 대부분 크게 두 갈래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나 행복한 가정에 대한 동경으로 일찍 결혼을 하는 경우가 한 가지의 길. 아니면 반대로 또 다시는 그러한 상처나 고생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혼자가 될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또 한 가지의 길이다. 나는 후자 쪽에 속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고 싶지 않고, 누구도 나에게 의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현재의 나도 어쩌면 서른 즈음의 엄마처럼,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가장이다.

나는 일찌감치 1인 가구의 가장이 되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나눠 생활의 계획을 세운다. 혼자 밥을 해 먹고 청소를 하고 의자 위에 올라가 형광등을 갈아 끼우기도 한다. 아프면 스스로 죽을 끓여먹고, 무거운 가구도 혼자 옮긴다. 그러다가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 땐 취미에 돈을 투자하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가장인 내가 부양해야 하는 가족은 유일한 구성원인 나 자신, 한 명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 하나 책임지기 벅차 매일을 허덕이며 살고 있는데, 가녀린 몸으로 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삼십 대, 그 청춘이 참으로 애처로왔다.

엄마는 요즘도 집안일을 하고 사과밭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아픈 아빠를 돌보면서 가장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완벽하게는 아니겠지만 '책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생긴 삼십 대의 나는 이제, 갱년기를 보내고 있는 엄마의 예민함과 아픔을 한 발짝 더 이해하기로 했다.

가족을 책임지느라 하루하루가 바쁘고 예민했던 그 시절의 엄마는 딸의 예쁜 웃음을 보고 잠시라도 피로감을 덜었을 테고, 나아지지 않은 현실이 서러워 가끔 악몽을 꾼다는 요즘의 엄마는,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잠시 현실을 잊고 웃음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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